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사유의 전유물만이 영화가 아니다. 개인의 장난감 놀이를 공유하는 것이 영화가 될 수 있다고 김지운 감독의 장난감, <놈놈놈>이 자유롭고 능청스런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이 놀이를 이끌어 나가는 캐릭터다. 이렇게 타이틀부터가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잔치가 될 것만 같았던 <놈놈놈>은 기대한 것보다 캐릭터가 부실하다.

 

'좋은 놈'보고 '선한 놈' 없다고, 분명히 있어야 할 정의의 사도가 도대체 어디 갔냐는 둥 착각 속에서 분통 터뜨리지 마라. 선하다 한 적 없다. 그냥 총 솜씨가 '좋은' 놈이다. 이제부터가 조금 애매하다. '나쁜 놈'이 있다는데, 대립되는 선한 놈이 없어 나쁘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그나마 '이상한 놈'은 좀 이상하긴 하더라. 그것도 웃긴 놈이 더 어울린다.

 

제목은 일부이든 전반이든 그 영화를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거나 알레고리 혹은 상징이어야 한다. '놈/놈/놈'이라는 세 캐릭터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타이틀이라 각각의 속성을 이런 식으로 구별해주는 게 흥미롭긴 하나, 약간의 어긋난 핀트는 아쉽다.

 

 화려한 비주얼에다 총 솜씨까지 '좋은' 놈, 정우성

화려한 비주얼에다 총 솜씨까지 '좋은' 놈, 정우성 ⓒ 영화사그림㈜

 

그러나 <놈놈놈>의 본질은 유희와 스타일이다. 극히 기본적인 설정과 플롯으로 최소화시켜놓고, 나머지는 넓은 여백 위에서 거침없이 그리는 현란한 액션과 자유로운 움직임들이다. 과잉된 스타일리시는 정우성, 이병헌, 송강호라는 큰 그릇의 배우와 만나 '과잉'의 단점을 뛰어넘으며 폭발적인 에너지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화려한 동적 이미지들을 보여주며 살아 숨 쉬게 된다.

 

유희 정신이 가득한 <놈놈놈>은 죽도록 고생하는 배우들과 스태프의 모습이 보이면서도 그 너머로 '얼쑤얼쑤' 하며 신나게 놀아버리는 놀이판의 모습도 동시에 보인다. 바로 그 위에서 김지운 감독은 제대로 놀 줄 알기에 늘 변화하고 앞서나갈 수 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과 같은 그의 초기작들은 아기자기한 플롯과 꽉 채워진 스토리로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었다. 그러나 이후의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놈놈놈>까지 넘어오며 내러티브보다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으로 점철된 형식미에 더 치중했다. 이것은 실속 없는 껍데기가 아니다.

 
 엄청난 독기와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나쁜 놈, 이병헌

엄청난 독기와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나쁜 놈, 이병헌 ⓒ 영화사그림㈜

 

갈수록 자유로워진다. 여기저기 영향을 많이 받아 그만큼 따온 것들도 많다는 <놈놈놈>이지만, 자유로움과 '놀아보자' 정신은 웨스턴 무비의 '한국판'이라고 하는 것이 무색하지 않게 또 하나의 독창적인 작품이 나왔음을 설명하기 힘들 만큼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그만의 스타일로 보여준다.   

 

정우성은 역시나 비주얼이다. 멋있다. 송강호 또한 여전하다. 기존의 캐릭터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단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단순한 반면 몸뚱이는 워낙 큰 <놈놈놈>이라 자칫하면 지루해지기 쉬운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감칠맛 나는 연기와 특유의 대사로 뻥하고 웃음을 터뜨려준다.

 

그래서 '이상한 놈'은, 튼실한 내러티브 영화를 거부하는 <놈놈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캐릭터다. 이병헌은 카리스마가 철철 흘러넘친다. 기존의 섬세한 연기가 찾아보기 힘들어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무한대의 독기를 뿜어내는 그의 포스는 아주 그냥 끝내준다.

 

 이상하게 웃긴 이상한 놈, 송강호

이상하게 웃긴 이상한 놈, 송강호 ⓒ 영화사그림㈜

 

한국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 멋대로 놀 줄 아는 감독의 앞날이 창창하다. 삶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진정성의 영화가 시공간을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한바탕 확실하고 질펀하게 노는 영화도 필요하다.

 

물론 놀 거면 브레이크 적당히 밟고 제대로 놀아야 한다. 노는 영화도 생명력이 있다.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이런 영화 속, 불온함과 잡종기질의 원형은 끝없이 진보할 또 다른 영화들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대통(大通), 크게 통하다(http://paper.cyworld.com/BigGat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7.21 14:28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대통(大通), 크게 통하다(http://paper.cyworld.com/BigGat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놈놈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