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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점선이 남긴 유작 자서전이다.
▲ 점선뎐 화가 김점선이 남긴 유작 자서전이다.
ⓒ 시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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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자기 선택에 충실했던 용기와 유머

그 여자가 쭉 써온 글을 책으로 내겠다고 준비 중이던 출판사 사람들이 찾아왔다.
"책 제목을 뭐라고 할까요?"
몇 가지 제목들을 출판사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정신이 파도치듯이 들락거리는 중에 그 여자가 비장하게 말했다.
"점선뎐! 이 책은 나의 전기다. 이제까지 낸 책들과는 다르다."
그 여자는 그 순간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 방에서 본, 여자들의 전기에 관한 책들을 떠올렸다. 옥단춘뎐, 숙영낭자뎐......
그 여자들과 자기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파도에 떠밀려 가는 정신을 겨우 추스르며 생각했다.

저 글은 기이한 행적으로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간 화가 김점선의 마지막 유작인 <점선뎐>의 제목 탄생 배경을 김점선 자신이 서문에서 밝힌 것이다.

그이는 암투병 중에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 김점선 그이는 암투병 중에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 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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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이가 영면하기 하루 전날인 21일,  <점선뎐>을 '이광용의 문화공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다. 어쩌면  22일 영면한 그이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쓴 자서전을 그이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소개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그이의 절친한 친구와  바로 그날 하루 밤을 함께 했고  그이가 영면한 날 그이 이야기를 하며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이가 즐겨 그리던 말 그림
▲ 말 그이가 즐겨 그리던 말 그림
ⓒ 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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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과 22일 나주 도래 마을에서 행사가 있었다. 22일  도래 마을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무슨 이야기인가 끝에 화가 김점선과 <점선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1박 2일 동안  나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었던 사람이 김점선의 여고와 여대 동창이면서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 외에  더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며 그이의 그림 말, 오리, 코끼리 이야기를 하며 서울 인사동 근처에 도착한 것이 6시 30분 무렵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3일 아침, 화가 김점선 영면소식을 문자로 접했다.

오리는 김점선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동물이다.
▲ 오리 오리는 김점선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동물이다.
ⓒ 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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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만 만났던 화가 김점선이 남다른 매력으로 다가온 것은 <점선뎐>을 소개하려고 책을 읽은 후이다. 책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술술 넘어가면서 그이 삶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이가 정한 제목 <점선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이는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줌 흙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김점선은 건축가 김원씨가 설계한 집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 김점선과 건축가 김원 김점선은 건축가 김원씨가 설계한 집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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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아파 유화를 그리기 힘들어지자 아들이 사다 준 노트북을 이용해 컴퓨터로 그림을 그려 그이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이 싼 값으로 자신의 그림을 방안에 걸어 놓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이가 예술가 특유의 고집으로  유화만을 고집했다면 우리는 그이의 기발하고 밝고 환한, 그래서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수많은 그림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렇게 아름다운 예술혼을 지녔고 그 기쁨을 기꺼워하는 이들과 호탕하게 나눌 줄도 알았던 그이는 그림과 이름만이 아니라 색깔 있는 추억을  주변 사람들에게 가득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너무나 엄정하게 아들을 대했기 때문에 특별한 유언장이 없다.
줄기차게 칭찬, 숭배, 예찬 일변도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생활하는 관찰자로서 그를 칭찬했다.
나로부터 개선된, 진화된 생물체로 태어난 미래의 인간으로서 숭배했다.
인류의 휼륭한 유전자를 그대로 보유한 미래 세대의 구성원으로서 예찬했다.
나는 인류문명의 발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미래를 가슴 벅차게 기대하는 사람이다.
아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든 순간이 유언장이 될 것이다.
그의 장점을 혹시 그가 잊을까봐 늘 깨우쳐주려고 노력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를 칭찬할 거리를 만들고 찾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제일 무서워하면서 살았다.
혹시 그에게 내가 나쁜 영향을 줄까봐 평생을 긴장하며 살았다.
아들을 비웃거나 빈정거린 말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런 정신 상태에 잠긴 기억도 없다.
나의 아들은 기억 속의 나를 종종 추억하면서 웃기만 하면 된다.

김점선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고 할만큼 오리를 좋아해서 많은 오리 그림을 남겼다.
▲ 오리를 안고 있는 여인 김점선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고 할만큼 오리를 좋아해서 많은 오리 그림을 남겼다.
ⓒ 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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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암이 몸 안에 자라게 된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엄살이 없었다. 원망은 커녕  오히려 자기 안에서 자라나는 종유석이라며  감사했다. 한 순간도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생을  살아 낸 사람답게 아들에게조차 특별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던 그이,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던 그이는 분명  다른 장소에서 유쾌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 그이의 지인, 그이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도 마지막까지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고 돌아간  그이를 추억하며  그저 유쾌하게 웃기만 하면 되지 않을런지.

덧붙이는 글 | <점선뎐>은 22일 암으로 영면한 화가 김점선의 유작 자서전으로 시작 출판사에서 그이가 영면하기 2주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점선뎐

김점선 지음, 시작(2009)


태그:#김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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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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