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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서 만난 갈대밭
▲ 갈대밭 한강에서 만난 갈대밭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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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노래를 안 부르고 살았다. 삶이 그렇게 팍팍했던가 싶어 흠칫 놀랄 정도로 나는 노래를 잊고 살았다. 노래를 잊고 살다가도 가을이면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 흥얼거리게 된다. 서유석의 노래로 알려진 '사모하는 마음'이다.

그림자 지고 별 반짝이면
더욱 그리운 나의 마음
세상 사람이 뭐라 해도
그대 없이 난 못살겠네

사모하는 나의 마음
그대에게 보여 주고
애태우는 나의 심정
그대에게 밝혀주리
우 아야~~ 우~~ 우 아야~~우~~~

출렁거리던 바닷물 소리
멀리멀리 사라지고
잠 못 이루어 지새운 밤
동녘 하늘이 밝아오네

사모하는 나의 마음
그대에게 보여주고
애태우는 나의 심정
그대에게 밝혀주리
우 아야~~우~~~우 아야~~ 우~~~

그때가 20년도 훨씬 지난 옛날이 되어 버렸다. 영상으로 남은 또렷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데.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죽도록 사랑한 이성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고 고교때 선생님이 그분이다. 그리고 여자 선생님이다.

국어 선생님이신 그분과의 인연은 선생님이 첫 수업에 들어온 그날에 시작되었다. 어쩐 일인지 선생님은 입학식이 훨씬 지나고 학기가 시작되는 중간에 투입(?) 되어 오셨다. 오셔서 첫 수업시간에 다짜고짜 칠판에 시를 한수 적으셨다.

시 제목도 생각이 잘 안 나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온 선생님이 어쩐지 참 맘에 들었다. 대체로 선생님들이란 칠판에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부터 적지 않으셨던가. 첫 인상에 단번에 좋아진 선생님께 나는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몇 줄 몇 행의 저 의미는 무엇인지요?"

다행히 선생님은 그런 나의 질문을 흡족하게 여기신 것 같았다. 평소에 질문하는 일이 잘 없었던 나의 태도로 보아 굉장히 특이한 경우였는데 그 일이 선생님에게 잊을 수 없는 첫 제자로 각인하기에 충분한 사건(?) 이었다. 부디 학생들은 선생님께 많은 질문을 던지시라.

나는 선생님이 좋았지만 어떻게 드러내 놓고 선생님께 다가갈  성격이 못되었다. 그런 나는 어느날 아침 등교길에서 선생님과 함께 학교 언덕을 오르게 되었지만 고개만 까닥하고 후닥닥 달려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일 이후, 선생님은 '새침떼기'란 별명으로 나를 부르셨고 선생님과의 인연은 조금씩 그 실타래를 엮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같으면 그럴 여유가 있으려나 싶은데 가끔씩 점심 시간이면 선생님과 교정의 벤치에서 앉아 음료수를 마시곤 했다. 봄과 여름사이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등나무 벤치는 교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놓여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그 장소를 참 좋아하시지 않았나 싶은게 언젠가 결혼을 앞두고 선생님을 찾아 갔을 때도 역시 그곳으로 나를 안내하셨다. 그때는 음료수가 아닌 커피를 나눠 마셨다. 

학교 방송실에서는 올드팝송을 들려주곤 했다. 벤치에 앉아 선생님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I went to your wedding' 이니 'tenessy waltz'며 당시에 한창 좋아했던'F.RDavid의 'words'가 흐르곤 했다. 대화 중간에 흐르는 음악을 주제로 말들이 오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의 진로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던 것 같다.

적어도 그 시간 만큼은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내려놓으셨던 것 같다. 인생을 한발 먼저 앞서간 선배로서의 조언이나 격려의 말씀을 들려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 이외에도 선생님과의 친분을 과시한 다른 반 친구들이 몇명 있었는가 보았다. 선생님을 매개로 만나게 된 진이와 혜심와는 곧잘 어울렸다.

갈대를 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 갈대 갈대를 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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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친구들 얘기를 들려 주고 그 친구들한테는 내 얘기를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선생님은 우리 셋을 선생님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여름과 가을 사이 어느날 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의 영상에 황금빛 들판이 출렁이던 걸로 보아 가을이 조금씩 깊어가는 때가 맞을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아랫층엔 선생님 부모님이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셨고 이층이 살림집이었던 모양이다. 기타가 있었고, 피아노가 있었던 걸로 보아 선생님은 무척이나 음악을 좋아하신 분이었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손수 끓여주신 수제비로 점심을 맛나게 먹고 나서 선생님은 트윈폴리오의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 놓으셨다.

웨딩케익, 하얀손수건...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후 나도 좋아하게 된 트윈폴리오의 엘피판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걸로 보아 그때 들었던 그 노래들이 참 좋았던가 보다. 점심시간에 교정에서 선생님과 함께 듣던 올드팝송과 번안가요로 인기를 끌었던 트윈폴리오의 노래들도 잊히지 않지만 '사모하는 마음'이야 말로 이 가을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가장 오래 각인하게 해 주는 노래로 기억된다.

선생님 댁을 찾아갔던 그날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여행을 제안했다. 우리에겐 갑작스런 제안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미리 계획을 하지 않으셨던가 싶다.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따라 영암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달렸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옆에 앉은 친구랑 어깨가 자주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재밌어하며 깔깔댔던가. 비포장길 양옆으로 무화과가 익어가는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창문을 통해 들어온 오후의 따가운 햇살은 바닷가 근처 아무데서나 내린 우리를 따라 왔다.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언덕 마루엔 온통 무화과 과수원이 들어차 있었고 마주보이는 바다쪽 들판엔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계단식으로 빼곡히 들어선 다랑이 논이 끝나는 곳엔 바다와 경계를 이루며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익어가는 벼와 막 피어나는 갈대꽃에 부드럽게 비춰들었다. 때문에 주변이 온통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잔잔하게 출렁거리는 바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초가을의 황금빛 들판 속에서 앞서가는 선생님 뒤를 따르는 우리는 많이 웃고 많이 떠들었다. 아마도 잘 익은 낟알을 훔쳐 먹으러 날아든 참새들도 놀라 도망가지 않았을까.

우리는 생각지도 않게 들어선 가을 들판에서 맘껏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묵묵히 앞서가던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시는 것도 떠드느라 우린 몰랐을 정도였다. '그림자 지고 별 반짝이면...' 선생님의 노래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노래 였다. '이 노래 들어 봤지?' 들어는 보았는데 가사를 모르니 함께 부를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선창 할테니 따라해라, 그림자 지고 별 반짝이면..."
한 소절 한 소절 노래를 따라 부르며 벼가 익어가는 논둑길을 걸었다.
"사모하는 나의 마음 그대 에게 보여주고, 애태우는 나의 심정 그대에게 밝혀주리, 우 아야~ 우우우우우, 우 아야~~ 우우우우."

어느 순간 우리의 국어 선생님은  음악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가을 들판에서 부르는 사랑노래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잘 어울렸다. 선생님 덕분에 가을이면 나는 '가을'이라는 단어 하나 안 들어가고 가을 분위기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 이 노래를 생각한다. 가만 생각하면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이 가을이면 더 깊어질 듯도 하다. 굳이 가을과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건전가요를 연결시키니 그때의 그 선생님과 친구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출렁거리던 바닷물 소리/멀리 멀리 사라지고...'

출렁거리던 바닷물 소리는 내내 따라왔다. 시외버스를 타고 왔으나 갈때는 배를 타고 가자는 낭만적인 제안을 선생님이 하셨다. 들판과 갈대무리에 스며들던 가을 햇살이 서서히 저녁 어스름 속으로 묻혀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놀이 번져가는 하늘에서 샛별이 돋아 나고 머지 않아 어둠이 짙어갈 수록 별들이 하나둘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멀리 항구의 불빛까지 더해져 밤으로 향해가는 바다는 빛으로 출렁 거렸다. 지상의 모든 빛들이 바다에 와서 일렁거리는 모습을 뱃전에 서서 바라보며 우리는 조금 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노래를 흥얼 거렸다.

'그림자 지고 별 반짝이면 더욱 그리운 나의 마음...'

덧붙이는 글 | 가을이면 생각나는 사람과, '나의 가을 노래' 입니다.



태그:#사모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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