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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는 모처럼 산책에 나섰다. 그의 손에는 겨울 동안 연구한 것을 요약 정리한 두꺼운 노트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풍광 좋은 곳에 가서 앉아 봄을 누리며 그간의 공부를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살구꽃과 진달래가 절정으로 피어 있었다. 뻐꾸기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그는 마을 어른을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어른들은 김영세보다 더 공손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폈던 허리를 다시 숙였다.

김영세의 고향 고창은 유달리 봄이 좋은 고장이라고들 했다. 곳곳마다 수없이 핀 꽃들은 하나가 지기 무섭게 다른 하나가 피어나면서 봄의 한가운데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영산홍과 동백꽃을 좋아했다.

꽃 말고도 고창의 봄은 초원처럼 널리 펼쳐 있는 푸른 보리밭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영세는 보리밭 가까이로 다가가 보았다. 사람의 종아리만큼 자란 보리들에는 싱싱한 물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열매가 영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보릿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어린 시절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세상사를 잊은 양 보리밭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얼마 후 김영세는 하얀 벚꽃 잎이 무수하게 낙화하는 도솔천 계곡 길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꽃잎은 그의 어깨는 물론 눈썹에까지 지고 있었다. 흘러가는 계곡 물에도 하얀 꽃잎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선운사가 가까워지자 길이 넓어지면서 벚나무 대신 팽나무와 떡갈나무가 길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서 돋고 있는 연둣빛 새순을 눈 여겨 보았다.

선운사에서

선운사 경내는 온통 꽃밭이나 진배없었다. 그는 만세루와 지장보살조상을 살핀 후 대웅전을 끼고 돌며 걸어 올랐다. 그곳에서는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다음으로 김영세가 한 시간 남짓 걸어 올라가 다다른 곳은 도솔암이었다. 그는 암자의 토방에 앉았다. 사찰과 인근 경치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었다. 나이가 지긋 들어 보이는 스님이 그에게 합장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 동승이 소쿠리를 안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아마도 노승이 시킨 것 같았다. 소쿠리에는 자줏빛 보리수 열매가 반쯤 담아져 있었다. 그는 손으로 반 움큼 정도를 집었다. 동승은 더 집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김영세는 왼손을 쫙 펴서 크게 만들더니 아주 조금만 집었다. 동승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김영세는 노트를 꺼내 무릎에다 펼쳤다. 한국 계몽주의자들은 몇 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하나같이 사회진화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가 시간과 함께 발전한다는 스펜서의 사회유기체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세상에는 미개화한 나라와 반개화한 나라와 개화한 나라의 3등급이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은 반개화, 서양은 개화한 나라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아프리카는 미개화한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김영세는 이런 3분법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사회란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회가 무조건 발전만 한다면 역사적으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는 문명의 멸망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할는지 의아스러웠다. 게다가 서양은 무조건 개화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군사적, 경제적 우월이 개화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은 인종에 따른 우열의 서열이었다. 김영세는 대표적인 개화 신문인 <독립신문>의 논설을 읽고 놀란 적이 있었다.

흑인은 가죽이 검고 털은 양털처럼 곱슬곱슬하며 코는 납작한데다 심성이 미련하고 천하다. 백인은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하다. 아메리카 홍인은 게으르고 탐구심이 없어 백인이 아무리 교화하려 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그들이 황색인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격조 있게 꽃피웠던 동양 문화를 전혀 모르지는 않을 터이었다. 그리고 서양 문화의 많은 것들이 동양에서 배워간 것들임을 잘 알 것인데, 왜 이렇게 무모한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세는 식민지 조선에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자기 비하 풍조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두 번째로 한국 계몽주의자들은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 또는 선각자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속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884년 이래 1924년까지 한국 민족 운동의 역사를 개괄한 이광수는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아예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3·1운동에 대해서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없이 추이하여 가는 변화'일 뿐이라고 진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2· 8독립선언서>를 썼던 것일까? 혹시 유학생 지식인 중에서 문사 자리를 지키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이광수는 한국 민족의 속성으로 나태, 허위, 봉사심 결여, 비사회적 애국심 등을 들고 있었다. 현상윤은 원망, 시기, 간사, 비천 등이 한국 민족의 병근(病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들이 말하는 한국 민족의 범주에 그들 자신은 들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 대중은 오로지 교화의 객체일 뿐이었다. 그들은 대중의 역동성을 무모한 군중 심리로만 여기고 있었다. 또한 이광수는 <이순신전>에서 거북선을 만든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천재적 역량이라고 했는데, 왜 그는 당대에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던 조선 기술자들의 건축술과 조선술은 간과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국 계몽주의자들의 실상

다음으로 계몽주의자들은 대부분 집단주의에 휘말려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일제의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들은 개인주의라는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새로운 의미의 국가나 민족, 그리고 개인주의 같은 개념들은 사실 모두 서양에서 이식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라가 발전하려면 당연히 개인과 사회의 조화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개인의 발전을 토대로 한 사회 발전을 지향하는 개념일 터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회를 위해 개인의 복종과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주의를 무조건 염상섭 소설의 주인공 이인화 류의 이기주의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계몽주의자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두가 민족개조론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상 대부분 일이 그렇듯이 한국의 계몽주의자들에도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선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의의 것이었다. 김영세는 다음과 같이 성급히 결론을 내리며 토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최소한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은 악의의 확신범들이었다. 또한 서재필은 벌써부터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영달을 위해 조국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안창호는 판단 보류였다. 안창호는 앞의 세 사람처럼 일신의 세속적 영달을 위해 민족개조론을 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선의건 악의건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얼마나 근거가 박약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하게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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