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장좌리와 장도(항공촬영)
 장좌리와 장도(항공촬영)
ⓒ 완도군청

관련사진보기


음력으로 열이레 보름이 막 지났다. 물이 가장 많이 드는 여덟 물이다. 마을 앞 해안도로를 바닷물이 넘본다. 날씨는 따뜻하지만 바람 끝이 매섭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깨끗하다. 점심을 먹고 마을주민과 한 시간 이상 마을내력과 장섬(장도) 이야기를 나눴다. 장보고와 송징 이야기까지.

청해진 본영 장섬으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 아직도 두어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장섬은 장좌리 주민들이 고구마를 캐고 마늘을 심던 밭이었다. 한 바퀴를 도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섬, 민둥산 정상에 후박나무와 동백숲이 우거졌을 뿐이다. 이곳이 통일신라시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거점이라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옛날 장좌리 주민들은 장섬과 마을 사이 물길을 막아 고기를 잡았다. 수심이 낮고 물발(조류)이 좋은 장섬 일대는 완도에서 가장 일찍 김양식이 시작된 곳이다. 김 양식으로 인근 죽청리와 대야리 논을 가장 많이 부치기도 했다. 일찍부터 목포로 다수 유학생을 내보기도 했다. 지주식 김발은 쇠퇴하면 김 양식은 중단되었고 일부 석화양식가 미역양식, 낙지잡이(주낙), 바지락 양식을 하고 있다.

 장도 앞 갯벌은 양식어장으로 장좌리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다(감태를 뜬는 어민)
 장도 앞 갯벌은 양식어장으로 장좌리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다(감태를 뜬는 어민)
ⓒ 김준

관련사진보기


천년 '기억', '역사'가 되다

매서운 바람이 굴 밭을 스치고 장섬와 매단(장좌리 해송숲) 사이 갯골을 지나 신지대교로 달아났다. 몇 차례 바람이 불고 난 후 길이 열렸다. 길이 180m 폭 100m쯤 될까. 단숨에 갯벌을 지나 청해진시대 장섬에 들어섰다.

이곳에 군사 일만이 머물렀다. 장보고는 유년기  ‘궁복’, ‘궁파’로 불렸다. 활을 잘 쏘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젊은 시절 당나라 서주 무령군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워 30세(819년)에 군사 1천명을 지휘하는 군중소장이 되었다. 당시 중국 동해안에는 재당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선박제조 및 수리, 새운업, 목탄제조, 칼제조, 소금 등을 생산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재당 신라인은 중국 동해안은 물론 페르시아와 일본까지 잇는 무역상들이었다. 이 무렵 당의 지방통제력이 약회된 틈에 해적들이 기승을 부렸다. 특히 재당 신라인을 잡아 노비로 팔아 외교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귀국하여 신라 흥덕왕에게 해적을 막기 위해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흥덕왕은 거부로 성장한 장보고에게 서남해 지역 관활권을 승인해었다. 게다가 군사 1만과 대사라는 직함을 내려 내주었다. 그래서 장보고를 일컬어 ‘청해진대사’라 한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파격이었다.

청해진 터는 완도 장좌리 장도를 중심으로 대야리와 죽청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몇 차례 발굴로 장섬에서 토성과 우물, 자기편과 제기 등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섬 주변에서 열을 지어 박혀 있는 직경 30㎝ 안팎의 목책이 확인되어 청해진 본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 당시 여러 자료를 통해 완도는 물론 강진, 영암, 해남 등 서남해 일대는 ‘청해진 관할 섬’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이후 신라 왕위 계승에 휘말려 귀족 김양의 사주를 받은 염장에 의해 841년 암살당한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했던 해신 장보고는 이후 고려와 조선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정치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낙인찍히고 오직 민초들의 기억에 의존해 살아왔다.

 장도 장군당이 상당이라면 장좌리 당산나무는 하당이다. 상당에는 장보고를 신격으로 모시지만 마을에는 당산나무가 신격이다.
 장도 장군당이 상당이라면 장좌리 당산나무는 하당이다. 상당에는 장보고를 신격으로 모시지만 마을에는 당산나무가 신격이다.
ⓒ 김준

관련사진보기


 장좌리 주민들은 정월 보름 새벽에 장군당에 제를 올린다.
 장좌리 주민들은 정월 보름 새벽에 장군당에 제를 올린다.
ⓒ 완도군청

관련사진보기


‘기억’ 마을굿으로 꿈틀거린다 

장좌리 사람들은 정월보름 새벽 동이 트기 전 장섬에 오른다. 장보고와 청해진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마을제의를 위해서다. 매년 이 시간이면 물길이 열려 굿을 하면서 오를 수 있다. 정성스레 당제를 지내고 열두군물을 행한 후 배를 타고 내려온다.

배를 타고 마을로 돌아올 때는 해적을 물리치는 ‘전승락’, 청해진으로 환진하는 배굿 ‘선승락’ 등이 재현된다. 당집 장군당에는 장보고를 주신으로 정년과 혜일대사를 부신으로 모시고 있다. 정년과 혜일대사는 실존인물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송징장군을 주신으로 모셨었다. 삼별초 장군이었다고 알려진 송징은 인근 해적들을 소탕하고 약탈한 곡물을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나누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활을 잘 쏘았다는 송장군은 설화와 구전에서 장보고 특징과 일치한다. 그래서 마을주민들과 연구자들은 장섬에 모셔진 송장군은 장보고와 동일인물이라 추정한다.

이렇게 ‘기억된 역사’는 시대정신과 민초들 호명에 따라 재해석되어 등장한다. 최영장군, 임경업장군, 남이장군, 김덕령장군, 사도세자 등 정치권력에 의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은 무속과 민간신앙에서 신격화되어 등장한다. 장보고가 그렇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모셔졌던 송장군은 장보고로 변신해 마을을 넘어 지역문화, 해양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중심에 완도 장도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장보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