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강인희를 만날 생각을 하니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가슴이 덜덜 떨리고 몸이 붕 떴다. 오히려 박혜원을 사랑할 때보다 더욱 진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강인희에게 향하는 나의 감정이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최대한 말끔하게 차려 입은 다음 나가려는데 강인희의 전화가 왔다. 폴더를 열면서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 저녁식사를 취소해야 할 것 같네요. 교보문고의 마케팅 담당 부장이 만나자고 하거든요."
"저와 먼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
"나는 출판사에 돈을 벌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에요. 급여를 주는 직장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업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 연락을 주십시오!"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저녁 드세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강인희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저 멍하게 폴더를 바라보다가 내가 전화를 걸었다.
"오늘 시간이 나지 않으시면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도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럼 언제 시간이 나십니까?"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세요? 개인적으로 배 작가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전화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지..."
"우리는 뭐가 우리고 그런 사이는 또 무슨 말이에요? 나와 배작가님은 실장과 작가 관계일 뿐인데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취하셨나요?"

표독하게 쏘아붙이는 강인희에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함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간 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도 실장과 작가 사이의 업무였습니까?"
"나는 그런 기억 없어요! 괜히 생사람 잡지 마시고 계약한 원고나 빨리 작업하도록 하세요."

강인희가 다시 전화를 끊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고 마치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숨을 크게 쉬어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곰곰이 생각했다. 강인희가 나를 원했다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고 풍부했지만 갑자기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만일 내가 뭔가 착각했다면 자신의 입장을 밝힐 기회가 충분했으며 강인희는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토록 노골적으로 들이대었던 강인희가 왜 갑자기 돌변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은 어렵지 않게 검색되었다. 강인희는 박혜원과 나와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노래방에서 내기를 했을 때 승리한 강인희가 원한 것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할 것'이었으며, 나는 강인희의 말에 따랐다.

그런 여자는 없다고 대충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집요하고 편집적인 강인희가 마음만 먹는다면 알아낼 수 있는데다, 그럴 경우 어떤 형태든 박혜원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웠다. 사실대로 자백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때는 강인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강인희와는 섹스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고 강인희가 워낙 나를 원했기에 사실을 말해줘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강인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입장을 바꿔 내가 강인희라고 해도 자신의 앞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남자를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강인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었는데 독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삼키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제는 강인희에게마저 버림받을 위기에 처했으니 내가 정말 글을 써서 먹고사는 작가가 맞느냐는 의문조차 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함구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후회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껏 차려입은 정장을 팽개친 다음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반도 먹지 못하고 그만 토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내장을 갈고리로 뜯어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약간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한 다음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병째로 들이켰다. 
    
"생각보다는 오래 걸리는군요."    
나가려던 아내가 툭 한 마디 던졌다. 아내는 내가 아직 박혜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오래가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어리석은 짓은 한 번으로 충분해요."
내가 없어도 아내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다시 취업하고 인세 수입을 올린다고 해도 딸아이를 키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경우 아내가 딸아이를 데려갈 우려가 컸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막아야만 했지만 그 전에 해결할 것이 있었다.

예전에 만났던 와인바에 나타난 강인희는 여전히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짙고 붉은 립스틱에 허벅지가 온통 드러나는 미니스커트의 강인희는 너무나 도발적이었다. 은은히 풍기는 향수냄새까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모두 정리했습니다."
"뭘 말인가요?"

나는 그토록 사랑하던 박혜원과 헤어졌으며 이따금씩 전화하던 여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더 이상 연락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거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도 강인희의 표정은 그저 덤덤했다. 아무리 보아도 항복을 받는 승리자의 모습 같지 않았다. 마치 귀찮게 달라붙는 영업사원을 대하는 것 같은 강인희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뭐를 어쩌란 말인가요?"

강인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어이가 없었다. 박혜원과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다른 여자들까지 포함하여 정리했다고 표현한 것은 오직 강인희 때문이 아니던가? 그렇게 들이대던 강인희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충분히 파악했기 때문에 '이제는 오직 너 밖에 없다'고 애원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을 말하기 전에 모든 여자들을 정리했다고 운을 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강인희는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좋아할 것 같았나요?"
"......"
"여자들을 모두 정리했으니 앞으로는 네가 책임져라, 뭐 그런 뜻 같은데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요."
"잘못했습니다."
"뭐를 어떻게 잘못했다는 말인가요? 상세히 말해보세요."

강인희가 배시시 웃으며 추궁했다. 무서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초등학생처럼 말이 막히고 진땀이 났다. 그저 애꿎은 와인만 비웠다. 와인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강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보이지 않는 줄에 결박된 포로처럼 강인희를 따라 나섰다.
"저곳이 적당할 것 같네요."
강인희가 모텔 앞에 차를 세웠다. 내가 먼저 내려 도어를 열자 강인희가 늘씬한 다리를 과시하며 차에서 내렸다.
"앞장 서세요."

순순히 강인희의 명령에 따랐다. 섹스를 통해 강인희를 제어하거나 의도를 관철하려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제어하기는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강인희의 손바닥에서 놀아났으며 이제는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텔에 들어가 섹스를 나누는 것은 완전한 강인희의 소유물이 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모텔에서 나온 다음에는 강인희가 아내와 이혼을 요구한다고 해도 따라야만 할 것이었다.

모텔 앞에서 잠시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모텔은 나를 포맷시키고 새로운 사양으로 거듭나게 해 줄 거대한 장치 같았다. 모텔에 들어갔다 나오면 지금까지의 나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남자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강인희가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거품을 물게 될지도 몰랐다.

프론트에 체크인을 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처형 직전의 사형수라도 된 것처럼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담배 대신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분위기를 깨트리게 될 것을 우려해 전원을 꺼두었던 핸드폰이 스르르 살아났다. 전원을 끈 다음 걸려온 전화는 거의 열  통이나 되었지만 건 사람은 하나였다. 이번에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전화를 건 사람과 동일인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내가 몸을 돌려 모텔 밖으로 나가려 했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강인희가 낮지만 날카롭게 말했다.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뵙도록 하죠."
내가 나가려하자 강인희가 얼음을 씹는 것처럼 차갑게 경고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계신 건가요?"
"알고 있습니다."

모텔 문을 열고 나가는 나의 뒤통수에 섬뜩한 비수 같은 것이 틀어박혔다. 이제 강인희와는 끝이었다. 강인희는 단순히 작가와 출판사 실장과의 관계가 종료되는 것으로 끝낼 여자가 아니었다. 감히 강인희를 거부하고 모욕한 대가는 파멸적이겠지만 지금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 사람아! 왜 이제야 오나 그래."
장모님이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택시를 내려 한달음에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까지 치받았지만 호흡을 고를 계제가 아니었다. 잘 먹고 뛰어놀던 딸아이가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 데굴데굴 굴렀던 것은 와인바에서 강인희를 만날 무렵이었다.

놀란 장모님이 일단 병원으로 옮겼는데 '급성맹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단다.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했는데 마취를 할 때까지도 아비를 찾았다는 장모님의 말에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고통 속에서도 아비를 찾아 울부짖는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일 모텔에서 핸드폰을 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배를 가르는 수술을 받는데도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었을 생각을 하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제는 만날 수 있다고 그러네요."

어느 새 나타난 아내가 종이를 씹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회복실로 옮겨져 링거를 꽂고 있는 딸아이는 다행히 상태가 좋아보였다. 아비답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던 각오가 허물어지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 어제 오지 않았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대답을 해봐 응?"
딸아이의 추궁에 그예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앞으로는 나 혼자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어?"
"그래 약속할게, 퇴원하면 우리 집으로 함께 살자꾸나."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딸아이가 함빡 웃으며 기뻐했다. 절정을 맞은 벚꽃처럼 화사하고 흐드러진 웃음이 병실을 그득 채웠다. 미이라처럼 피폐한 가슴 속에 화인(火印)되었던 주홍글씨가 붉은 링거액 같은 즙액으로 녹아내렸다.


태그:#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