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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중간고사 중

두 과목 시험이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가벼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가벼운 것은 가방의 무게일 뿐, 어른이든 아이든 시험 앞에서 잔뜩 웅크려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쉰 살, 이제는 시험에서 벗어날 나이도 되었건만,  이 무슨 고생인가. 지난 학기 성적표가 집에 오던 날,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받겠다는 말을 앞세워 독려하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2학기에는 장학금을 노려 볼까' 라는 부담으로 남은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야 모두 A+을 받아 전액 장학금을 타서 자랑스럽게 아내 손에다 쥐어 주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다 못해 반액 장학금이라도 탄다면 동네방네 다니며 남편 자랑에 어깨가 올라갈 아내인데.

페라칸시스 열매 사이로 보이는 젊은 학우들. 그들의 열정이 내게도 전이되는 것 같다.
▲ 젊은 학우들 페라칸시스 열매 사이로 보이는 젊은 학우들. 그들의 열정이 내게도 전이되는 것 같다.
ⓒ 공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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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 과목 시험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두 시간 가량 시간이 남아서, 다음 시간에 시험 볼 책을 꺼내서 몇 장을 훑어보다가 책을 덮었다. 한 주먹 쥐고서 삼키고 싶을 만큼 투명한 가을 볕을 받으며 교정 곳곳을 걸었다.

빨간 페라칸시스 열매 사이로 젊은 두 친구가 보인다. 다정한 모습을 보면 연인인가 싶을 만큼 꼭 붙어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 그들이 눈치 채지 못 할 만큼 다가갔다. 앞 시간에 치른 시험지로 정답을 확인하는지, 아니면 예상 문제를 서로 나누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매보다 더 붉어 보이는 그들의 열정이 내게도 전이되는 것 같다.

영어 몰입 공부라도 해 봐?

일주일에 네 번 있는 영어. 한 시간, 한 시간을 어찌 넘기는지 신기할 정도로 어려운 과목이다. 단어를 외어도 그 때 뿐,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영어는 문장을 외우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몇 번 소리 내서 읽어 보지만,  우리글을 읽을 때 만큼 혀가 자유롭지 못하다.

수업시간마다 쩔쩔 매는 내 모습을 보며 막내 동생 같은 교수님은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어 주신다. 편하게 와 닿는 교수님의 웃음을 그냥 받기가 미안해서, 학교를 오가는 두 시간, 교육방송을 틀어놓고 영어회화를 듣지만, 아직 내 귀는 열릴 줄을 모른다. 그야말로 영어 몰입 공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른 과목 공부를 제쳐두고 영어만 파고 든다면 2학년 부터는 귀가 열리고 혀가 돌아갈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우리 과의 특성 상 글쓰기 과제가 많고, 집에 오면 밀린 집안 일에다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 공부도 도와 주다 보면 영어책을 붙들고 씨름을 할 여유가 없다.

지난 금요일, 영어 시험을 치렀다. 시험지를 받으니 캄캄해지는 눈. 객관식으로 출제된 문제 가운데서  아는 것만 답을 적고, 나머지는 찍을 수밖에. 잘못된 문장을 찾아서 고쳐 쓰는 문제는, 아직 내가 넘지 못할 벽이다. 이미 수업 시간에 들통 난 실력이지만, 답안지를 받는 교수님 얼굴에는 그래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수업 시간에 안 빠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태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위안을 삼았다.

아빠, 장학금은 양보하세요

얼마 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는 아들이 말했다.

" 아빠, 제가 제대하면 아빠보다 후배가 되겠네요. 아빠는 나이가 있으니까, 장학금 욕심 내지 말고 편하게, 하고 싶은 공부만 하세요."

글을 쓰기 위해 시작한 공부니 글 쓰는 일과 책 읽는 일에 매진을 하고, 장학금은 젊은 친구들한테 양보하라는 이야기다. 아빠는 취직할 것이 아니니, 성적에 너무 매이지 마라는 말을 덧붙인다. 맞는 말이다. 젊은 친구들과 경쟁을 한다고 장학금을 받을까마는, 그래도 혹 욕심이 발동하여 장학금 받으려고 고군분투하며, 정작 글쓰기에는 시간을 내지 못할까봐 염려해 주는 아들이 고맙고 듬직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시험 문제를 검토하는 광경이 정겹다.
▲ 학우들 삼삼오오 모여서 시험 문제를 검토하는 광경이 정겹다.
ⓒ 공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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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같은 학우들을 경쟁의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혹,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만학도라서 예우한다고, 교수님들이 내게 좋은 점수를 준다면 이 또한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이 때문에 비슷한 연배의 교수님들과 식사라도 할라치면, 이런 염려가 있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농담 삼아 미리 말씀을 드리기도 한다.

"저는 낙제만 면하면 되니, 우리 젊은 친구들한테 좋은 점수 주십시오."

 장학금을 받는 일, 성적을 잘 받는 것도 자기 성취니까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갈수록 취직이 어려운 세대다 보니 성적에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친구들을 이해하고,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보다는 문장을 다듬고 가꾸어서, 졸업 하기 전에 좋은 동화 한 편 써서 세상에 내 놓고 싶은 욕심이다.

  내 삶도 중간고사를 치른다면 몇 점이나 될까

아직 시험이 몇 과목 더 남았다. 마음을 비운다. 긴장과 초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비우고 나니, 시험을 기다리는 시간이 괴롭지만은 않다.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들은 실력으로 답안지에 답을 적을 뿐, 성적에 연연할 까닭이 없으니, 이런 여유가 생기는가 보다. 쉰 살, 만학도가 캠퍼스에서 누릴 낭만을 아들을 통해 배운 셈이다.

내 인생에도 중간고사가 있다면,  몇 점이나 될까. 곰곰 생각해 본다.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는 항목들이지만 스스로 문제를 내고 채점을 해 보니 겨우 50점이나 받을까. 부끄러운 점수다. 기부와 봉사에서는 통 자신이 없는 점수. 먹고 살기가 바빴다고 쉽게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훗날,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뒤돌아 보면 이렇게 풍성한 알곡들이 달렸으면 좋겠다.
▲ 평사리 들녘 훗날,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뒤돌아 보면 이렇게 풍성한 알곡들이 달렸으면 좋겠다.
ⓒ 공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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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에 비유하자면, 내 나이는 반환점을 돌아서 한참을 더 달린 셈이다. 훗날,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뒤돌아 보면, 삶의 자국마다 튼실한 알곡이 주렁주렁 달린 풍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젠, 인생의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남은 삶을 더 알차게 살아야 할 터, 삶으로 치르는 시험이라면 커닝도 괜찮겠지.

덧붙이는 글 |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작입니다.



태그:#순천대, #중간고사, #학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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