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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사무총장(42)은 김동석 소장과 함께 미국 내 한인유권자센터를 이끄는 실무 총괄 책임자이다. 초기부터 유권자운동에 참여했으며, 꾸준한 열정으로 지금의 한인유권자센터가 있도록 한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를 11월 중순 뉴욕 플러싱에 위치한 한인유권자센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인유권자센터의 활동 전반을 그로부터 세세히 전해 듣고 정리한 후 개인적 소회를 물었다.

"한인들, 뻔히 불이익 보이는데도 나서지 않아 안타까웠다"

 김동석 소장과 함께 유권자센터 초창기부터 활동하며 실무를 총괄하는 김동찬 사무총장
 김동석 소장과 함께 유권자센터 초창기부터 활동하며 실무를 총괄하는 김동찬 사무총장
ⓒ 김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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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미국에 왔나?
"1994년 27살이 되던 해 미국에 왔다. 대학 졸업(건대 화공과 85학번, 89년 건대 부총학생회장) 후 소프트웨어 회사를 다니다 미국에 와서 친척분이 운영하는 세탁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 처음 한인유권자센터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김동석 소장을 1995년에 만났다. 뉴욕의 젊은 한인들과 청년단체를 결성하고 뿌리교육, 한글학교, 풍물강습 등을 펼친 '한뜻 열린마당'의 일을 했다. 이런 활동이 한인사회 내부에서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정치력 신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이후 1996년 KAVC가 설립된 이후 계속 유권자센터의 일을 해왔고 수 년 전부터는 생업으로 하던 학원사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전업 활동가로 나섰다.

-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뭐라 해도 '위안부' 결의안 통과였다. 또 비자 면제 프로그램 서명 작업 역시 무척 보람된 일이었다.

- 가장 아쉽거나 힘든 일은?
"한인 내부에서 우리의 일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한인들이 뻔히 불이익을 당할 것이 눈에 보이는 데도 이에 대해 함께 대응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뒤늦게 심각성을 알고 부랴부랴 대책을 세워도 늦는 경우가 있다. '그린 카트(green cart)' 법안이라는 과일 노점상을 허용하는 뉴욕시의 법안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뉴욕시민의 과일섭취량을 늘려 건강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이 법안 통과되면 소규모 점포를 가진 대다수의 한인 청과상의 피해가 뻔히 보이는데도 청과상 협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우리와 연대하여 대응하려 하지 않았다. 뒤늦게야 함께 대응했고, 우리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이 같은 조치를 막아 내지 못했다. 아쉬운 기억이다."

- 앞으로 한인유권자센터의 활동계획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30년을 바라보고 이 일을 시작했다. 이제 절반쯤 온 것 같다. 그동안 쌓인 경험과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 한인과 한국의 국익 모두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향후 미국 내 타 한인단체들, 또는 타 지역의 단체들과 더욱 더 유대관계를 강화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영향력을 늘리고 한인들의 권익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본다. 또 한국의 국익과 관련된 부분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 미국 내 한인, 그리고 한국의 이해관계를 통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비자면제 프로그램 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많은 편의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관광업 등을 하는 한인사회에게도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 미국인이지만 모국의 이해관계가 분명 우리에게도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변호사로서 시민운동... 학풍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박제진 변호사(37)는 한인유권자센터에서 활동하는 한인 변호사이다. 그는 2004년부터 자원봉사자로서 한인유권자센터 일에 참여하고, 2006년에는 직업 활동가로서 유권자 운동과 본격적으로 결합했다. 한인유권자운동이 점차 전문성을 띄게 되면서 한인유권자센터 내부에서의 그의 역할은 날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어 사회공헌 및 시민운동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당당하고 좋았다는 박제진 변호사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어 사회공헌 및 시민운동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당당하고 좋았다는 박제진 변호사
ⓒ 김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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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국에서 왔는가?
"서른 살 때 유학을 왔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에 있다가 도미해서 로스쿨을 다녔고 이후 뉴욕뉴저지의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부모님은 아직 한국에 계시다."

-언제부터 한인유권자센터에서 활동했나?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일한 것은 2006년부터이다. 그 전에는 자원봉사자로 파트타임으로 도왔다. 뉴욕시립대(CUNY) 법대에서 커뮤니티 봉사 활동을 하던 중 김동찬 사무총장과 인연을 맺으면서 유권자센터 일에 참여했다."

- 변호사로서 이곳에서 일하는 결정을 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물론 언뜻 보면 그렇다. 다만 내가 졸업한 뉴욕시립대(CUNY) 법대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싶다. CUNY는 사실 진보적 전통이 살아 있는 학교이다. 그 해 졸업생이 '얼마나 월스트리트에 갔느냐?'가 아닌 '누가 얼마나 가치 있는, 어떤 시민봉사 단체에 갔느냐?'가 회자되는 학풍을 가졌다. 사회기여나 공익분야에 대한 진출이 많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졸업해 변호사를 획득한 상당수가 시민운동이나 인권분야에서 일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한인유권자센터에서 일하게 된 것은 별로 파격적 변신이 아니다."

-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역시 '위안부' 결의안이다. 사실 이곳 한인유권자센터에서도 전국적 규모의 캠페인은 최초였다. 사실 한인들이 미 전역에서 한 가지 목표로 결합한 적이 없었다. 당시 매일매일의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대응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정말 전쟁과 같았다. 로비력을 앞세운 일본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승리는 스스로에게도 충격이었고 값진 일이었다. 개미군단의 힘으로 거대한 자금줄을 가진 최강 수준의 로비력을 이긴 것이다."

- 한인유권자센터에서 하는 일은?
"주요업무는 한인들의 불편사항이나 차별대우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또 선거법을 연구하는데 교포들이 투표소에서 겪는 차별대우가 주관심 분야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투표권을 부여 받은 일을 당연시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역사적으로 투표권을 획득하는 것은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건국 초기에는 땅 가진 사람부터 한 집에 한 명씩 투표권을 행사했다. 여자와 흑인이 투표에 참여한 것도 그리 긴 역사는 아니며, 때로는 투표를 위해 단어시험을 보도록 했던 곳이 미국이다. 미국 사회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며 한인 유권자센터의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미국 내 한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력 신장을 도모하고, 미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꾸준히 부당한 처우나 차별과 싸울 때만이 자신의 권익을 모두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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