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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4년 전 헤이리로 이사를 오면서 밀봉시켜둔 가족의 과거 상자를 열었습니다. 몇 권의 앨범사이에서 발견된 '가족신문'에 눈길이 갔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 과제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크레용과 색연필로 구성한 서툰 네 쪽의 신문에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코너가 있었고 출력된 처의 편지가 붙어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당신에게,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면 공연히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며 눈물이 난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감상에 젖은 탓인가 봅니다. 영원한 인생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도 조급한 마음에 당신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이들도 잊고 당신과 둘이서만 호젓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당신만의 혼자여행에서 돌아오면 이것만은 꼭 실행에 옮기고 싶었는데 이 작고 하찮은 소원을 하나 이루지못하니 속이 상할 수밖에요.

 

당신은 늘 혼자 배낭을 꾸리고, 아이들은 크게 제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장한 것 같아요. 가족들과 함께하니 '내일 죽어도 난 행복하다'는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제 자리가 없어진 느낌입니다.

 

전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면 꼭 실행에 옮기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왔다갔다는 보람으로 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 하나만 데려다 키우렵니다. 그것만이 제가 보람으로 여길 유일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만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도 더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나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건, 주리가 어떤 대학을 가던 성실하게 자기의 삶을 사는 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당신이 내년에 또다시 미국으로 떠난다면 나리의 대학입시도 걱정입니다. 전 단지 스스로의 노력과 판단에만 맡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과 항상 같이 있고 있을 뿐이에요. 헤이리에 집을 짓는 것도 중요치 않습니다. 산자락 작은 오두막이라도 좋습니다.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저의 행위를 결정하는 판단기준은 항상 유년기의 기억들에 기반하고 있음을 봅니다.

삼도봉 자락, 두메에 가까운 농촌에서 논배미 몇 자락에 삶의 모든 기망期望을 의탁한 채 살아가는 마을의 시골뜨기로 자란 제가 다행이다 싶습니다.

 

성실하되 근면하고 검약儉約한 삶이 인생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라고 여깁니다.

 

등유 몇 방울을 아끼기 위해 결코 등잔불을 켜지 않고 저녁을 잡수시던, 새벽 4시면 마당에서 헛기침으로 모든 식구들을 깨우던, 탈곡 후 마당에 떨어진 벼의 낟알을 줍던 할아버지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둑새벽에 들로 나갔던 아버지가 늦은 아침을 드시기 위해 집으로 들어오실 때 가랑이는 늘 새벽이슬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으스름 달빛아래에서도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던 아버지는 동네아주머니들에게 한밤 중 들에 출몰하는 도깨비였습니다.

 

저는 근면과 검약을 책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행위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의 딸, 아들도 식사의 찬을 남기거나 밥 한 톨 남기는 것을 죄악으로 여깁니다.

 

제가 지구의 자원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원을 인간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나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 큰 기업을 일구어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한 성공한 기업가 보다 입신立身하지못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회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성실과 근면과 검약만으로 대처에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때때로 연극 한편 본다는 것이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저는 욕망의 경주에 동참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차라리 바람과 별을 친구삼기로 마음정하고 짬이 허락하면 배낭을 꾸렸습니다. 처에게도 집문서를 갖기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대신 오늘을 미래처럼 살자고 설득했습니다.

 

10여 번 넘게 전셋집을 옮겨다녀야하는 불편은 있었지만 그것이 흉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단 한번 욕망한 적이 있습니다. 헤이리였습니다. 파주의 북한이 지척인 곳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그 마을에는 문화와 예술을 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이라면 방랑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간절한 염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처는 저의 욕망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습니다. 그것은 가족 모두의 희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마 처의 편지는 희망과 절망을 오가던 그 시절에 도전과 좌절의 중간쯤에서 쓰였던 편지 같습니다.

 

저는 오래된 처의 편지 한통을 통해 오늘 우리가 과거의 결과를 살고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저와 처가 욕망했던 그 오래된 미래는 결코 버젓한 집이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살아있는 소통, 산소통'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온라인사이트 쇼핑락닷컴( www.shoppingrock.com  )에서 e-book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오래된미래, #산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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