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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성서 이래로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으로 유명하다. 작품은 미국 남북전쟁과 재건기를 주요 무대로 하여, 강인한 인물 스칼렛이 삶을 헤쳐나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파급력을 설명할 때, 그 판매 부수를 성경에 비견하는 것은 이 소설이 그만큼 보편적인 미국인의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대다수의 미국인, 그 중에서도 특히 백인들의 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진다.

 

한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세계적으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데는 대중적인 요소들이 한몫했다. 문학작품의 대중성은 언제나 유사한 근원에서 발현된다. 가슴 두근거리는 로맨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 레트 버틀러가 버티고 서 있다. 원작에서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의 심술궂고 매력적인 연인이자, 뛰어난 통찰력으로 정세를 꿰뚫어보는 한 시대 속 인물로서의 역할을 말끔히 소화해냈다. 그리고 그는 남부인들이 느끼는 패전의 상실감과 동일한만큼의 아픔을 스칼렛에게 안겨주고 바람과 함께 훌쩍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2007년, 현대 미국인 작가에 의해 그가 돌아왔다. 게다가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다. 떠날 때의 그는 그저 바람과 함께였지만, 돌아온 그는 교조적 다문화주의와 직설적 열정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다.

 

원작만한 속편? 원작을 뒤집으려는 속편?

 

학계에 탈식민주의 이론의 바람이 불면서 나타난 문학작품의 되받아쓰기 운동은, 원작의 인기를 업고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원작-속편 구도의 관계틀을 아예 벗어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되받아쓰기는 원작이 일구어낸 업적과 성향을 계승하기보다, 거기에서 모순점을 찾아내고 이를 드러내기 위해 원작의 시선을 역전시켜 보편적이라고 믿어왔던 기존 인식에 잠재되어 있던 소외자의 억압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증명할 길은 없지만, <스파이더맨> <배트맨>류의 히어로물은 최근의 시리즈에서 의도적으로 선악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히어로와 악당의 위치를 재규정해보려는 시도를 보여 평론계에서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

 

그런데,<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의 입장은 미묘하다. 이 작품 이전의 속편인 <스칼렛>의 작가 알렉산드라 리플리가 대중적이고 멜로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속편이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집중시킨 반면, 도널드 매케이그는 현대 비평에서 원작의 결점으로 지적되는 부분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원작의 결점이란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흑인노예나 빈농에 대한 인종, 계급차별적 묘사나 발언들이다. 이에 대해 시대적 한계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다수이나, 작가는 레트 버틀러를 완벽한 평등주의자로 설정함으로써 이 결점을 수정하고자 하는 욕심을 보인다.

 

일단 이 책은 스칼렛 오하라의 삶의 궤적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원작의 기본 틀을 일부러 뒤흔들어 놓는 되받아쓰기의 기본조건을 갖춘 상태다. 제 1주인공은 레트 버틀러이며, 스칼렛은 그의 연인이라는 조연의 위치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두 인물의 위치는 확실히 역전되었으며 독자의 인식도 보다 말랑해질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두 인물 간에는 <스파이더맨>시리즈와 같은 알기 쉬운 선악의 경계 따위는 없었다. 도리어 이 귀족적인 두 인물의 외부-흑인노예, 농장감독, 빈농계층 등-에서 억압에 몸부림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과연 탈식민주의적 되받아쓰기를 확보하고 있는가?

 

타깃 설정이 잘못되었다

 

대답은 '아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로 전이되면서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젠더 담론을 이끌어낼 소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작품 속 여성인물들이 원작에 반영된 당대 미국 사회의 숙녀라면 결코 하지 못할 직설적이고 현대적인 욕설을 빈번히 입에 올려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 말고는. 그렇다면 주인공이 바뀌면서 달라진 것-시선이 역전되면서 생겨나는 되받아쓰기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는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백인귀족유산계층이라는 동일한 영역에 속해 있다. 앞서 말했듯, 원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현대에 와서 비판받는 이유는 작가가 백인유산계층을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하고 내용 전개에 있어 흑인노예나 소규모자영농을 타자로서 서사에 있어 철저히 배제시켰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속편의 작가 도널드 매케이그가 차라리 스칼렛의 흑인유모나 타라의 농장감독을 주인공의 위치로 승격시켰다면 이야기는 대담한 발상으로 인해 통쾌함과 함께 그가 의도한 메시지를 한층 더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젠더는 일단 배제하고 물질계급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스칼렛과 레트의 위치 바꾸기는 물리적으로 1104호 주민이 1105호로 이사한 거나 마찬가지다. 정작 열악한 환경의 고충을 알아주길 바라는 반지하 셋방은 소설의 주인공을 옮기는 장소에서 애초에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선량한, 너무도 선량한 역사소설가

 

앞서 말했듯 작가는 농장감독을 주인공으로 격상시킬만큼 급진적인 사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원작에서 소외되었던 농장감독의 삶에 극적 비중을 부여하고 그것을 공정한 시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한다. 또한, 작품 곳곳에는 원작에서 밝게만 그려졌던 남부농장 노예들의 노동과 삶의 현장이 리얼리즘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는 분명 흑백차별의 부정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레트 버틀러를 당대 사회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을만큼 진보적인 평등주의자로 그려내었다.

 

작품에서 레트는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채 흑인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 결과 그는 당대 미국 사회의 현실에 녹아들지 못하는 초역사주의적 영웅으로 형상화되었다고 본다. 사실, 원작에서의 레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을 따름이었다. 작가는 분명 선량한 의도로 레트에게 시대배경을 초월할만큼 공정한 시각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진실 혹은 소설적 리얼리티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당대 미국 남부 귀족 가문에서 자라난 도련님이 흑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노동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작가가 그려내는 레트의 유년기는 마치 성인의 탄생기, 혹은 성공시대 초반부를 보는 듯하다. 레트를 이상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의도는 분명 선량했으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박해와 차별의 시대를 단지 개인의 성품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시대로 희석시킬 위험의 소지를 내포하게 된다. 현대적 구미에 알맞게 수정되어 재현된 역사를 보고 톰 아저씨가 오두막에서 분개하며 뛰쳐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전복성은 부족하지만, 소설적 재미는 충분

 

그럼에도 소설의 가치가 전적으로 개연성이나 현실반영도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소설의 또 다른 가치는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험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에서 온다. 그런 면에서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분명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재미있다. 스칼렛의 일대기라 할 수 있는 원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레트 버틀러 중심으로 재구성해낸 전개 자체도 흥미를 모으지만, 주인공이 남성으로 바뀌면서 보다 스케일이 커진 당대 미국사회상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집, 파티장소, 때로는 고향으로 향하는 전장길을 밟는 것이 전부였던 스칼렛과 달리, 해외까지 발이 넓으며 더럽고 거친 장소를 전전하며 돈을 벌고 전쟁에 참가하기도 한 레트의 행적은 작품에 스펙터클한 묘사를 더하게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의식 있는 작가의 선의에 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복적 쾌감을 얻는 데는 실패했으며, 인물의 이상화가 지나쳐 리얼리티를 놓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과 달리 인종과 계급에 대한 작가 나름의 공정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또, 읽는 재미라는 소설의 주요 가치를 분명한 수확으로 거두었으니, 앞서 말한 단점과 더하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맥카이그 지음, 박아람 옮김, 레드박스(2008)


태그:#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편, #탈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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