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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나 저거 먹고 싶어."


딸아이가 맥도널드를 가리켰다. 나는 두말없이 그곳으로 차를 댔다. 내가 데리러 가는 금요일은 딸아이가 살판이 났다. 딸아이가 금요일을 학수고대하는 이유 가운데는 장모님이 외손녀에게 인스턴트식품과 콜라 같은 청량음료를 절대 먹이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내가 데리러 가면 딸아이는 가장 먼저 햄버거와 피자를 포식하고 콜라를 들이켜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내가 카페를 연중무휴로 열기 때문에 딸아이과 함께 놀아주는 것은 내가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딸아이와 함께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했지만 최근에는 곤란을 느끼게 되었다. 딸아이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여자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박혜원과 강인희는 거의 모든 점에서 상반되었다. 외모와 성격도 그렇지만 박혜원은 가정이 있는 데 비해 강인희는 자식도 딸리지 않은 이혼녀로서 입장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박혜원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것에 비해 강인희는 거의 말술이었다. 게다가 박혜원이 나의 프러포즈에 의해 결정적인 관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 반면 강인희는 그녀의 적극적인 대시에 의해 갑자기 뜨겁게 끓게 되었으니 두 여자는 모든 면에서 상극이었다.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나를 향하는 그녀들의 감정이었다.

 

박은혜는 분명히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강인희는 그렇지 않았다. 강인희에게서 표출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독점욕에 가까운 것 같았다. 특히 강인희의 변신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다른 나라의 뒷골목을 헤매는 것처럼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내 이외의 여자와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해야 돼."

"네 엄마한테도 비밀로 해 둘게."

"그럼 있다가 백화점 가는 것도 비밀로 해야 해."

 

딸아이는 새로운 완구와 게임기를 사고 싶어 했다. 그것들은 외할머니 댁에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집에 두어야 했으며 모든 관리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었다. 쉴 새 없이 조잘대던 딸아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잠든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강인희의 전화가 왔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덕분에요, 작가님도 잘 들어가셨나요?"

"실장님 같은 미인과 헤어지려니 너무 안타까웠지만 가정이 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들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비위까지 맞출 줄 아시네요? 어쨌든 듣기에 나쁘지는 않군요."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럼 진심이라는 증거를 대보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시간과 장소를 결정해서 통보하도록 하세요."

 

전화를 끊은 다음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강인희와 술을 마신 다음 노래방으로 향했다. 술로 승부를 가르지 못한 대신 술 실력에 버금가는 노래솜씨로 기선을 제압하려던 의도도 깨끗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인희의 노래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나도 그리 뒤지지 않았지만 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기기 어렵다는 의미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다, 결정적으로 강인희가 거의 대부분의 노래를 팝송으로 불렀기 때문에 희소가치의 측면에서는 완패가 분명했다. 가장 자신 있게 선택한 분야에서 우세를 잡기는커녕 완패한 것은 결코 흔쾌할 수 없겠지만 상대방이 강인희라는 것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술과 노래를 즐기고 성격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나와  강인희는 기질적으로 통했다. 지금까지 강인희에게 무심했던 것은 강인희가 싫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관심을 두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강인희 뿐 아니라 아내 이외의 모든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만큼 강인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갑자기 강인희가 여자로 보이게 된 것은 그동안 병적으로 집착했던 의무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데 원인이 있을 것 같았다. 아내 이외의 여자와는 절대 섹스를 나누지 않겠다고 설정한 원칙이 흔들리게 된 이후 강인희의 본질을 느끼게 된 것은, 어떤 이유로 인해 고행을 그만둔 수행자가 그동안 절제했던 음식과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나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목적을 숨기려하지 않고 똑바로 들이대는 강인희 같은 여자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계속 대박이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강인희를 놓칠 수 없었다.


"혜원씨와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게 어딘데요?"

 

커피를 마시던 박혜원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가보시면 압니다."

"여기서 먼가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카페를 나온 다음 내가 찾은 곳은 뒷골목의 포장마차였다. 로맨틱한 곳을 기대했던 박혜원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다소곳이 나를 따라 들어섰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여자가 술을 시키기도 전에 큰 대접에 홍합과 국물을 그득 담아내었다. 개운한 국물을 들이키자 꽃샘추위가 확 가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소주와 새우구이, 박혜원은 잔치국수를 달라고 했다. 내가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왜 혜원씨와 포장마차를 오고 싶어 했는지 아십니까?"

"......"

"제 꿈 가운데 하나가 사랑하는 여자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홍합은 옵션이구요."

 

나는 어렸을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서 연인들이 함께 포장마차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너무나 부러웠다고 말했다.

"사모님과는 그런 일이 없으셨나요?"

"아내와 데이트 할 때 한 번도 포장마차에 온 일이 없었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른 여자들과는 여러 차례 왔었지만 대부분 업무나 작업 때문이었고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혜원씨가 제 꿈을 이루어준 유일한 여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소주를 마실 줄 모르니까 작가님의 꿈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저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단숨에 소주를 털어 넣자 박혜원이 잔잔하게 웃으며 잔을 따라주었다. 반 병쯤을 마시는데 안주와 국수가 나왔다. 나는 새우를 까서 박혜원에게 주었고 박혜원은 국수를 거의 반 이상이나 덜어주었다. 우리들은 어린 연인들처럼 떠들고 웃으며 데이트를 즐겼다. 소주를 세 병이나 넘게 비운 다음 아쉽게 포장마차를 나섰다. 나야 쉽게 변명할 수 있겠지만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기르는 여자는 되도록 일찍 보내주어야 했다. 앞으로 섹스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고 해도 지금은 충분히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좋았다.

 

"소주 한 병하고 김치찌개 주세요!"

아파트 앞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소주 한 병 마실 시간은 충분했다. 내 나이 또래의 주인여자는 김치찌개를 아주 잘 끓였다.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넣은 김치찌개를 안주로 또 한 병을 비워나가다 잔을 내려놓았다. '사모님과 포장마차에 간 적이 없었느냐'는 박혜원의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박혜원은 그 말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아내와 남편이 있는 만큼 굳이 그 사실을 들춰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박혜원이 그 말은 꺼낸 것은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용도였겠지만 그것이 의외의 화두(話頭)로 작용했다.

 

지금까지 나는 불륜을 저지르는 과정에 진입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전혀 변질되지 않았으며 딸아이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주저 없이 바칠 수 있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다 할 수 있는 내가 불륜에 빠져 아내와 멀어진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박혜원과 강인희를 만나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아내에게 해 준 것을 보았을 때 이만한 대가를 얻는 것은 그리 무리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내에게 비밀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만일 아내가 안다면 두 여자와의 만남을 선선히 허락해고 섹스관계까지 가도록 용납해줄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입장을 바꿔 만일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섹스까지 원한다면 나도 결코 가만있지 못할 것이다. 그럴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만큼 나의 행위 역시 절대 비밀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래도 불륜이 아니라고 자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를 믿기 때문이었다.

 

박혜원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가정을 깨뜨리지는 않을 것이며 박혜원 역시 그럴 것이기 때문에 좋게 결말을 지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거의 맹목적으로 들이대는 강인희였다. 그러나 남다른 두뇌와 판단력을 가진 강인희가 파국까지 몰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강인희가 자신과 결혼할 것을 요구하는 등으로 막나간다면 그때는 아내에게 솔직히 말하고 함께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강인희를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만 설마 그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컨트롤하기에 달린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잔을 거칠게 털어 넣고는 아내에게 못난 남편 만나 고생 많다며 전화를 했다.


태그:#소설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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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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