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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치'가 브랜드 김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족 맛'은 '외식 맛'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손맛 가짓수는 줄어드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인간미(人間味)에 대한 그리움도 커지고 있다. 꺼벙이, 고인돌, 맹꽁이 서당 등 추억의 만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은 현상도 그 중 한 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만화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인간미의 소중함을 재확인하고, '맛'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하는 기획시리즈 '만화미(味)담 오미공감'을 마련했다.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말]
이정문 선생이 그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정문 선생이 그린 자신의 어린 시절
ⓒ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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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제트와 '맞짱' 떴던 전설적인 토종 로봇 '철인 캉타우'가 당당하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던 어린이잡지 <새소년>만 얼핏 봐도 백 권이 넘는다. 만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낚시 동호회 '심수회' 선생들의 사진과 '벽화' 또한 어제 마냥 생생하다. 지난 14일,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타임머신'에 탑승했다.

이정문(67) 선생 작업실, 만화 역사관이 따로 없었다. 선생의 1959년 데뷔작 '심술첨지' 4컷은 물론, <스포츠서울>을 통해 처음 등장한 '심술통'의 1985년 당시 인쇄 동판까지 액자 안에 고이 모셔 있었다. 작품 활동 기록이라면 하나도 버리지 않은 듯했다. 아니,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선생이 만화가로 등단하기까지 과정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다.

12살 소년 가장, 만화에 미치다

선생은 1941년 일본 고베에서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화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이 귀국을 결정한 1944년, 선생 가족은 서울 효자동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비교적 유복했던 집안 형편은 6·25 전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정문 선생
 이정문 선생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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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양화점을 정리하러 갔던 아버지의 귀국길은 전쟁통에 막혀버렸다. 당장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선생에게 돌아왔다.

장남인 '형'의 학업까지 포기하게 할 순 없었고,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 때문이라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뽑기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한 번은 문구점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 때를 선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1년에 딱 이틀, 추석과 설날만 놀았어요. 그런데 주인은 더 하니, 원… 그 양반은 노는 날이 아예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노동 강도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통금까지 근무했다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매일 새벽 2시까지 만화를 그렸어요. 완전히 만화에 미쳤었지."

'이정문표 심술' 태생은 '약한 자에게 강한 사회'

글을 깨치면서부터 좋아했던 만화였다. 막연했던 만화가의 꿈은 팍팍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또렷해졌다. "밤마다 미친 듯이 습작"을 거듭했고, 자신의 '분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1959년 3대 대중잡지 중 하나였던 <아리랑> 신인만화가 공모에 당당히 입선한다. 그때 나이 겨우 열 여덟 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술가족 최초 캐릭터 '심술첨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 왜 하필 심술이었습니까.
"그 때 구두닦이… 누가 사람 취급해 줍니까. 사회 가장 밑바닥 신세잖아요. 온갖 수모를 당했어요. 그럼 당한 사람 '욱'하게 마련이잖아요. 놀부가 떠오르더라고. 그런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서 심술이라도 부렸으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당했던 걸 만화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심술을 제대로 부린다"는 것을 알기 어린 나이에, 선생은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는지 몰랐다. 비교적 유복한 형편에서 바닥까지 추락했기에, 약한 자들의 설움이 더욱 뼛속 깊이 새겨졌을 수 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한 자'들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이 소년에게는 만화밖에 없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회', '이정문표 심술'의 태생이었다.

이순자씨의 '턱', 심술턱이 심술통 된 사연

1985년 당시 심술통 스케치
 1985년 당시 심술통 스케치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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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에피소드도 나온다. 최고권력자 부인 생김새 때문에 만화 캐릭터 이름이 바뀐 이야기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이던 1985년, <스포츠서울> 창간 소식이 들리던 어느 날이었다. 선생은 당시 이상우 편집국장(일간스포츠, 스포츠투데이, 굿데이 사장 역임, 훗날 스포츠신문의 '미다스의 손'이라 불린 인물이다)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정문표 심술'을 싣고 싶다는 제의였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데 전력투구했어요. 그래서 처음 붙인 이름이 '심술턱'이었습니다. 왜 심술이 턱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고 했으니까,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붙였죠. 그리고 작품을 들고 가서 이상우 국장을 만났는데, 턱으로 청와대 쪽을 가리키면서, 누굴 죽이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는 거예요.

왜 그 때, 이순자 여사가 턱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잖아요. 그 때문에 코미디언 심철호씨가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고. 게다가 <서울신문>은 당시 거의 기관지 수준이었잖아요. 놀랄 만도 했지. 그런데 나는 이순자 여사,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렸다니까(웃음). 그랬다면 심술턱이라고 했겠나. 그래서 바뀐 이름이 심술통입니다."

- '전두환 배우'로 통하는 탤런트 박용식씨는 단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출연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술통으로 인해 그 외 작품 활동에 지장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저는 작품활동만 했고, 나머지는 이상우 국장이 다 알아서 했으니까.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 때는 또 내 만화가 판토마임 형식이었잖아요. 어떻게 씹으려면 글이 들어가야 하는데, '말풍선' 자체가 없었으니 뭐…새로운 포맷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원래부터 말풍선을 넣지 않았거든요. 정치적인 내용은 일체 다루지 않았고, 또 다룰 수도 없었구요."

심술통의 압정도 진화하고 있다. 문화커뮤니티 상상마당(sangsangmadang.com)에 연재됐던 '심술천재 심술통'의 한 장면
 심술통의 압정도 진화하고 있다. 문화커뮤니티 상상마당(sangsangmadang.com)에 연재됐던 '심술천재 심술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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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즘 내가 승질 나서 부글부글 끓어"

그 대신 선생을 속상하게 만든 것은 '비교육적'이란 딱지였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사회일수록 '심술'에 인색하기 마련이다. "비교육적인 것 아니냐, 애들이 보고 배우게 이따위 나쁜 짓이나 그리고 앉았냐는 말들이 많았다"면서 선생은 이렇게 반박했다.


"아니, 누구나 다 심술 있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탁자를 치면서) 어른들만 스트레스 쌓이고, 어린이들은 그런 게 없나? 반에서 힘깨나 쓴다고 으스대는 놈들 때문이라도 스트레스 쌓이지.  그런 놈들은 다 내 밥이야. 여자 아이 못살게 구는 골목대장 같은 놈들은 심쑥이가 그냥 놔두지 않지. 그런 걸 보면서 속시원해 하고, 통쾌함을 느끼는 거고…


요즘은 잘 쓰지 않는데, 압정(심술 가족의 주요 '응징' 도구)을 꼭 등장시키는 경우가 있어요. 정치인들이나 뇌물 먹은 공무원들한테는 꼭 쓰죠. 공개적으로 기분 나쁘게 하는 놈들 있잖아요. 세금으로 해외 여행 가는 놈들한테는 수건을 줍니다. 눈병 나는 약을 잔뜩 묻혀다가(웃음). 비분강개하자는 이야기 아닙니다. 심술거리가 된다는 말이죠."

- 심술거리가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심술통이 실업자가 돼야 하는 세상이 와야 하는데 왜 그렇게 건수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손 볼 곳이 너무 많아. 요새 잠깐 쉬고 있으려니까 근질근질해요. 독도 문제 또 터졌잖아요. 정말 내가 요즘 승~질 나서 부글부글 끓어(웃음)."

덧붙이는 글 | '악동이' 이희재 만화가와의 인연을 소개하는 이정문 선생의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만화, #이정문, #심술, #이순자,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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