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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는 것으로 따지면 불구경과 싸움구경 따라갈 것이 없지만 상여굿을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헌데 요즘 상여굿을 제대로 구경하기란 값비싼 오페라공연 보기보다 어렵다. 바다건너에서는 돈을 싸들고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도락리 갯바람이 솔숲을 스치며 당집 돌담을 두드린다.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땀이 바람에 놀라 숨어버린다. 울긋불긋 치장을 한 집들이 모자이크 같다. 눈길이 범바위를 스쳐 읍리마을 느티나무와 돌탑에 멈춘다. 저곳에서 봄의 왈츠를 찍었다지. 청산도는 어느 곳이나 앵글을 맞춰도 그림이다.

 

하지만 내가 일 년이면 몇 차례씩 청산을 오가는 진짜 이유는 청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특별히 인연을 맺고 있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청산사람들은 나를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밭에서 만나는 할머니, 논에서 만나는 아저씨, 갯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속세에 찌든 나를 편하고 온화하게 만든다.

 

읍리와 당리 사이 도로를 걸어가는 길. 한 달 전 모내기를 한 다랭이 논에서는 짙푸른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멀리 드라마에 나왔던 '준서네 집'이 언덕위에 아른거린다. 그 황톳길위에 육자배기 가락이 스치듯 지나며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 달 만에 다시 청산을 찾았다. 오로지 초분 때문이다. 그때도 초분소식에 불쑥 섬을 찾았다. 이번에는 몇 년 전 했던 초본을 헐어 땅에 묻는다. 그때 초분을 썼던 아들은 고인이 되어 어머니 옆에 초분으로 누웠다. 그 아들들이 할머니를 모시는 날이다. 어머니가 땅에 묻히지 않았으니 아들인들 편히 땅에 누울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소원이었던 일이다.

 

한 달 전 이곳에 초분을 한 망자는 김성도(76)씨다. 청산 도청리에서 어장일도 하고 장사도 하여 자식들을 가르치고 돈도 모았다. 청산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몇 년 전 완도읍으로 이사해 숙박업을 시작했다. 뭍에 머물렀지만 마음은 늘 바다로 향했다. 섬을 떠나서 일까. 건강도 나빠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청산도에 옛 풍습을 살려 '초분'으로 모셨다. 생송장을 선산에 바로 들이지  않는 탓도 있지만 평소에 초분을 원했다. 초분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용마람, 마람, 새끼 뿐이다. 매장하는 것보다 간단하다. 밑에 돌로 단을 쌓는다. 이를 덕대라 한다. 그 위에 멍석이나 짚을 갈고 관을 올린다. 소나무 가지를 얹고 왼손으로 꼰 새끼로 묶는다. 그리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이엉을 두른다. 용마름을 얹고 새끼로 격자모양으로 갈무리를 한 다음 자손들이 솔가지를 꺾어 꽂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김씨는 그렇게 돌아가고 싶던 청산에 초분이 되었다.

 

한 꺼풀 한 꺼풀 여인의 치마를 벗기듯 마람을 걷어내자 여인네 속살처럼 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분은 매년 새옷을 입는다. 새로 이엉을 얹고 소나무 가지를 꽂아 놓는다. 자식들이 다녀갔다는 징표다. 옛날에는 초분을 한 후 세월이 흘러 육탈이 되면 좋은 날을 받아 유골을 땅에 묻었다. 어느 섬에서는 육탈이 되지 않으면 시루에 쪄서 육탈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씨의 어머니는 몇 년 되지 않아 관을 그대로 매장했다. 벌써 장지에는 포클레인이 자리를 잡았다.

 

망자의 며느리 눈길은 한 달 전 초분을 한 남편에게 머문다. 모두 어머니 이장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조용히 빠져 나와 남편 초분을 어루만진다. 아직 이별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마람을 걷고 일어나 '여보 나 여깄어'라고 소리칠 것만 같다. 아내의 애절한 소리가 햇살을 타고 시어머니 장지로 옮겨온다. 애틋한 곡소리다. 작은 솔가지를 꺾어 초분 용머리 위에 꽂는다.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중간에 초분이 있다. 초분을 하는 이유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모두 산자를 위한 죽음의 굿이다. 죽어서라도 자식들을 돌보고자 하는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멀리 바닷바람이 연기를 밀어 올린다. 여름 더위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다. 묏자리를 잡아 파놓은 흙이 붉다. 두 아들과 친지들이 관을 옮긴다. 황토밭 구덩이에 관을 묻는다. 그 곳에는 더 이상 슬픔도 없다. 그저 생과 사가 한 자리에 모여 바람처럼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청산도에는 몇 개의 초분이 더 있다. 특히 당집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는 초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모두들 봄의 왈츠에서 준서가 살았던 집을 둘러본 후 황토길을 걸어보고 훌쩍 떠난다. 당집에서 고개를 내밀고 다랭이 밭을 내려다보면 살포시 앉은 초분이 보인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마치 논밭 가장자리에 있는 망옷자리같다.

 

망옷은 퇴비의 전라도말이다. 풀이 썩어 퇴비가 되듯 육신도 썩어 퇴비가 되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닌가. 인간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다. 차지할 땅이라 해야 덕대가 놓일 한 평 남짓 될까. 짚으로 엮은 마람 몇 개 덮고 눕는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한 자락이다. 청산도의 초분이 주는 의미가 남다른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섬이야기'에 소개했던 '섬' 중 일부를 모아 '바다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는 섬여행'(Y브릭로드)을 출간했습니다. 많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태그:#청산도, #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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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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