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교야구팀 수가 4200여 개인데 비해 한국은 이것의 1/7 수준 밖에 안 되는 60여 개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있는 한국 고교야구부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다. 우리가 일본이나 미국 정도 수준의 구장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가? 이토록 상대적으로 열악한 인프라 수준에서 한국이 결승전까지 올라왔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저력이자 초능력이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초능력자이다. 우리도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오늘 이 거리 응원을 통해 서로 기를 모아 대표팀에게 전하러 왔다. 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 대전 야구장을 찾은 김성식 씨(48)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이 펼쳐진 3월 24일 대전에 위치한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 한밭 야구장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야외 응원전이 펼쳐졌다. 250여 명의 대전 시민들이 구장 내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통해 한국 야구대표팀을 응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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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석을 중심으로 1·3루 내야석에 자리 잡은 관중들의 얼굴에는 연신 흐뭇한 표정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국대표팀을 지휘하는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과 이제는 '김월드'로 불리는 김태균, '꽃보다 범호' 이범호 그리고 '괴물' 류현진까지 대표팀의 핵심선수들이 모두 한화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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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에 수업이 없어 응원을 나왔다는 대학원생 동갑내기 커플 황정호, 신미정 씨(30)는 "한화 출신 선수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것이 자랑스럽다"며 "한화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뿌듯해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날 한밭구장에는 공동 응원전의 열기를 담아가기 위해 각 방송사 취재진들이 몰려들었고, 한화 구단 소속 치어리더들도 나와 노련한 응원 실력으로 장내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시민들은 대형 전광판을 통해 LA 현지 교민들의 응원 모습이 비칠 때마다 다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흥에 겨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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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 전, 이곳을 찾은 한 60대 여성에게 응원을 나오게 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밖에 나와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함께 응원하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느냐"며 "아직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았지만, 조금 이따가 경기가 시작된 후 응원 열기에 불이 붙으면 우리가 왜 '한국인'지 알게 될 것"이라 말했다. 집에서 편하게 TV로 시청할 수도 있는데도 굳이 밖으로 응원하러 나온 이 중년의 여성에겐, 거리 응원이란 '기쁨을 함께 나누는' 한국인들 특유의 공동체 의식 그 자체였다.

당초 경기 시각이 평일 오전인 관계로 수업이 없는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 중 비교적 영업시간이 탄력적인 자영업 종사자들이 주로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날 대전야구장에는 상당수 넥타이 부대가 눈에 띄었다. 지역의 여러 회사들이 이날의 거리 응원을 위해 임시 휴무를 감행(?)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것이다. 사장과 직원들이 함께 나란히 앉아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색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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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히 휴무를 결정하고 직원들과 함께 거리 응원전에 나선 이 지역 재무설계회사(동양증권) 김영석 대표는 "대회기간 중 직원들이 인터넷 문자 중계로 눈치 봐 가며 경기를 보는 모습이 늘 안타까웠다"며 "현재 경기침체로 직원들의 사기도 저하된 만큼 모처럼 밖에 나와 다함께 한국팀을 응원하며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생각"이라 말했다.

그 옆에 있던, 올해 회사에 입사했다는 한석준(28)씨는 "요즘과 같이 모든 회사의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사장님이 직원들을 위해 주는 것이 고맙다"라며 "비록 경기 상황은 좋지 않지만, 이렇게 가족과 같은 분위기의 회사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이날 응원현장에는 김 대표와 같은 '대인' 사장님들이 의외로 많았다.

무역회사(코리온)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식(48)씨는 당장 회사 가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을 남겨 두고, 나머지 직원들과 이곳에서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주로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수입 거래를 한다는 그는 최근 유로화 강세와 원화 약세 그리고 국내 소비 침체로 회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 대표 역시 고생하는 직원들을 위해 하루를 특별히 '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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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자리에서 길거리 응원이 한국의 무역산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밝혔다. 김씨는 한 나라의 국가 신인도를 따져볼 때, "나라의 경제·정치 수준에 따른 신용 등급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 특유의 거리 응원문화도 우리 국민들의 응집력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국가 신인도 향상에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국제 경기 때마다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한국의 거리 응원문화가 국가 브랜드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대통령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을 알리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한편 이날 경기에서는 선발 봉중근 선수를 비롯해 전반적으로 한국 투수들의 구위가 매우 불안했다. 3회 일본에 먼저 한 점 내준 뒤 5회 추신수의 솔로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지만, 7회와 8회 또다시 일본에게 연달아 2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이대호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따라잡긴 했지만 9회까지 2-3으로 끌려가던 한국팀이었다.

이 때문에 이날 경기장에서 응원전을 펼친 대전 시민들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공강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처음으로 야구 길거리 응원에 참여한 새내기 여대생 이미은(19)양은 "야구가 이렇게 떨리는 건지 몰랐다"며 시종일관 초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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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거리 응원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9회 말 한국 공격에서 2사 1·2루 상황이었다. 전 타석에서 꽃가루를 날리며 2루타를 날린 이범호는 또다시 일본의 강속구 투수 다르빗슈에게 동점 적시타를 뽑아냈다. 경기가 이대로 끝나는 줄 알고, 착잡한 심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보던 대전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패배의 기운이 감돌던 대전구장이 일순간에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모든 이가 대전의 꽃 이범호를, 그리고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목청껏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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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한국선수들의 중압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연장 10회 초 한국의 마무리 임창용이 일본의 간판타자 이치로와 8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결승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한국이 다시 한번 따라붙어주길, 이곳에 모인 시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기도했지만, 경기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야구장을 찾은 시민들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4시간 넘게 온 맘과 힘을 다해 응원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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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기가 끝난 후, 이번 경기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답했다. "결승까지 와서 졌다는 것이, 그리고 그 상대가 숙적 일본이었기에 분하지만 어쨌든 우리 선수들은 선수 구성과 코치 선임 때부터 발생한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며 "정말 잘 싸웠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나라 전체가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 선수들이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또다시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라며 고마워했다.

대한민국 국민 다수가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이다. 이제 한국야구가 세계 최강 수준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이, 미국이 그리고 전 세계가 확인하고 인정했다. 그렇게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의 위대한 도전은 아쉽지만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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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전 거리응원 한국야구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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