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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부터 1945년까지 '해군특별보도반원'으로 뛰었다고 하는 마츠기 후지오 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帝國海軍寫眞集'으로 묶은 사진책 가운데 두 가지를 서울 노량진 동작구청 건너편에 자리한 헌책방 <책방 진호>에서 몇 해 앞서 뜻밖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날은 이 사진책 두 가지 말고도 골라 놓은 책이 퍽 많아 주머니가 다 털리겠구나 싶어 후덜거렸습니다. 두어 시간 책을 구경하는 사이 골라 놓은 책은 가방에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고른 책이 많았기에 <책방 진호> 사장님이 하나하나 살피며 책값을 셈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고, 이 동안 다시 한 번 헌책방 책시렁을 죽 둘러보는데 바로 이 사진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끈으로 묶어 놓아 짝이 흩어지지 않게 한 두 권.

 

그러나 1·2·3권 세 권이 모두 있지 않고 2권은 빈 두 권. 꽤 큰 판으로 나온 이 사진책은 겉을 천으로 대고 있기에 틀림없이 종이 겉싸개가 따로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욱이 사이에 2권이 비어 있으니 이 녀석을 아직 들춰보지 않았으나 '볼까 말까' 하는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헌책방을 다니면서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나중에 겉싸개까지 있는 녀석으로 다시 만나면 그때 살까 하고 생각했으며, 사이에 빈 2권까지 채워진 '완전판'이 나올 때 사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책값 셈을 마칩니다. 부르시는 대로 지갑을 열어 책값을 치르는데 삼만 원이 남습니다. 다 털어내야 할 줄 알았는데 용케 남습니다. 모자라서 외상을 달거나 몇 가지 책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은 걱정으로 그치고 마음이 느긋해집니다. 

 

조금 앞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제국해군사진집(帝國海軍寫眞集)>에 눈이 쏠립니다. "이 책 끌러 봐도 되나요?" "그럼, 얼마든지." 곱게 묶인 끈을 끌러 책을 펼칩니다. 종이 겉싸개가 없어 아쉽지만, 책은 아주 깨끗하게 간수되었습니다. 1978년에 나온 사진책임에도 서른 해쯤 묵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사진책 만드는 솜씨는 고개숙여 알아주어야 한다고 새삼 생각합니다. 사진을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여느 일본책과 달리 오른읽기로 되어 있습니다. 높이는 손뼘으로 하나 반 길이이고 너비는 손뼘 하나입니다. 이 큰 판으로 가득 채워지는 '책보다 훨씬 오래된 사진'을 보는 내내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는 느낌을 받습니다. 머리가 띵합니다.

 

책을 덮고 숨을 돌린 다음 다시 펼칩니다. 손이 떨리고 눈썹이 떨립니다. 사진을 담은 마츠기 후지오 님 사진책 <해군병학교(海軍兵學敎)>(國書刊行會,1978)는 마치, 레니 리펜슈탈이 1936년에 찍은 '베를린 올림픽' 영화와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오드리 설킬드 님이 쓴 <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마티,2006)이라는 책에 실린 '레니 리펜슈탈이 찍은 히틀러 나치당 전당대회 사진'을 자꾸자꾸 떠올리게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어 보지 못한 저이며,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때에는 어린 꼬맹이였던 터라 독재가 무엇인 줄 하나도 몰랐던 저입니다만, 등골이 쭈뼛하고 소름이 돋습니다. 한편, 사진에 담긴 앳된 해군병학교 사관생도들 얼굴이 해맑고 거룩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엇갈린 두 마음이 '帝國海軍寫眞集' 두 권을 넘기는 내내 무섭게 휘젓습니다.

 

사진을 꼼꼼하게 살핀 다음 책을 덮고 나서 한참 있다가 <책방 진호> 사장님한테 이 두 권도 셈하겠다고 말씀을 여쭙니다. "음, 사진 대단하지? 일본은 무서운 애들이라고. 이러니 자기들도 미국한테 침략을 당했으면서도 금세 일어나서 이웃나라를 침략하겠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아, <책방 진호> 사장님은 벌써 이 사진을 다 보고 나서 고이 묶어 책시렁 한켠에 꽂아 두셨군요. 어쩌면 다른 책들도 웬만큼은 찬찬히 헤아리고 나서야 손질하여 책시렁마다 가지런히 꽂아 두시는지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예 모르지만, 헌책방 <책방 진호>에 비닐로 곱게 싸인 채 꽂힌 책들은 사장님이 댁에서 손수 하나하나 매만지면서 싸 놓은 녀석입니다.

 

세상은 헌책이라고 '낡고 꾀죄죄하다'고만 여기지만, <책방 진호> 사장님은, 그 낡고 꾀죄죄하다는 헌책마다 담긴 깊은 그릇을 놓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깊은 그릇을 우리들이 찬찬히 깨닫고 받아먹기를 바라면서 당신 손이 투박해지고 거칠어지도록 땀을 바칩니다. 당신 스스로 책을 더 알려고 일본말을 익히고 일본책을 깊이있게 다루는 동안, 일본은 손쉽게 '나쁜 나라'라고만 말할 수 없음을 느끼셨을 테니까요. 일본이라는 나라 사람들이 펼치는 문화와 예술이 어떤 땀과 품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뼛속 깊이 읽어내셨을 테니까요.

 

사진책 <海軍兵學敎>는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미국으로 쳐들어가는 그 주제넘음처럼 여겨지는 당돌함이 어떻게 빚어졌는지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일본 시민을 밟고 휘어잡으며 갖은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군대가 어떻게 '착한 아이'를 '살인 기계'로 돌려놓았는지를 사진으로 일러 줍니다. 1권 끝에 실린 서른 쪽에 걸친 '해군병학교출신자일람'은 사진 다루는 매무새와 사진기 만지는 솜씨는 뛰어나더라도 사람다운 넋을 잃어버리면 우리 스스로 얼마나 엇나가고 빗나가는 삶이 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에드워드 김 님이 박정희-전두환 두 사람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펴낸 사진책 <민주복지의 길>과 <경상북도>가 눈물과 함께 떠오릅니다.

 

- 서울 노량진 〈책방 진호〉 : 02) 815-9363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에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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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진책, #헌책방, #사진, #군대, #진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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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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