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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판 염전으로 개조한 후 첫 소금(천일염)을 걷는 박성춘씨. '토판'은 20여 년 전 그의 아버지가 소금을 생산했던 방식이다.
 토판 염전으로 개조한 후 첫 소금(천일염)을 걷는 박성춘씨. '토판'은 20여 년 전 그의 아버지가 소금을 생산했던 방식이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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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 염전일이다. 힘이 드는 것은 둘째이고 소금 만드는 일은 종잡을 수조차 없다. 소금밭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염전 크기는 물론이고 증발지에 가두는 물의 양도 천차만별이다. 바람과 햇볕, 경험에 따라 소금을 만드는 방식은 각인각색이다. 이러니 어떻게 도깨비가 흉내낼 수 있겠는가.

박성춘(47·전남 신안군 신의면)씨는 '소금에 미친 남자'다. 그가 염전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지어준 별명이다. 박씨가 본격적으로 염전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30년, 40년 소금을 냈던 사람들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이력이다.

하지만 소금 품질로는 으뜸이라고 자부한다. 세계적인 명품소금을 만든다는 프랑스 게랑드 염전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신안군이 인정하는 장인이다. 전라남도 도지사가 주는 상도 받았다. 모두 소금 때문이다.

남들은 벌써 여러 차례 소금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겨울 시작한 염전보수 작업이 이제야 끝이 났다. 일 년도 안 된 장판을 모조리 걷어냈다. 주변에서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두 번 듣는 소리가 아니다. 1정 6반을 기계화한다고 2천만 원을 투자해 레일 시설을 할 때도 그랬다. 제법 규모가 큰 염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작은 염전에 무슨 투자냐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염전으로 성공하겠다고 마음 먹다

 토판 염전의 첫소금을 축하하는 작목반 동료와 가족들
 토판 염전의 첫소금을 축하하는 작목반 동료와 가족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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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장판을 거둬낸 염전을 토판으로 바꾸고 소금을 앉혔다. 목포에 계시는 그의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23년만이다. 작은 염전이지만 박씨에게는 아버지와 형의 땀이 배여 있는 곳이다. 두 형은 이 염전을 가꾸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부터 두 되짜리 주전자에 술잔과 안주를 올린 후 뚜껑을 덮어 염전을 오갔다. 박씨에게는 염전이 놀이터였다. 막내를 끔찍하게 아꼈던 아버지는 막내만은 염전 일을 시키지 않았다. 박씨가 염전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장성한 아들의 따귀를 때렸다.

염전에서 일하는 것이 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염전에 묻은 두 자식 때문이었다. 막내만은 육지에서 반듯하게 살길 원했다. 박씨도 결혼해서 목포로 나갈 때는 아버지는 물론 섬 어른신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을 쪼아 만든 절구통을 싣고 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심산이었다.

염전도 남에게 임대를 주었다. 트럭에 몸을 의지하고 객지를 떠돌며 야채장사와 과일장사를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고향 염전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손수 마련한 염전이었다. 두 형의 뼈가 묻혀 있는 염전이었다.

아버지 몰래 들어와 염전을 둘러보고 과일나무도 심었다. 꼭 다시 돌아와 보란 듯이 염전으로 성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10년을 설득했다. '가세, 가세, 가서 사세.' 아내의 마음도 움직였다.

그런데 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완곡하기로 소문난 아버지였다. 결혼한 아들이 늦게 일어난다고 구들장을 쇠스랑으로 파버린 양반이었다. 형의 네 조카와 박씨의 자식까지 가르치기 위해서 염전을 택했다. 아버지도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염전은 그에게 희망의 씨앗이자 열매

 토판 염전으로 개조한 후 좋은 소금을 많이 오게 해 달라고 소금창고 앞에서 고사지내는 박성춘씨.
 토판 염전으로 개조한 후 좋은 소금을 많이 오게 해 달라고 소금창고 앞에서 고사지내는 박성춘씨.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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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의 염전은 다른 곳보다 크기가 절반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작은 염전을 기계화하기 위해 투자한 비용이 2천만 원이다. 모두 '미친놈'이라 했다. 사실 박씨는 소금에 미쳤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장인에 이르겠는가.

그동안 염전구조만 세 번이나 바꿨다. 모두 좋은 소금을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박씨가 소금운반을 기계화했던 것은 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금을 걷는 오후 4시 이후 소금이 가장 많이 오는 시간이다. 1시간만 소금을 늦게 걷는다면 기계화에 투자된 비용은 3년이면 보전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미친 짓이 아니었다.

박씨의 염전은 '샹막골'에 있다. 이곳은 마을에서 '애기들 송장을 버린다'는 장소였다. 어른들은 그냥 '무선자리'라 했다. 아버지 몰래 집을 지을 자리로 준비해 두었다. 직접 살 집도 지었다. 박씨 아들은 목포에서 대학을 다닌다. 요즘 그 아들이 염전일을 배우겠다고 기웃거린다. 염전을 하겠다고 해서 귀싸대기를 맞았던 박씨는 아들에게 소금 일을 가르친다.

지난번 영광에서 치러진 '천일염의 날' 행사에서는 직접 소금을 팔았다. 염전을 토판염으로 바꾸는 일에는 아들도 참여했다. 박씨는 천일염에 비전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들이 염전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 자신이 얻은 노하우도 전해줄 생각이다. 아들이 고마울 뿐이다.

첫 소금을 내는 날 지인들을 불렀다. 어머니도 아들도 참석했다. 소금창고 입구에 제상을 차리고 활짝 웃는 돼지를 올려놓았다. 염전에 미친 박씨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옛날 소금창고에 아담하고 소박한 소금박물관을 꾸밀 계획을 하고 있다. '활염'이라 부르는 옛날 소금을 구워 상품으로 만들 계획도 세웠다. 염전은 그에게 희망의 씨앗이자 열매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그의 꿈이 새록새록 자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천일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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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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