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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크게 이는 오늘(2월 2일)같은 날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오고 가지만 그이들은 너무도 쉽게 이곳을 떠나버리고 있었다. 바로 용연12범의 하나로 꼽는 절경을 지닌 용연으로, 용담동 미륵(서자복)과 용화사가 자리한 언덕을 오르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가만히 그들의 동선을 보노라면 목적은 오로지 용연을 이루는 두 절벽 사이를 이은, 이른바 '구름다리'를 왕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 땅의 멀지 않은 과거를 담당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인데 관광안내원의 인솔에 기꺼이 따르며 줄줄이 꼬리를 이어 다리를 넘어갔다 넘어온다.

 

아주 멀찍이 내려가서 위로 올려다보면 삐약삐약 병아리떼 같은 소풍 온 어린이들마냥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어르신들의 행렬이다. 볼 것 많은 제주도라 시간이 빠듯하기도 하거니와 이분들이야말로 평생을 이런저런 노동과 시름으로 채웠을 것이니 일손을 놓고 밖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흥겨운 일일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곳 용연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물론 확인은 못 해봤다. 어쨌든 구름다리가 다시 생긴 이후로 용에게 고달픈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이전 구름다리는 1967년에 연결되어 20년 뒤인 1987년에 철거되었다).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선남선녀들이 자물쇠를 다리에 잠가놓고 그 열쇠를 아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장면도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 다만 정황이 그러하다. 열쇠를 버리는 행위가 있어야 자물쇠도 열리지 않고 사랑의 언약도 그만큼 오래 유지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쪽에서 건너편 서쪽을 바라보면 급한 경사를 이루어 바다쪽으로 내려오는데 '서한두기'라 한다. 물론 이쪽도 만만치 않은 언덕이며 급경사를 이루어 쌍벽을 이루는 '동한두기'이다.

 

짙은 옥빛으로 바닥을 영롱하게 물들이는 물줄기는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둘러친 매끈한 조면안산암 벼랑을 따라 S자로 굽어 올라간다. 물이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곳에는 듬직한 바위들이 넓게, 또는 높게 자리잡고 막아선다. 바위 하나엔 검은 겨울깃으로 멋을 낸 왜가리 한 마리가 꿈쩍 않고 서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네모난 보도블록을 깔아놓은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돌 하나하나마다 꿈틀거리는 용이 새겨져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보면 이곳도 공원으로 단장하여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원래는 넓은 보리밭이 있던 곳이다. 높은 고개마루에 있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보릿고개'이다.

 

단장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나 그 덕에 암반, 암석이 부수어져 없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정자의 남쪽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내려가면 만나는 이 고시락당은 옛맛을 영 느껴볼 수 없었다.

 

 

신당을 상징하는 나무도 기운이 쇠했는지 팔다리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당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다. 삐뚤빼뚤한 글씨이지만 정성을 한껏 담아 쓴 기원문은 참으로 절절하기 그지 없다. 그 내용도 알듯 말듯 아리송하게 적었으나 용왕님,부처님께서는 꼭 들어주시리라 함께 믿는다. 이 신당에 좌정한 주인되는 신은 용왕 말젯따님애기씨(셋째 딸)인 '용해국대부인'이다.

 

용은 용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용왕이기도 하다. 그리고, 용은 '곤룡포', '용안' 따위에서 드러나듯 임금의 상징이기도 하다. 용은 물과 관련이 깊어서 비를 불러온다고 믿어져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8년(1418) 7월 1일에 원단(옛 원구단)에 좌의정을 보내 제사 지내고, 승려는 두 절에 보내고, 판수(점치는 장님으로 일종의 무당으로 보인다)는 또 한 절에 모아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고 하였다.

 

또, 개성에 있는 박연에 호랑이 머리를 잠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못에 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머리가 용을 대접하는 일종의 제의음식으로 쓰인 듯하다.

 

그렇게 잘 모셔서 비가 내리면 농사도 잘 되고, 백성이 시름을 덜고, 나랏일도 잘 풀렸을 것이다. 세종 때에도 이런 예는 많이 보이는데 박연 외에 한강, 양진을 추가하여 호랑이 머리를 잠갔다.

 

특히 세종 12년(1430), 5월 25일에는 "이제 바야흐로 중하(仲夏)라 볕이 강하고 비가 오지 않으니, 여러 도(道)에 명하여 호랑이 머리를 용이 있는 곳에 잠그라"고 할 정도로 임금들은 물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 용연 물에도 호랑이 머리를 잠갔는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이 곳에도 기우제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현용준이 <제주도전설>(서문당)에 채록하여 넣은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한 제주목사가 가뭄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데, 몇 번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었다. 심방(무당)이 용소(용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될 것이라고 가벼이 한 말을 목사가 전해 들었다. 심방을 불러 기우제를 치르라고 한 뒤 비가 안 오면 각오하라고 하였다. 심방은 짚으로 큰 용을 만들어 정성을 다해 빌었다. 그렇지만 하늘은 맑기만 하였다. 죽게 될까 두려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니, 사라봉 위에서 한 점으로 시작한 검은 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덮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심방과 사람들이 짚으로 만든 용을 메고 성 안으로 들어가자 목사와 관속들이 나와 절하고 어울려 한 판 크게 놀았다. 그 뒤로 가뭄 때마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전설이지만 몇 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목사가 심방보다 권력은 우위에 있지만 사람들은 목사보다 심방을 잘 따른다는 점이다. 이형상 제주 목사로 대표되는 유교 권력이 신당, 사찰 파괴라는 억압을 가하여 위축되었지만 그럼에도 제주도의 서민들은 심방과 더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이 내세우는 것이다.

 

심방의 능력이 목사의 능력보다 우월하다는 결과로 드러나자, 마침내 목사 이하 관속까지 기꺼이 절하고 모두 함께 놀았다고 하는 대목은 현실로는 일어나기 힘든 것이다. 이는 차라리 반대로 심방이나 주민들이 바라는 '희망사항'을 말만으로라도 성취하는 대리만족인 셈이다.

 

제주 목사가 비를 못 내리고 절절 매고 있을 때, 사람들은 '에라, 잘컨다리여!' 하고 속으로 고소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제주 목사에게서 무능력하고 무례하며 혹세무민, 가렴주구하는 탐관오리의 냄새가 폴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변방, 제주 역사에 그리도 많았다던 썩은 관리와 그에 아첨하고 빌붙어 덩달아 괴롭혀대던 관속들의 모습이 느껴지는 슬픈 역사를 담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곳 벼랑에는 마애명이 여럿 있다. 그 대부분이 제주목사를 지낸 역대 13명의 인물과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 중에 동쪽 벼랑 높은 곳에 있는 굵은 한자로 새긴 '홍종우'라는 이름이 두드러진다.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갔던 개화파 김옥균이 10년만인 1894년에 상하이에서 총에 맞아 사늘한 시체로 고국에 돌아온다. 홍종우가 이 시체와 함께 입국하는데 그가 바로 총을 쏘아 죽인 사람이다.

 

홍종우는 승승장구하는데,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한 인물이기도 한 그는 법학을 공부한 이력 때문인지 평리원 재판장까지 지낸다. 수구파의 인물로 분류되는데, 그 뒤에 하락세에 들어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제주목사를 지낸다.

 

현행복의 <취병담>(각)을 보면 제주 목사 재임시에 '산에 있는 소나무를 많이 벌채하고 민재 1만 냥을 징수하여 삼군에 분장한다고 하면서 뇌물로 쓰는 등 사회가 부정부패로 가득차 원성이 높았다고 함'이라 적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마애명이 많이 보이는 것은 예로부터 이곳이 절경으로 손꼽아 온 곳이라는 증거로 남는다.  앞서 나온 제주목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을 시켜 만든 <탐라순력도>(1703)에 '병담범주'라 하여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이름의 '병담'은 '취병담' 곧 '병풍을 두른 듯한 못'을 뜻하니 '용연'을 그렇게도 불렀다. 

 

그 밖에 이곳 주변에는 '머구낭물', '통물'이라는 샘이 있고, 서쪽 경사를 따라 바다쪽으로 늘어선 횟집을 끼고 돌아가면 그 끝에 '엉물'이란 샘물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에 뚫었다는 굴이 동서 양쪽 절벽에 하나씩 있다.

 

 

세찬 파도가 일어 밭을 갈아 엎듯이 바다 밑까지 뒤집어 놓더니 떠밀려온 적갈색 톳들이 못가에 쌓인다. 더러는 쌓이지 않고 용의 허리춤까지 물살에 밀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 허리춤에 박힌 암석들에 가로막혀 물과 함께 뱅글뱅글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태그:#제주도, #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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