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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퀼리브리엄>은 책과 모나리자 그림이 불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화 속의 독재자는 책과 예술 작품을 소거하며, 국민에게 약물을 투여해 기계처럼 충성하게 한다. 역사 속 많은 지배자들처럼 책에 담긴 지혜와 사상을, 또 예술에 담긴 창의성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 디스토피아의 그림자가 2009년 한국사회에도 드리워졌다.

 

한예종 괴담, 현실이 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는 국내 유일의 국립예술학교다. 15년 남짓한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이미 국내외 예술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그런데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가 여기에 칼을 빼들었다.

 

'한예종 사태'의 발단은 5월19일 황지우 전 총장의 사퇴였지만, 핵심은 다른 데 있다. 문화부는 두 달에 걸친 집중감사 후 "학교 설립 취지에 맞게 실기 중심 학교로 재편해야 한다"며 이론과 폐지/축소, 통섭교육* 및 협동과정 중단 등 학제 개편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는 문화미래포럼(이하 포럼)의 주장과 일치한다. 포럼은 변희재, 복거일 등 문화예술계 내 뉴라이트 성향 인물로 구성된 단체다. 이들은 '좌파의 온상인 한예종 해체'를 역설해 왔다. 여기에는 실리적인 이해관계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럼과 행보를 맞추고 있는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회(이하 예교련)은 사학재단의 교수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9월3일, 포럼과 예교련이 공동 주관한 주제발표회에서 정재형 동국대 교수는 한예종에 "타 예술대학과 중복되는 모든 전공을 폐지할 것"등을 요구했다. 서우석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는 "해체는 정부가 진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된다. 해체 이후의 인력과 기자재 배치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은 "과거 수도공대가 홍익대에,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에 넘어갔듯이, 해체 이후엔 부분 인수할 대학도 많고, 입찰을 붙여서 띄워주면 간단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내용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한예종 괴담'으로 떠돌았다. '괴담'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기술 익히는 '도구'가 아니다"

 

 

'위기의 한예종'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학생들이다. 지난 10월7일 정오, 이현빈씨(22, 영화과 2년)는 문화부 앞에서 '악어와 악어새'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한예종을 뜯어먹는 뉴라이트 문화단체와 문화부의 공모관계를 풍자한 것이다. 당장 이 날 오후에도, 다음 날에도 저녁까지 수업이 있다. 그러나 '위원장의 일을 덜어주고 싶어서' 시작한 비대위 활동은 생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어떤 창작자 밑에 들어가서 그의 '도구'가 되려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돈 벌고 유명해지지 못하더라도 뭔가를 '창작'하며 살겠다고 온 건데 '기술'만 가르치겠다니... 더구나 이론이란 결국 '사람의 삶'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 없이 무슨 예술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인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인근 대학의 강의를 따로 듣기도 했던 현빈씨는 "통섭교육이 중단된 것도 아쉽지만, 담당 교수가 징계까지 받는 것은 정말 부당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영상이론과 강정석씨(29, 전문사 1년)와 탁은창씨(33, 예술사 4년)는 '실기 중심'이란 말은 학교 구조조정을 위한 핑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더불어 "단순히 통섭교육이 좋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 그건 완성된 이론도 아니고, 새로이 만들어가려 한 과정일 뿐입니다. 문제는 창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뭔가 새롭고 창조적인 걸 해낼 수 있다는 의지와 노력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단 한순간에 뒤집어졌다는 거죠.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그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때문입니다"고 했다.

 

그간 한예종에는 학생 자치활동이 전무하다시피했다. 구성원과 연령대가 다양하고, 개인작업과 경쟁 위주인 예술학교의 특성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황 전 총장 사퇴 후 다음 날, 4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총회를 진행했다. 바로 한예종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처음엔 '잡아가면 어쩌나'하며 떨며 집회신고를 내던 학생들은 몇 달에 걸쳐 릴레이 퍼포먼스 등을 통해 문화부를 규탄해 왔다. 여름방학 중에는 교수, 학부모들과 함께 '자유예술대학'이라는 자치교육과정도 진행했다.

 

2학기 상황은 좀 더 복잡해져

 

2학기에 접어들면서 문화부의 처분(2010년부터 이론과 단계적 폐지, 심광현 교수 징계처분 등)은 박종원 신임 총장의 손에 맡겨져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박 총장은 뉴라이트 단체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내부의 싸움'이 더해진 셈이다.

 

학생들은 지친 기색이다. 정예은(22, 서사창작과 3년)씨는 9월에 휴학을 했다. "부조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도 화가 나고, 대책활동을 하며 사람들에게 실망한 부분도 있었어요. 언젠가부터 이유 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곤 했어요. 그러면 뭔가를 물어뜯고 싶어져 연필을 끝이 부스러질 때까지 물어댔죠. 몇 달을 그러니까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울증 상담 받는 학생들도 있어요."

 

김주현(26) 비대위원장은 "최근 심 교수의 징계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현수막을 학교 측이 철거했어요. 학생들은 매일 찢어진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고요. 학생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학교 행태가 실망스러워요"라고 했다. 지난 9월 학생들이 기획한 '신임 총장과의 열린 대화'도 학교 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비대위는 일단 '총장과의 열린 대화'를 관철하고 부당징계를 막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다음 대 총학생회 건설을 함께 준비하며 비대위 활동의 지속성을 확보할 계획이다. 주현씨는 고민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공부만 하고 싶어서 하던 일 다 접고 입학했지만, 각자 개인 작업에 매몰되는 모습이 아쉽기도 했어요. 이 과정을 통해 학교 분위기가 변한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희망의 근거는 '변화한 우리'

 

현빈씨는 작품을 쉽게 만들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자의식 강한 작품을 만들곤 했어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닌 걸 알고 나니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예술작업이란 결국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고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떨어질 수 없어요. 그렇기에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예술에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떤 지점에서 얘기를 하게 될까 하는 고민을 요즘 많이 하는데, 내가 기득권이 아니니까 그 쪽은 아닐 거 같고.(웃음) 앞으로는 '여성'의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올해 철거민, 쌍용차 노조원들의 부인을 봤어요. 여성이라는 존재가, 더구나 평생 집안일만 하던 어머니들이 정치적 싸움에 나서는 이유는 남자와는 다른 것 같아요. 학생들이 기성세대와는 좀 다른 이유로 싸우는 것처럼." 그는 국정감사 기간 1인 시위를 계속 이어가겠다고 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거니까, 누구든 한 명이라도, 뭐든 하나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은창씨는 "패배의식 때문에 학생들의 공분이 줄어든 점은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일을 권력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까. 그럼 끊임없이 틈새를 파고드는, 즐겁고 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저항을 잘 할 수 있는 건 문화, 교육 같은 게 아닐까 하고요. 사실 예술가들이 보수적인 면이 있어요. '순수 예술'을 고집하며 자의식 높은 사람들도 많지요.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보수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정부가 우리 뇌관을 터뜨려 준 셈이죠."

 

예은씨는 1학기를 '재미있었다'고 기억한다. "문화부 앞에서 한 퍼포먼스들이 기억에 남아요. 피켓 들고 덤블링 뛰고, 춤추고... 재미있었어요. 축제 같았어요.

 

비대위실에도 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매일같이 모여 밤 새우고 하니까 회의할 때 "회의는 안건 갖고 하는 거지 무작정 대책 나올 때까지 모여 있는 게 아니다. 각자 집에 가서 좀 쉬고 모이자"고 달랠 정도였어요. 야식 배달집에서 주는 서비스 쿠폰 100개를 다 모아서 서비스 음식을 받기도 했죠.(웃음) 수업만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못 만났을 거예요. 학교 전반적으로도 학생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해 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어요. 원래 잘 안 모이는 분위기였는데."

 

그는 휴학 중이지만, 비대위 일은 계속하고 있다. "이 과정은 곧 끝날 거라고 봐요. 사람들도 자기 표 때문에 자기 학교가 없어지는 걸 봤으니까 앞으로 달라질 거고요. 뉴스를 보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 하는 시대지만, 그래도 봐야 해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알지 못하면 그저 순응하게 되니까. 모두 그저 분노만 하거나 참지만 말고 그걸 다른 에너지로 바꿀 방법을 생각했으면 해요. 귀차니즘은 빼고.(웃음)" 그리고는 덧붙였다. "저도 심신이 지친 상태라 사람들의 단점만 본 거 같아요. 좀 쉬고 다시 돌아와야죠."

 

'장차 무엇이 되고 싶어 한예종에 왔느냐'는 물음에, 이들은 하나같이 "정한 것은 없다"고 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창조란 정해진 경계를 넘어 세상을 끊임없이 궁금해 하는 순간 가능한 것이다. '결정된 답'도, 권력과 자본이 정한 답도 필요하지 않았다.

 

* U-TA(Ubiquitous Arts & Technology) 통섭교육 : 통섭이란 '다른 분야의 학문끼리 교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예종은 심광현 영상이론과 교수를 추진팀장으로, 예술에 인문학과 과학기술간의 교류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통합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었다.

 

* 한예종의 교육 과정은 예술사(대학 4년제에 준하는 과정), 예술전문사(대학원에 준하는 과정)로 나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예종, #문광부, #뉴라이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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