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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날 부모님의 고향이자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가 있는 시골 선산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나는 부모님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묘가 있는 김제에 들러 반가운 마음에 죄송한 마음을 더해 성묘를 했다. 그리고 모처럼 우연한 기회에 식구들과 함께 찾은 시골에서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기로 하고, 근처에 있는 벽골제를 찾았다. 

벽골제 앞에 선 아내와 딸
▲ '벼 고을의 둑' 벽골제 벽골제 앞에 선 아내와 딸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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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시절 쯤으로 기억된다. 국사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시험에 나온다며 빨간 줄 좌~악 긋고 무조건 외우라고 말씀하신 것 중 하나가 김제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밀양 수산제였다. 그 때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설명으로는 말뜻이 분명하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엉뚱하게도 '무슨 제사의식인가?'하고 헛갈리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나마 묻고 확인하여 알게 된 것은 삼한 시대의 저수지로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가두었던 3대 저수지라는 것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때는 저수지 이름에 무슨 '~~제, ~~지' 같은 명칭이 왜 따라붙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선생님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도통 설명 들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사실은 창피하게도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 ~~지' 로 쓰이는 한자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를 테면, '벽골제'의 한자어를 각 한 글자씩 풀어볼 때, 푸르다 할 때 벽(碧),  뼈 골(骨), 둑이나 제방을 말하는 제(堤)라는 뜻인데, 이른바 가방 끈 짧은 사람이나 나처럼 공부에 별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 읽고, 들어서 그 의미를 선뜻 해석하기에는 솔직히 쉽지 않다. 어감도 무슨 '산신제', '당산제' 같이 마치 어떤 제사의식의 이름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유식하고 고매한 지체 높은 선생님들은 그것도 모르냐며 야단하시겠지만 특별한 관심 없이 건성으로 들었다간 무식을 들키기 십상일 정도다.

사실 벽골제라는 명칭을 '푸른 뼈로 쌓은 제방이나 둑'이라고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벽골제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 푸른 뼈(특히 말의 뼈가 비교적 푸르다고 함)를 갈아 흙과 함께 섞어 둑을 쌓아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하는 억지설화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둑 위에 올라서 바라본 모습
▲ 벽골제 둑 위에 올라서 바라본 모습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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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개맹게 외배미들'을 지나니 벽골제

김제시에서 정읍, 신태인 방면으로 29번 국도를 따라서 '징게맹게 외배미들'을 가로 질러 가다가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니 벽골제가 나타났다. 벽골제란 이름보다 더욱 생소하게 들리는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란 말은 이곳 지방의 사투리라고 한다. 즉, '징게맹게'는 '김제와 만경'을 뜻하고, '외배미들'은 '오직 한 배미로 시원스레 트였다'라는 뜻으로 '김제와 만경의 너른 들'을 의미하는 이 쪽 지역의 토속적인 우리 사투리라고 한다.

나는 매우 친근하면서도 정감 있게 들리는 '징게맹게'란 말을 입 속에 넣고 야금야금 감칠맛 나게 삼키고 뱉어가며 벽골제 안으로 들어섰다. 벽골제에 도착하여 널찍한 마당으로 발을 넣으니 때마침 끼니를 때워야 하는 점심 때쯤이라선지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백색의 따스한 햇볕이 넉넉히 내리 쬐는 조용하고 한적한 공원의 느낌이었다. 입구에는 훤칠해 보이는 '단야루'가 단정하게 서서 방문객들을 맞아주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이 있었다. 나는 너른 마당에서 한 바퀴를 돌며 천천히 시선을 주위로 분산시켜 마치 레이더처럼 벽골제 주변을 감지하고 탐색했다.

벽골제 사적지 안에 있는 누각(옛 김제 태수의 딸의 이름이 '단야'란다.)
▲ 단야루 벽골제 사적지 안에 있는 누각(옛 김제 태수의 딸의 이름이 '단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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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가 있다.
 (#지척에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 아리랑 문학비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 문학비가 있다. (#지척에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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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돈된 테마연못과 휴식하기 좋은 팔각정, 우도 농악관, 벽천 미술관,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 문학비 등이 적당히 배치된 주변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편안하고 좋았다. 그 중에서도 테마연못 중간 중간에 물을 퍼내고, 옮길 수 있도록 실물과 같이 만들어 놓은 옛 기구와 연장들은 생소했지만, 재미있고 신기했다.

딸내미들은 마치 나룻배의 노처럼 비슷하게 생긴 용두래(물이 많고 무넘이가 높지 않은 곳의 물을 대량으로 퍼 올리는 연장)가 달려 있는 곳에서 뭣도 모르는 폼으로 연못의 물을 퍼 올리는 시늉을 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 틈에 나도 덩달아 할 줄도 모르면서 아빠랍시고 '이리 내 보라'며 시범을 보이려다 망신만 당했다.

넓은 평야지대나 염전에서는 근래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하는 물레방아처럼 생긴 '무자위' 위로도 올라가 다람쥐처럼 발을 굴러 물을 밀어 올려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몹시 재미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 우리식구 외에 누구 한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그 곳에서 우리들만의 유쾌한 농경문화 체험을 키득거리며 만끽할 수 있었다니 그 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넘이 높지 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리던 연장이 용두레다.
▲ 용두레를 다뤄보는 딸내미 무넘이 높지 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리던 연장이 용두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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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처럼 그네를 타고 있는 아내와 딸
▲ 그네 춘향이처럼 그네를 타고 있는 아내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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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초록의 풀빛으로 덮인 벽골제 저수지의 둑 아래에서 커다란 그네에 춘향이처럼 앉아 쉬고 있었다. 평소 바쁘고 피곤한 일상으로 심신이 지쳤을 법하고, 겁이라면 국가대표급인 그녀가 그네에 앉아 가만히 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죄 지은 것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참에 몽룡의 졸병 방자처럼 달려가 '그네라도 실컷 밀어주며 돈 안 드는 서비스로 만회나 해볼까'하는 얄팍하고 명민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내의 뒤로 가서 그네를 몇 번 힘차게 밀어주었더니 그만 난리가 나고 말았다.

"여보, 여보~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엄마야~ 꺅!"

현재 벽골제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수문 중 하나인 장생거
▲ 장생거 현재 벽골제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수문 중 하나인 장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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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 위에서 내려다 본 수문 장생거
▲ 장생거 둑 위에서 내려다 본 수문 장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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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의 현존하는 수문 장생거

나는 벽골제에 현존하는 두 개의 수문(水門) 중 그 하나인 제2수문 장생거(長生渠) 앞으로 갔다. 그야말로 물길을 지키는 잘 생긴 수문장처럼 듬직한 모습이었다. 전체 둑길이 약 3Km에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등 총 5개의 수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장생거와 경장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오천년 농경문화의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 농경의 본거지라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 징게맹게의 저수지에서 귀한 물을 지키고 보내는 역할을 했던 장생거는 초라했지만 당당했다. 수문의 가로 폭은 약 4m 를 조금 넘었고, 수문 돌기둥의 높이는 약 5m 정도로 양쪽에 서 있으며 기둥의 안쪽에 너비 약 20cm, 깊이 10cm 정도의 홈을 파서 나무판을 가로질러 안팎에 고리와 쇠줄을 달아 위아래로 들었다 놓았다 하며 방수량을 조절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였다. 게다가 물이 흘러나가는 수문 바깥으로는 네모나고 넓적한 돌을 바닥에 깔아 쏟아져 나오는 물의 압력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설계된 모습이었다.

벽골제 가상자리 바닥이 봄 가뭄으로 갈라진 모습
▲ 물이 마른 벽골제 벽골제 가상자리 바닥이 봄 가뭄으로 갈라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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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위에 선 아이들
▲ 둑 위에 선 쌍둥이 딸 벽골제 위에 선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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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딸아이들과 함께 벽골제의 둑으로 올라갔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둑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득 고여 넘실대고 있을 것 같았던 저수지 안의 물은 거의 안 보이고 물가의 수초와 잡초들만이 초원처럼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하물며 물가의 바닥이 말라 쫙쫙 갈라지기까지 한 모습이니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봄 가뭄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이곳에서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둑 위에 서서 한 낮의 미지근한 바람을 허탈하게 맞았다. 벽골제 저수지는 둑에 오르기 전에 상상했던 규모보다는 매우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둑을 따라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모양새는 커다란 호수나 연못 같은 상상했던 모양은 아니었고, 그저 웬만한 관계용 수로 정도로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저수지 아래 바닥이 있는 곳까지 직접 내려가서 주변을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무성한 풀이 있는 곳을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직은 약간 습기를 머금은 질척한 진흙 밭이었고, 오목한 가운데는 얕은 물이 조금 고여 있어 몇 마리의 물오리만이 헤엄치고 있었다. 

다시 둑 위로 올라오며 생각했다.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저수지라는 벽골제의 바닥에 발을 딛고 선 느낌에 대해 생각했다. '수 백 년 전, 아니 천년이 넘는 오래 전부터 이 땅 김제만경 평야의 백성들을 먹여 살려온 농경의 귀한 물 창고이자 생명수를 품어온 벽골제가 이토록 메마르고 괴로운 정도로 초라해질 줄이야...' 나는 잠시 둑 위에 서서 멀리 지평선과 수평선이 하나로 만나는 들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미지근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회피하지 않은 채 장생거 수문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벽골제를 수호하기 위한 청룡과 백룡의 싸움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며 매년 쌍룡제가 열린다고 한다.
▲ 벽골제의 쌍룡 벽골제를 수호하기 위한 청룡과 백룡의 싸움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며 매년 쌍룡제가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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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에 얽힌 쌍룡의 전설

나는 푸른 잔디가 깔린 둑의 언덕을 넘어 쉬엄쉬엄 내려오다 저만치 한 100여m쯤 떨어진 곳에 거대하게 맞서 싸우는 듯 서 있는 두 마리의 용상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철골에 대나무로 엮은 쌍룡이었는데, 두 마리의 쌍룡이 맞서 다투는 형상으로 이곳에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쌍룡에 얽힌 전설이 있었고, 그 이야기는 이랬다.

'벽골제 부근에 있는 두 개의 용추(용의 웅덩이)에는 각각 나쁜 청룡과 착한 백룡이 살았다고 한다. 백룡은 성질이 착했지만, 청룡은 심술궂어서 때때로 성을 내며 둑을 무너뜨리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온통 풍장을 치고 춤을 추며 벽골제 보수공사를 하는데, 천둥소리와 함께 청룡이 나타나 둑을 무너뜨리며 횡포를 부리니 착한 백룡이 나와서 청룡을 말리며 싸우다가 청룡에게 그만 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가 나타나 청룡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벽골제 물에 뛰어들자 청룡은 감동하여 난동을 그치고 백룡과 함께 벽골제를 지켰다.'

그러니까 쌍룡놀이는 농경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물을 대주던 벽골제와 그 수호신을 숭상하고, 벽골제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축원의 놀이로 이 지역 농민들에게 소중한 연중행사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민속놀이 그것이었다.

벽골제 안의 풀밭과 수로
▲ 벽골제 벽골제 안의 풀밭과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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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쌍룡의 전설을 흥미롭게 머릿속에 떠올리며 아내와 딸내미들을 데리고서 벽골제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오늘 이 곳에 들러 걸었던 걸음과 발밑에 밟았던 흙과 풀에 대해 생각했다. 인류와 지구의 영원한 생존과 보존에 대해서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영원토록 맑고 푸르게 흘러야할 물에 대해서도,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존재가 어우러져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공존과 공생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
  
벽골, 그러니까 백제 때 벼가 많이 생산되던 너른 평야 김제의 지명이 '볏골'이란다. 즉 풀이하자면 '벼 고을'이 볏골이 되었고, 한자로 옮겨지며 벽골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벽골제를 풀이해서 말하자면 곧 '벼 고을의 둑'인 셈이다.

나는 벼 고을의 둑인 이 곳 벽골제에서 아쉽게도 풍요롭게 찰랑대는 가득 찬 저수지의 맑은 물을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보유했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의 증거와 아직은 모조리 파괴되고 망가지지 않은 징게맹게의 외배미들, 그 밖에 전통과 민속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쓰는 노력을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월 1일 답사여행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서해안 고속도로 - 서김제 IC - 신태인 정읍 방면 29번 국도 - 약 6km 가면 벽골제가 있음.
입장료는 없고, 주차장 넓으며, 근처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 문학관도 있습니다.



태그:#김제 벽골제, #징게맹게, #장생거, #쌍룡놀이, #용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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