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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일컬어 극단의 시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처럼 짧은 시간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던 시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화에 맞추어 정신적 가치를 확립하기도 전에 새로운 변화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더 통제하기 어려운 극단의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 혹자는 20세기 최대의 격전지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공간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로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 끝났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나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저들은 자본주의의 승리가 극단의 역사를 종식시켰다고 받아들였다. 그 역사의 종말 속에서 살아남은 문화는 이제 사회적 신테제(합명제)를 이루어 역사의 목적을 이뤄가고 있다고 선언하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그 테제(명제)에 대한 안티테제(반명제)를 목도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역사의 종말이 아니었다. 그건 새로운 테제의 시작일 뿐이었다. 극단의 시대가 가고 희망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탐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절대이성을 향한 헤겔의 꿈은 점점 더 요원해져만 가고 있다. 탐욕의 시대는 극단의 시대보다도 더 심각하게 현대 인류의 자존심을 무너트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계는 점점 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적 구조에 함몰되어가고 있다. 애당초 시장 자유주의적 가치를 앞세워 드높였던 민주주의의 이상은 탐욕의 시대 앞에 무너져 가고 있다. 도대체 누가 그 탐욕의 시대를 부추기고 있는 걸까? 우리 시대의 특별한 지식인으로 전지구적 봉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 장 지글러가 그 물음에 답을 준다.

 

무너진 행복에의 꿈

 

장 지글러는 프랑스대혁명에서 구현되지 못했던 미완의 목표에서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적 이상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행복해질 권리"(모든 나라의 헌법에서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이다. 생쥐스트, 바뵈프, 자크 루, 마라. 이들은 이상주의적 혁명가들로 사회정의에 입각한 인간의 행복해질 권리를 찾기 위해서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들의 급진적 혁명의 대가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으로 "전 세계적인 사회정의 실현에 대한 갈구와 희망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장 지글러는 급진적 사회개혁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토머스 모어의 이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남아 있다면 그 급진성은 파괴적이 아닌 희망적인 것이다. 실제로 장 지글러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다시 한 번 혁명에 나선다.

 

그가 행복추구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9년 동안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의 신분을 가지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가 목격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혁명이 끝난 지 200년도 넘었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행복해질 권리는 요원한 이상이 되고 있다. 지난 세기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 불행의 원인이었다면 지금은 경제 이데올로기가 그 주범이 되고 있다. 극단의 시대에는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전제주의와 정치 현실을 악용한 반민주적 독재주의가 그 권리를 앗아갔다. 그리고 지금은 자본을 앞세운 경제적 전제군주들의 등장으로 또 다시 그 권리를 빼앗겼다. 장 지글러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비참함의 정도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이 아이들의 생명은 재화의 객관적인 결핍이 아니라, 재화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 다시 말해 인위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35)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세계화의 깃발 아래 수많은 인류가 기아와 영양실조에 내몰리고 있다. 18억의 인구가 하루에 1달러 미만의 수입에 의존해 극도의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다. 8억5천만 명의 성인이 문맹이며, 학령기 아동 중에서 3억2,500만 명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만성적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은 40년전 4억 명에서 현재 8억5,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지구를 절반으로 나눌 때, 남반구에서는 전염병, 기근, 영양실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북반구에서는 소외와 실업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처럼 행복해야 할 인류가 점점 더 행복에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흥 자본주의 봉건체제는 날로 번성해 가고 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오늘날 인류의 불행이 이들 신흥 전제군주들의 탐욕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는 "국민 주권을 회복하고 인류 공동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강조한다(73).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행동강령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인류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이해와 결단에 이른 후에 선의의 연대를 통한 참여에 이르는 것이다. 장 지글러의 책은 탐욕의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연대를 통한 참여에의 길을 모색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에 담겨 있는 팩트의 진실됨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불행의 원인을 기아와 굶주림의 실상으로부터 분석하고 있다. "무엇이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기아와 같은 불행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 마디로 부채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부자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 남반구가 북반구, 특히 북반구의 지배계층을 위해 돈을 댄다. 오늘날 북반구가 남반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부채를 제공하고 그에 대해서 받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79).

 

저개발국가들은 채권자들(국제통화기금, 민간은행)로부터 자본을 빌려 일을 하게 되지만 이익을 향유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저들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더욱이 부채는 줄어들지 않고 점점 늘어나 구조적인 빈곤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폭력적 구조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세계화지상주의자들과 채무국 지배계층들 뿐이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건 결국 빈곤과 기아뿐이다. 지글러는 이러한 경제적 악순환을 구조적 폭력의 전형적인 예라고 소개하고 있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그가 세계 구석구석을 둘러본 후 내린 결론이기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저자가 둘러 본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국민들을 위한 사회 투자 예산은 거의 없다. 채무국의 경우 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은 부채에 따른 원리금(이자와 일부 원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공립학교나 공공병원, 사회보험 등의 사회투자를 위한 예산이 절대 부족하게 된다. 채무국들은 채권자들의 압력으로 예산을 감축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서민들은 심각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외채가 국가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그것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장 지글러의 분석을 보자.

 

"1970년대 무렵,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외채 총합은 600억 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자 이 액수는 2,400억 달러까지 뛰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엔 2배로 증가해서 4,830억 달러까지 올라갔다. 2001년, 라틴아메리카 외채 총액은 7,500억 달러에 육박했다. … 지난 3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해마다 자신들의 원자재와 서비스를 수출함으로써 벌어들인 돈의 30-35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를 부채 상환에 할애해야 했던 것이다"(92).

 

저자는 외채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종양과 같다"고 비교하면서 이 악성종양과도 같은 부채로 인해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이 가난과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카메룬, 코트티부아르, 케냐, 잠비아, 니제르, 탄자니아 등의 나라는 부채를 청산하기 위한 비용이 4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기 때문에 빈곤이 고착화되고 있다. 사실 이 부채들은 제3세계의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있으며 국민들을 노예상태로 붙잡아두고 기아로 인간을 파괴하는 '추악한 부채'들이다. 이런 추악한 부채들로부터 저들을 해방시키고 빈곤의 악순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인 부채 탕감에 대한 당위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에릭 투생이 이끄는 제3세계 부채 폐지위원회(CADTM)은 이 문제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희망찬 정책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신흥 "봉건제후들"의 탐욕 때문이라는 게 장 지글러의 판단이다.

 

탐욕의 시대의 주범들

 

탐욕의 시대에 부채와 기아의 악순환을 조장하는 핵심 세력은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들은 신흥 봉건제후들이 되어 전 세계적 자본의 횡포를 휘두르고 있다. 이들의 규모는 엄청나다. 장 지글러의 말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중이 큰 500개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지구 전체 생산의 5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500개 기업 중에서 58퍼센트는 미국에서 출발한 기업들이다. 이들 500개 기업은 모두 합해도 고작 전 세계 노동력의 1.8퍼센트만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 500개 기업이 축적한 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33개국의 부를 모두 합한 것보다 크다."

 

지글러는 네슬레, 다국적 제약회사들, 몬산토 사 등의 예를 통해 신흥 봉건제후들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들은 IMF, IBRD, WTO 등의 국제기구와 협력하여 신자유주의 체제를 앞세워 불공정무역과 독과점 체제 등을 통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 이들에게 국제적 기아나 빈곤의 문제는 관심 밖이다. 로버트 라이시가 <슈퍼 자본주의>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듯이 이들은 본질적으로 이윤 추구에만 목적을 두고 있을 뿐, 분배나 복지에는 관심이 없다. 네슬레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에티오피아의 원두를 점점 더 싸게 구입하여 값비싼 커피를 만들어 판다.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의 농부들은 점점 더 심각한 빈곤의 늪으로 빠져든다. 네슬레의 탐욕이 기아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전염병 퇴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나마 노바티스와 같은 제약회사에서 질병 퇴치를 위한 신약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을 뿐 나머지 제약회사들은 이윤 챙기기에만 바쁘다. 몬산토 사는 유전자 변형식품 생산을 통해 씨앗의 주권을 독식하고 있다. 몬산토 사는 식량부족 현상 해결을 표면에 내세워 유전자 변형식품들을 개발하지만 사실은 로열티를 받기 위한 기업 정책일 뿐이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씨앗 주권이 유전자 변형을 통해 다국적 기업의 소유가 되고 있다.

 

이들의 탐욕으로 아프리카와 남미의 수많은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기업의 이익은 날로 증가해 그 기업의 책임자들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에이미 추아가 <불타는 세계>에서 진단한 것처럼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탐욕으로 가득한 신흥 봉건제후들의 놀음 아래 불타고 있다. 사실 세계화를 앞세우고 있는 국제기구들은 대부분 이들의 작전에 놀아날 뿐이다.

 

"신흥 봉건제후들이 개발해낸 정부나 의회, 언론과 여론 등을 상대로 하는 로비나 잠입 전략, 이들을 자기들 뜻에 맞게 조종하는 책략 등은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효율적이다. 이러한 작전들을 마라가 그토록 비판했던 공작이나 후작, 백작들이 알면 너무 부러워서 기절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254).

 

이들의 탐욕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탐욕의 시대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기생하고 있는 건 세계화의 망령이지만 사실 깊이 따져보면 바로 독자들의 욕망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탐욕이 이들의 탐욕을 부추기는 매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경쟁과 탐욕의 시대를 즐기면서 살아간다면 신흥 봉건제후들의 세력은 점점 더 증가하게 될 뿐이다. 따라서 저들의 탐욕을 부추기는 힘이 바로 우리 안의 탐욕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곧 우리의 탐욕에서부터 인류의 기아와 빈곤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 탐욕의 시대를 제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희망의 연대를 위하여

 

장 지글러는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을 강조한 저자는 이 혁명 정신이 계승되어 이 시대에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세의 봉건주의를 무너뜨렸던 혁명의 정신이 다시 일어나야만 이 시대의 신흥 봉건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역사적 발상이 신선하다. 그의 제안에 긍정할 독자들이 많으리라 판단한다.

 

기아와 빈곤,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 항구적인 실직 상태와 내일에 대한 불안 심리 증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지구촌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불행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편안함은 무슨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 지금 이 순간에서 수없이 희생되고 있다. 그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대로 편안한 일상에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윤리적 주체로서 우리가 이렇게 안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장 지글러는 몇 가지 행동 강령들을 제시한다.

 

우선 이 엄연한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로 인해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관행을 투명하게 만들어 저들의 횡포를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고, 신흥봉건제후들에게는 시민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위험이 따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연대를 해야 한다. 저자는 시민들의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현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332).

 

그의 요청은 무겁지만 매우 절실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많은 투쟁가들이 희생을 치뤘다. 그 희생의 대가로 오늘 우리의 자유와 평등의 삶이 주어졌다. 이제 시민들이 다시 일어나 빈곤과 기아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낳은 환경 속에 처해 있다. 그래서 행동에 나서기가 더 쉬울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고, 무관심은 동의가 아니다. 인류가 공동의 행복을 꿈꾸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시작해야 한다. 탐욕의 시대를 극복하고 행복과 번영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장 지글러의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가 우리의 시대를 탐욕의 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가? 자신의 탐욕이 역사에 각인되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그래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의 의지에 연대하고자 한다.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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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장지글러, #갈라파고스, #신흥봉건제후, #빈곤,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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