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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째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몰랐다.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초저녁부터 혼자 찾아와 열두시가 되도록 노래를 부르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부르는 것은 하나같이 팝송이었다. 뱀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로 불러대는 영어 가사는 내가 듣기에도 소름이 쭉 끼쳤다. 미친 짓에 가까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유일했다. 마침내 마이크를 잡을 힘도 없어 소파에 널브러진 다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밖으로 나와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거반 한 병을 비웠다. 아내와 전혀 상의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 두었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수입은 용돈과 술값 밖에 되지 않았고 아내가 버는 것으로 먹고 살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편이 아내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둔 것이 그냥 넘길 일이던가, 그러나 아내는 뭐라 하기는커녕 밤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관심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아내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런 만큼 고통스런 치유 과정을 거쳐 돌아가야 했지만 상처는 조금도 봉합되지 않았다.

 

"웬일이세요?"

폴더 안에서 강인희가 건조한 톤으로 말했다.

"내일 만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잊지 않으셨나 걱정이 되어 전화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하신 거예요?"

 

강인희가 어이없어 했지만 나는 내일 약속한 저녁식사의 시간과 장소를 거듭 확인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소주 한 병을 더 비우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강인희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박혜원을 놓친 것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해도 좋고 아무래도 좋았다. 가급적 빨리 강인희를 내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박혜원을 놓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실수였지만 아내가 박혜원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방심한 탓이 컸다. 그에 비해 강인희는 이미 아내가 알고 있고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빈틈을 유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혜원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확률도 높았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강인희가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며 거의 공개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었다. 강인희를 가질 수 있다면 박혜원을 잃은 아픔을 희석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도 강인희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온통 헤집어 말끔히 치웠다. 예정에 없던 대청소는 앞으로 살림을 살기 위한 준비운동인 동시에 시간을 보내기 위한 용도였다. 강인희를 만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딘지 알 수 없었다. 박혜원을 만날 때보다 훨씬 조급하고 애가 타는 것 같았다. 싱크대를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그만 컵을 깨고 말았다. 맨손으로 하는 바람에 손바닥을 베었지만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청소를 마치고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밥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동안 먹은 것들은 대부분 술을 마시면서 안주로 나오는 것들이었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이었다. 잠도 제대로 잔 기억이 없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는 상태가 며칠이나 지속된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 사이에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나 빠지는 바람에 뺨이 삽으로 떠낸 것처럼 홀쭉해지고 바지는 주먹이 들락거릴 정도였다. 그런 몸으로 중노동에 가까운 집안청소를 마쳤으니 피로와 허기에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뭔가 먹어야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있다가 강인희와 저녁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했다. 강인희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이상에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배려하고 존중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강인희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아야 했다.

 

텅 빈 육체에서는 한 오라기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신은 무섭게 타올랐다. 어느새 강인희는 나를 지탱하고 유지시켜주는 운영체제 이상으로 기능했다. 강인희를 향한 나의 감정이 스스로 그렇게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거나 집착의 다른 형태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오직 강인희가 필요할 뿐이었다.

 

"아빠, 내일 데리러 올 거지?"

딸아이가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올 수 있는 금요일이 무척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안 돼?"

"왜? 외할머니가 싫으니?"

"그게 아니라 아빠하고 살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야."

 

딸아이가 이렇게 칭얼거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회사도 그만두었으니 가능하면 빨리 데려오고 싶었다. 갓난아이가 아닌 만큼 내가 돌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줄 자신이 있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 딸아이의 방을 한 번 더 치웠다.


태그:#소설 , #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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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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