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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3월 운전 면허 갱신을 위해 찾은 안산시험장 ..
ⓒ 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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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뒤늦게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걱정이 태산이다. 필기시험은 2번째인가 합격을 했는데 실기시험 때문에 잠이 오질 않을 정도라고 했다.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따놓을 것을" 하면서 후회가 막심이라고도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언제나 운전 실기시험을 단 한 번에 합격했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올해로 운전경력이 17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초행길이나 길목이 나쁜 곳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1992년 추석연휴 끝나고 시작된 '운전면허' 시험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오래 전 일이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1992년 추석 때 친정에 갔다. 올케와 이야기하던 중 난 올케에게 "우리 추석 지나고 운전면허 딸래?" "갑자기 웬 운전이에요?" "글쎄 웬지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 마음이 드네. 올케는 어떻게 할래?" "좋아요. 시작해요" 해서 추석연휴가 끝나자마자 운전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등록을 하고 나니 바로 3일 후에 필기시험이 있다고 한다. 머리를 싸매고 3일 동안 필기 시험준비를 했다. 실기만 학원에서 하기로 했기에 필기는 집에서 준비해야 했다. 어쨌든 고시준비 하듯이 해서인가 필기 시험은 첫 번째에 무사히 합격을 했다. 물론 올케도.

주말부부였던 우리 부부는 남편이 평균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번 씩 집에 오곤 했다. 그렇게 남편이 와도 남편의 자동차 핸들조차 만져보지도 않았고, 시동도 대신 걸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무관심했던 내가 운전을 배운다니깐 남편도 "갑자기 웬 운전면허?"하며 무척 놀라는 듯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운전면허를 꼭 취득하고 싶었기에 한치에 머뭇거림 없이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시흥시의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서 아이들 통학시키는 문제로 나름대로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당신은 필기는 몰라도 겁이 많아서 실기 따기가 어려울 텐데"라며 걱정을 했었다. 남편이 그렇게 말했지만 나에게 닥치기 전까지는  실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시작된 실기시험

그 당시에는 실기시험을 보려면 운이 좋으면 20일 만에, 그렇지 않으면 평균 한 달에서 50일까지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때 우리 집 주소가 아이들 학교 때문에 서울로 되어있어서 서울 강서시험장으로 보러 다녀야 했다.

실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학원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첫날은 재미있다는 생각에 잘 넘어갔고 그때까지만 해도 운전이 무섭다거나 내가 겁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강사가 물었다. "오늘(첫날) 운전대 처음 잡아본 소감이 어땠어요?" "글쎄 첫날이라 그런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재미있어요?" 하더니 실기연습 이틀째 되는 날부터는 강사의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제야 난 운전 핸들을 잡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마도 30일 정도 연습하고 첫 실기시험을 보러간 것 같다. 실기시험이 시작도 되기 전부터  어쩜 그렇게도  떨리던지.

그때는 오토매틱 차종으로 시험 보는 것은 없었다. 모두 스틱이었고 실기시험 차종이 대우에서 생산되었던 르망이었다. 스틱으로 시험을 봐야하는데 르망은 클러치가 깊어 짧은 다리인 나는 입고 있던 잠바를 뒤에 받치고(다음 시험부터는 등받이 쿠션을 꼭 가지고 다녔다)도 운전석을 있는대로 앞으로 끌어당겨야 겨우 클러치를 밟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의자를 당기고 출발신호인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의자와 깊은 클러치, 짧은 다리에 신경쓰다보니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잘 가나 싶었지만 출발하고 바로 시동이 꺼져 불합격이 되고 말았다. '그래  이번에는 처음이니깐'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올케도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시험. 또 불합격. 올케는 합격했다. 내가  올케보다 8살이나 더 많으니깐  한두 번 더 떨어져도 괜찮아, 하며 합리화시켰다. 운전실습은 계속되었지만 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시흥시에서 서울강서시험장으로 시험 보러 다니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운전학원에 한번 등록하고 계속 배울 수는 없는 일. 재등록을 하기 전에 꼭 합격을 해야만 했다. 

베개 놓고 연습하고, 시험보는 도중에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집에서 베개 세 개를 나란히 놓고 하나는 클러치, 액설러레이터, 브레이크라 생각하고  출발, 정지. 출발, 정지를 반복 반복을 거듭 하면서 몇 시간씩 연습하기도 했다. 세 번째 시험, 코스시험이 시작되었다. 그땐 코스시험과 주행시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날 역시 심장박동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 올 정도로 쿵쾅쿵쾅 울려댔다. '도대체 난 왜 이렇게 떠는 거야?' 그런 내가 너무나도 안쓰럽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S코스 중간쯤에서 잠시 정지하고 성호(천주교 신자이므로)를 긋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심장이 떨려서 핸들을 잡지 못하겠어요.  제발이지 그만 좀 떨게 도와주세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했다. 그래서인가? 어쨌든 그날  3가지 코스인가? 에는 무사히 합격을 했다. 코스시험에 합격을 해야 주행시험을 볼 기회가 생긴다.

그날, 난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았다. '주행은 떨어져도 좋다'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행이란 만만치 않은 시험이  남아있기에  운전학원에는 계속 나가 연습을 해야 했다.

같이 배우던 학원동기생들도 하나 둘씩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오는 동기생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곤 네 번째 시험(주행은 첫 번째)은 오후에 있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과 함께 갔다. 내 순서가 돌아오고 신호에 따라 출발을 했다.

아들이 보고 있어서인가 더욱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정지선을 무사히  통과했다. 다음에도 다음에도, 그러다 언덕 앞에서 너무 긴장한 탓인지 핸들을 잘 못 꺾어 경계선을 들이받아 하마터면 잔디밭으로 튕길 뻔했다. 조금만 더 세게 핸들을 꺾었더라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아들이 "엄마 핸들을 그쪽으로 꺾으면 어떻게 해?" 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러게, 엄마가 그렇단다." 그 뒤로도 주행시험에서 두 번인가 더 시험을 보고 난 후 합격했다. 합격하던 날은 딸아이와 함께 갔을 때였다.

주행 합격이란 소리에 펄쩍펄쩍 뛰었다. 하니 딸아이는 "엄마 너무 좋아 하지 마. 떨어진 사람들도 많은데" 한다. 난 "엄마는 여러 번 떨어졌던 사람이라 좋아해도 괜찮아" 하니 딸아이도 더 이상말리지 않았다.

5전 6승, 7개월 만에 손에 쥐게 된 '운전면허증'

절차를 밟고 운전면허증이 나왔다. 꿈만 같았다. 내 사진이 꽉 박혀있는 면허증을 꼭~~ 가슴에 안았다.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드디어 내가 운전면허증을 딴 것이다. 그것이 1993년 3월이었다. 

그해  5월에 지금까지 타고 다니는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엑셀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데 5전6기인가? 장장 7개월 정도가 걸렸다. 그러는 사이 몸무게는 무려 5Kg이나 빠졌고 입술은 강낭콩만 한 크기로 부르텄다 가라앉기를 수차례 거듭했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도 그렇게까지 몸의 변화가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겐 가장 어려웠던 운전실기 시험이었다. 오죽하면 '운전고시'라고 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공모



태그:#운전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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