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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는 부위별로 맛이 다르다. 가운데 배를 받쳐 준다고 해서 '배받이살', 왼쪽 위 뒤집어 놓은 배받이 살, 위쪽 두점 밖에 안 나오는  '볼테기살', 오른쪽 '아가미살', 왼쪽 아래 '부레', 아래 민어살.
 민어회는 부위별로 맛이 다르다. 가운데 배를 받쳐 준다고 해서 '배받이살', 왼쪽 위 뒤집어 놓은 배받이 살, 위쪽 두점 밖에 안 나오는 '볼테기살', 오른쪽 '아가미살', 왼쪽 아래 '부레', 아래 민어살.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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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놈은 길이가 4~5척에 이른다. 3년 이상 자란 놈은 크기가 1m 이상으로 수십 명이 복달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민어(民魚)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민어는 큰 맘 먹고 가족이 모이고, 친구가 만나 여름철에 잡는다. 그래서 온 백성의 사랑을 받는 '민'자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속칭 '국민물고기'인 셈이다.

민어가 제철을 맞았다. 전라도 사람들은 민어보다는 '민에(애)'라 해야 친숙하다. 지역에 따라 '통치' '개우치' '보굴치'라 했다. 암컷 내장을 꺼내고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을 '암치'라고도 했다. 민어는 서해와 남해·동중국해에서 서식하며, 가을에 제주도 남쪽에서 월동하다 봄이 되면 북서쪽으로 올라와  7~9월 임자도 인근 재원도 허사도 일대에서 알을 낳는다.

주낙으로 잡은 살아 있는 민어(신안 송도 어판장)
 주낙으로 잡은 살아 있는 민어(신안 송도 어판장)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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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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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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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부레'
 민어 '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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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 껍질
 민어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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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탕
 민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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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보양식의 으뜸 '민어'

남도에서는 민어를 회로 먹지만, 서울에서는 삼복더위에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하는 풍습이 있다. 요즘에는 보관시설들이 발달해서 회를 먹어도 상관없지만, 옛날에는 여름철 선어로 탈없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생선이었다. 그것도 산지에서나 가능했다.

식도락가들이 목포나 신안 임자도를 찾아 여름철 민어회를 주문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양반들은 민어회보다는 민어탕이나 민어찜을 즐겼다. 삼복더위에 양반은 민어 먹고 상놈은 보신탕을 먹었다던가. 민어가 고급음식임엔 틀림없다. 지금도 비싸다.

한방에서 민어는 개위, 즉 위장을 열고 하방광수 방광에 있는 수기를 내린다고 했다. 즉 배뇨를 도와준다는 뜻이다. 민어부레를 원료로 만든 아교주(아교를 잘게 썰어 구슬 모양으로 만든 약)는 허약과 피로를 치료하고, 이유 없이 몸이 여위는 것을 보하고 해소와 코피가 나는 증상을 다스린다고 했다. 이쯤이면 여름철 보양식으로 민어가 으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민어는 생선회는 말할 것도 없고, 어란을 만드는 알, 쫄깃쫄깃 고소한 부레(풀), 담백하고 고소한 뱃살, 다져서 나오는 갈비살·날껍질에 밥 싸먹다 논 팔았다는 '민어껍질', 홍어애탕과 함께 '탕 중 탕'이라는 민어탕 등 20여 가지 요리가 가능하다. 비늘 말고 버릴 것이 없다. 특히 탕에는 부레가 생명이다. 홍어애국에 애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듯 민어탕에도 부레가 들어가야 한다.

생선회는 재료 못지 않게 누가 칼질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증도선착장에서 특산물 코너를 운영하며 식당을 겸하고 있는 최미선(51, 증도 화도출신, 화도는 '고맙습니다' 촬영지임)
 생선회는 재료 못지 않게 누가 칼질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증도선착장에서 특산물 코너를 운영하며 식당을 겸하고 있는 최미선(51, 증도 화도출신, 화도는 '고맙습니다' 촬영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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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를 먹는다는 말에 열 일 제쳐두고 달려온 '식객' 김종덕교수(경남대학교 인문대 학장).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슬로푸드를 소개한 '로컬푸드 전도사'다.
 민어회를 먹는다는 말에 열 일 제쳐두고 달려온 '식객' 김종덕교수(경남대학교 인문대 학장).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슬로푸드를 소개한 '로컬푸드 전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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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가 여름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음식만 아니다. 고려시대 중국 교역품으로 소개된 합죽선 '고려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재료였다.

민어 부레를 말린 뒤 끓여 풀을 만들어 합죽선 부채살과 갓대를 붙일 때 이용했다. 대나무나 목재에 접착력이 뛰어난 민어 부레풀은 천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옻칠 간 데 민어 부레 간다'고 했다. 강강술래에 '이 풀 저 풀 다 둘러도 민애 풀 따로 없네'라는 매김소리도 있다. 그래서 '민어가 천냥이면 부레가 구백냥'이라 했다.

민어의 본고장 임자 '타리섬'

민어그물을 손질하는 신안 임자도 하우리 어민. 마을 뒤쪽 해수욕장(대광해수욕장) 너머에 '타리섬'이 있다. 일제강점기 '타리민어'로 알려진 이곳은 민어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민어그물을 손질하는 신안 임자도 하우리 어민. 마을 뒤쪽 해수욕장(대광해수욕장) 너머에 '타리섬'이 있다. 일제강점기 '타리민어'로 알려진 이곳은 민어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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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어장은 서해와 남해에 고루 형성됐다. 특히 태이도(신안군 임자면 타리섬) 일대는 일제강점기 민어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낚시·주목망·중선망을 이용해 잡은 민어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됐다. 타리섬 인근에 일본 상고선이 떠있다 어민들이 잡아온 민어를 얼음과 함께 보관해 본국으로 가져갔다. 인근 백사장에는 민어철이 되면 파시가 형성되었다.

1925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파시가 서면 이엉을 두른 가구가 수백 호(뜸집)가 생기며, 어부 수천 명 외에도 놀러 온 사람이 50~60명'이라 했다. 음식점이 90집, 요리점이 15곳, 잡화상·이발소·경찰서까지 있었다. 요리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기생이 130여 명에 이르렀다. 남사당패들이 난장을 펼치기도 했다. 일본인 횡포에 저항해 수십 명의 조선기생들이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인들 중에는 '타리민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안 임자도나 지도 송도어판장에서 물 좋은 민어를 구할 수 있다. 봄 도다리, 여름 민어, 가을 전어, 겨울 숭어라 했다. 민어찜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삼품이라 했다. 살아서 민어 '복달임'을 못하면 제사상에서라도 맛을 봐야 한다. 민어가 '民魚'인 이유가 있다.  오늘이 말복이다. 여름 '민어'로 남도에서 벗들과 '좋은 만남'을 계획하면 어떨까. 가을전어를 기다리며.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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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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