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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는 그를 둘러싼 모든 생각과 사물이 작품의 소재가 된다. 그가 주워들은 것, 본 것, 생각한 것, 그리고 상상한 것까지.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작가와 대화할 때 치부나 허물이 될 만한 이야기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작가가 그걸 기억해 두고 있다가 언제든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란 존재는 오로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써야 한다는 욕망으로 타오르는 생물이다. 물론 작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옳지 못한 일에 휘말리고, 문제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남의 허락도 맡지 않고, 누군가가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생각을 묵인한 채 작품 집필에만 몰두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권지예(봉인), 신경숙(딸기밭)의 경우 모두 그런 일환에서 생겨난 표절 논쟁이었다. 국내 문단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두 작가는 모두 한 때 남의 생각, 글을 가져다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다.(이인화, 박일문 등의 작가도 이런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그들의 문학사적 위치와는 별개로 분명히 호되게 비판받아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었다.

 

문제가 된 작가들은 그 이후로도 작품 활동을 계속 하고 있고, 특별한 법적 책임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신경숙 작가는 최근 신춘문예의 심사위원까지 맡는 등 여전히 그 영향력을 여실히 행사하는 중이다.

 

<혀> 표절 논쟁, 진실은 어디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조경란(현역 작가)과 주이란(작가 지망생)의 표절 논쟁은 그런 흐름의 연장선상처럼 느껴진다.

 

조경란은 2007년 11월 장편소설 <혀>를 펴냈다. 이에 주이란씨가 한 인터넷 신문을 통해 자신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작품을 조경란이 표절했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조 작가는 당시 신춘문예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고, 주이란은 그 공모에서 떨어진 바 있다. 주씨는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라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시놉시스, 그리고 결말 등이 너무나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2008년 9월에 문제가 됐던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공개했다.

 

반면 조경란의 책을 출판한 문학동네 측은 이미 오래 전에 작품 제목과 시놉시스를 확인하고 계약했기 때문에 표절은 말도 안 된다는 주장한다. 조경란 작가 본인은 미국에 체류 중이며, 조만간 한국으로 귀국하면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사건은 비단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다. 문단 권력의 횡포와 비주류 세력들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지금 이렇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조경란 작가는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불란서 안경원>으로 등단해 줄곧 작품을 발표하며 국내 문학의 대표주자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식빵 굽는 시간>을 비롯한 초기작들은 섬세한 감성으로 빛났고, 독자들은 그녀에게 주목했다.

 

나 또한 그녀 소설을 즐겨 읽는 애독자였다. 활동 초기 때는 어린 나이임에도 팬 카페 운영을 한 적도 있다. 가족과 사랑에 대해 조근조근 속삭이는 묘사와 표현들은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이후 큰 변화를 겪지 않았고, 계속 그 밀폐된 공간의 다락방에 천착해 있었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대화 한 번 하는데도 몇 십 페이지 이상이 소요됐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그 고통을 지나 발표한 장편 소설 <혀>는 그래서 누구나 흥미를 느낄 만한 작품이었다. 과연 어떤 장편을 냈을까, 어떤 변화를 겪었을지 궁금했다.

 

조경란의 <혀>는 오감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음식을 그저 주제 표현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삼던 몇몇 단편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장편에서 음식은 그 자체로 화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이 된다. 단아하면서도 자료 조사, 취재에 충실한 끈기와 노력이 느껴진다. 모범생 소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텍스트가 너무 빡빡해 가독성이 떨어지고, 전개 또한 지지부진하고 구태의연했다. 요리사가 주인공인데다 음식과 더불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들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많아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사랑하는, 맛보는, 거짓말하는 혀!'라는 상징은 분명히 매력적이었지만.

 

반면 주이란이 공격적으로 펴낸 단편집의 표제작 <혀>는 꿈틀거리는 생물이다. 분명히 그녀의 소설은 거칠고 성긴 느낌이 난다. 몇몇 묘사들은 깊이가 부족하다. 특히 수록작 <촛불소녀>에 대한 실망감은 컸다. 표절 논란을 그대로 소설로 만들어 거대권력과 싸우고 있음을 항변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로지 메시지로만 움직이고 있으며,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저 배설하는 에세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리 책 뒤 에세이나 작가의 말 정도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혀>라는 작품을 놓고 봤을 때 일면 재능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밀어붙이는 뚝심이 상당하고,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기대가 되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같은 제목('혀')의 두 작품은 스타일이 다르긴 하나, 혀를 다룬 아이디어는 분명히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게다가 조경란 작가가 주씨가 응모한 신춘문예의 심사위원이었다는 점은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섣부른 해석은 금물이지만, 공개된 자료나 정보만 놓고 봐서는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한 쪽은 너무 뜨겁지만, 다른 한 쪽은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침묵의 동맹, 거대 권력의 탐욕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차갑게 입을 닫는다. 어쨌든 패를 쥐고 있는 건 그들이다. 침묵하면 비판은 언젠가 수그러들기 마련이고, 그들은 연줄, 학연에 묶여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문예창작과 교수는 소설가였다. 그는 석사 출신이었고, 타 대학에 강사를 다니며 박사 준비를 했다. 그가 박사가 됐을 때 화제가 된 것은 바로 논문이 아닌 장편소설로 학위를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 학위를 인정해준 교수 명단에는 모두 익숙한 이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동문이거나 친한 문인이거나. 지금 생각해 봐도 이는 참 기이한 일이다. 장편소설 한 편으로 덥석 박사를 준 것도 그렇지만, 심사한 위원들이 모두 몰려다니던 사람들 중 일부였다니.

 

거대출판사와 동문(지연과 학연)으로 얼룩진 거대권력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단의 현실이다. 권성우나 이명원 같은 비평가들이 2000년대 초 왕따를 당한 것도 바로 이 권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차갑게 외면당한 탓이 크다. 대중들은 여전히 한국문학과 거리감을 느끼고 있고, 그저 고매한 엘리트들의 전유물로만 여기고 있는데도 그들은 좀처럼 그 간격을 좁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리 지킬 것 다 지키고, 얻을 것은 다 얻어가면서 희망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현역 작가나 교수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유명신문사의 신춘문예나 거대 출판사의 신인상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등단하지 말라고. 지방지나 이름이 덜 알려진 곳에서 등단을 하면 어차피 중앙으로의 진출을 하기 위해 한 번 더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춘문예, 신인상이라도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유명 심사위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지방지라면 등단을 해도 애당초 이름을 알리는 것은 포기하는 게 상책이다. 실제 문단 상황이 그렇다.

 

문단을 알기 전에 문학은 열린 가능성이었고, 짜릿한 흥분이었다. 하지만 비판세력을 거세게 밀어내고 자기들끼리만 뭉쳐 공동체로 똘똘 뭉치는 이 문단은 이제 그저 권력이 되었을 뿐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쉽게 국내문학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영상시대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변명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는데, 무리지은 사람들은 고작 자기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있다.

 

뛰어난 상상력과 가능성을 지닌 작가지망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문단이 고리타분하게 본 것만 보고, 먹을 것만 먹으면서 사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망생들은 차츰 문학에 대한 애정을 버리게 마련. 실제 국내소설 애독자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상상력이 뛰어나고 정말 글발 좋은 친구들은 작가 안 해요. 다른 거 하지. 대신에 문창과 출신의 기술자들만이 국내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조경란-주이란 표절 논쟁에 대해 조중동을 비롯한 거대언론과 유명출판사들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조선일보>는 조경란 작가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고, <동아일보>는 그녀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다들 권력을 가진 작가 건드려서 좋을 것 없으니 몸 사려야 한다는 분위기다. 시리도록 차가운 반응이다. 한 쪽은 크게 타오르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묵묵부답이다.

 

이 논쟁의 끝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인작가의 돈벌이 수단일 수도, 기성작가의 부끄러운 아이디어 도용일 수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아직 한 쪽은 입조차 열지 않았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 하기야, 국내 정치도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 작년 대선 당시에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싼 그 많은 의혹과 비판에도 한나라당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대선에 서 유리한 고지를 잡자 그들은 모든 의혹에서 벗어났다. 모두가 이명박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대통령 될 사람이니 몸을 좀 사리고자 했던 것일까.

 

너무 많은 제약과 장애물을 설치해놓은 국내 문단은 엇비슷한 기성복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수많은 등단작을 살펴보라.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만한, 밋밋하고 식상한 작품들이 무작위로 양산된다. 대중들은 이런 작품들에는 관심이 없다. 국내 문단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싶다면, 더 많은 소통을 원한다면 이 점을 지각하고 개선하는데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조경란 지음, 문학동네(2007)


태그:#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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