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무리하는 격투축제답게 'K-1 다이너마이트'는 이벤트적인 성향이 강하다. 때문에 다이너마이트에서는 입식 타격선수와 종합 선수가 어느 한쪽 룰로 맞붙는 경기는 물론 몇 체급의 차이까지도 무시하는 경기가 종종 벌어진다.

2004년 대회에서는 '손오공' 우노 카오루(34·일본)의 다이너마이트 출장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지금이야 포스가 많이 떨어져있지만 당시의 우노는 세계 격투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강자였다.

넘치는 파이팅을 바탕으로 타격과 그라운드에 모두 능숙했던 그는 슈토와 UFC 등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강자들과 전적을 쌓아나갔던 선수다. 타테시 유조, 와치 마사히토, 코타니 히로키, 딘 토마스, 데니스 홀맨, 이브스 에드워즈, 파비아노 이하는 물론 에르메스 프랑카(34·브라질), 비제이 펜(31·미국) 등과도 자웅을 겨룬 바 있다.

그런 우노를 다이너마이트 무대에 불러들인 주최측은 찬 뎃 소판트레이(36·태국)를 상대로 내세웠다. 입식격투기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무에타이, 거기에서도 룸피니 라이트급 챔피언 출신의 강자였다.

 우노 카오루는 슈토와 UFC 등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강자들과 전적을 쌓아나갔던 베테랑 선수다

우노 카오루는 슈토와 UFC 등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강자들과 전적을 쌓아나갔던 베테랑 선수다 ⓒ 드림


룰의 차이, 경험의 차이… 노련한 두 베테랑의 충돌

일단 전체적인 조건에서는 우노가 훨씬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소판트레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라고 해도 입식격투선수가 MMA룰로 종합격투기 선수를 누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공식적인 종합 경기는 처음이었고, 상대 또한 파워보다는 영리함으로 승부하는 선수라는 점에서 궁합도 좋지 않았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무에타이는 클린치 공방전이 많고 팔꿈치나 무릎을 즐겨 쓴다는 점에서 가라데-킥복싱 등 다른 입식격투기보다 종합룰에서 선전한 가능성이 더 높다. 선수의 수준에 따라 그 편차가 크겠지만 엇비슷한 조건이라면 무에타이가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다.

탁…타, 타탁…
평소 맨발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이날은 레슬링 슈즈를 신고 나온 우노는 경쾌한 스탭을 바탕으로 링사이드를 빙빙 돌며 소판트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소 유약하게 생긴 얼굴 탓에 인상자체는 험상궂음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전투적인 의지로 가득 찬 두 눈만은 잘 닦아 놓은 칼날을 연상시키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태클타이밍을 노리고 있군?' MMA룰에는 무지하다고는 허나 소판트레이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쉬익…파파팟, 타탁! 어느 정도 대비하고있던 터였던지라 날렵하게 달려와 태클을 시도하는 우노의 1차 공격은 빠르게 옆으로 돌아 피해버리는 소판트레이의 기민한 몸놀림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호…이것 봐라?' 어디든지 신체의 일부분을 잡으며 그대로 연속공격으로 그라운드로 전환할 생각이었던 우노는 생각보다 소판트레이와의 접근거리가 많이 났음에 이맛살을 찡그리며 양어깨를 가볍게 들썩거렸다. 비록 한번의 공격밖에 해보지 않았지만 자신의 예상 이상으로 상대의 준비가 잘되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낀 것이다.

"펀치나 킥이 나올 때를 노려! 무릎 조심하고!" 소판트레이의 날카로운 타격을 의식한 탓인지 우노의 세컨은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휘익! 소판트레이의 로우킥이 우노의 안쪽 정강이를 노리고 힘차게 휘어 들어왔다. 순간 우노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활처럼 빠르게 소판트레이의 가슴팍을 향해 파고들었다. 킥을 피하기보다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가볍게 맞아주고 테이크다운을 들어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파팍! 우노의 정강이에 소판트레이의 로우킥이 빗겨 맞은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엉겨붙어 링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예상치 못한 우노의 저돌적인 반격에 소판트레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양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는 소판트레이였다.

'네놈이 무에타이를 대비했듯이 나 역시 너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소판트레이의 얇지만 근육투성이인 팔뚝은 우노의 목덜미를 깊숙이 점령하고 있었다. 초크(Choke)! 놀랍게도 소판트레이는 종합격투기 초보답지않게 초크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우노에게 무에타이 선수의 어설픈 초크가 성공할리 만무했다. 우노는 한쪽으로 몸을 비튼 자세로 간단하게 소판트레이의 기술을 무마시켜버렸다.

"그만!" 심판의 사인과 함께 두 사람은 다시 몸을 풀고, 처음의 스탠딩 상태로 전환했다. 대회룰에 따라 30초가 지나면 그라운드 자세를 해지해야만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잘 써먹을 수 있는 작전이 될 수도 있지만 구태여 따지자면 소판트레이에게 조금 더 유리한 규정이었다.

"……" 우노는 복싱의 아웃복서를 연상시키듯 연신 경쾌한 스탭을 밟으며 소판트레이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반면 소판트레이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만 번뜩거리며 그의 움직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무에타이 링에서처럼 마음놓고 공격을 하기에는 우노의 빠른 태클이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이킥은 생각조차 못하고, 미들킥을 한방 날리는 것도 지극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쉬익… 소판트레이의 미들킥이 나오기 무섭게 또다시 우노가 달려들었고, 둘은 다시 한참을 엉켰다가 심판의 30초 사인이 나서야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헉헉…" 예상 밖으로 방어를 잘해내는 소판트레이였지만 그 바람에 체력은 평소의 배 이상이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이것 봐라…' 우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할 따름이지만 그의 눈빛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라운드로 전환만 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의 반항이 뜻밖에 거셌기 때문이었다.

'안되겠다. 1라운드는 이렇게 넘겨야겠다' 생각을 바꿔먹은 우노는 경기 초반과 달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서있는 자세에서는 소판트레이의 공격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상대 역시 태클을 의식해서인지 로우킥 외에는 특별한 공격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우노는 한가지 공격만을 방어하면 되는 편안한 입장 속에서 1라운드를 마쳤다.

"저 태국놈… 대비를 상당히 많이 한 것 같군. 하지만 그라운드에 무지한 놈이 대비를 해봤자지. 잘 들어 상대는 지쳤어. 이제 시간 끌지 말고 한번에 끝내 버리는 거다" 세컨과 우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 받는 모습이었다.

땡!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2라운드의 공이 울렸다. 우노는 성큼성큼 소판트레이를 향해 과감하게 다가갔다. 1라운드 초반처럼 스탭같은 것도 밟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성큼 성큼이었다. '이 자식이!' 소판트레이의 로우킥이 득달같이 터져 나갔고 우노는 다리를 들어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흥!"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였다. 생각보다 다리에 닿는 로우킥의 위력이 약하다고 느낀 순간 소판트레이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무릎공격을 해댔다.

퍽퍽!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먹공격. 우노는 신속하게 가드를 올렸지만 소판트레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1라운드의 공방전으로 인해 체력도 많이 빠졌거니와 그와 같은 경기 양상이라면 승산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그냥 내 스타일대로 밀어붙이자!' 소판트레이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승부수를 던진 것은 소판트레이만이 아니었다. 소판트레이의 품에 깊숙이 달라붙은 우노는 양발로 그의 옆구리를 휘어 감았고 그 바람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려던 무릎과 주먹공격은 일순 주춤하고 말았다. 우노의 자세는 마치 소판트레이에게 앞쪽으로 업힌 듯 했다.

휘익… 그리고 이어진 우노의 동작은 소판트레이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양발로 소판트레이의 옆구리를 휘어 감은채 자신의 체중을 실어 뒤로 드러눕고 말았던 것. 주짓떼로들이 억지로라도 그라운드로 가기 위해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란 소판트레이는 우노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아래쪽을 택한 채 스스로 넘어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우노의 번개같은 공격은 소판트레이가 이후에 할 모든 상상의 자유를 빼앗아버렸다.

스르륵… 마치 그림자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듯 우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소판트레이의 등 쪽으로 몸을 이동시켰고, 어느새 말을 탄 듯한 자세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노의 팔뚝이 소판트레이의 목으로 깊숙이 들어가 조르는 순간, 승부는 거기서 끝이 났다. "크…크큭!" 고통을 견디다못한 소판트레이가 바로 기권의사를 표했고, 심판은 빠르게 경기를 중단시켰다. 2라운드, 그리고 19초가 흘러있었다.

이종대결 종합격투기 다이너마이트 2004년 명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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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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