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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철쭉.
 반야봉 철쭉.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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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1732m)은 지리산 제2봉이다. 높이로 치면 네 번째(천왕봉, 중봉, 제석봉)지만, 지리산 서부 능선에 우뚝 솟아 있어서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수차례 지리산을 다녀왔지만, 반야봉을 올라보지 못했다. 반야봉은 지리산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주능선을 타고 가다 잠시 반야봉을 올라갔다 돌아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에 쫓기고 체력을 비축하여야 하는 긴 산행길은 천왕봉만 바라보면서 그냥 지나치게 한다. 그러다 보니 반야봉은 지리산 어디서나 돌아보면 항상 웃고 있는 산으로만 기억된다.

아내와 하루 일정으로 반야봉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계획을 잡았다. 피아골에서부터 올라가면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왕복 열 시간 정도. 점심도 먹어야 되고, 웅장한 산 구경도 해야 하니 넉넉히 잡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야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다.

게으름은 욕심으로 변해가고

현충일(6월 6일) 아침. 게으름을 피웠는지 시간은 훌쩍 건너뛴다. 오전 일곱 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번에도 반야봉을 못 가는 걸까?' 산행준비를 서두르지만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못 가면 중간에서 내려오면 되지'하고 구례로 출발했다.

구례에서 하동가는 19호선 국도는 섬진강을 따라간다. 진안에서 흘러온 섬진강 물길은 이곳에서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를 가르며 거칠게 흘러간다. 바다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굽이친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길은 막히지 않고 흘러갈 수 있음이 자랑하듯 힘차게 솟아오른다.

연곡사 가는 표지판을 따라 들어서니 온 계곡이 산발한 밤꽃 향기로 진하게 감싸 안았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다. 오늘 중 기어이 반야봉을 넘어 보고 싶다. 농평마을에서 올라가면 바로 갈 수 있다고 하던데. 연곡사에 다다를 즈음 오른쪽 마을로 올라섰다. 도로는 구불구불 산으로 올라간다. 작은 마을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깊은 산 속에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해발 650m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 산속 마을 답지 않게 집들이 새로 지어 풍요롭게 보인다.
▲ 농평마을 해발 650m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 산속 마을 답지 않게 집들이 새로 지어 풍요롭게 보인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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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렇게 높은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니.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마을은 너무나 조용하다. 깔끔하게 새로 지은 집도 있다. 이 작은 마을에 학교가 있고, 교회도 있다. 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낡은 종탑만이 세월을 지키는 듯 서 있다.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출입금지, 어떡하지?

근데 등산로가 어딘지 모르겠다. 아무런 표지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마을 끝집 옆으로 작은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길옆으로 뽕나무에 오디가 탐스럽게 열렸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몇 개 따 먹으니 너무나 달다.

시간은 오전 열 시를 넘어서고 있다. 산길은 촉촉하니 인적이 드물다. 능선으로만 올라서면 등산로와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올라갔다. 소나무 숲을 지나 능선 길에 들어서니 커다란 안내판이 앞을 막고 있다. 안내판에는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다. 반달가슴곰 등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를 위해 2026년까지 출입을 금지하며, 위반할 때에는 과태료 50만원을 부과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출입금지를 알리고 있다.
▲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안내판 출입금지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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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기만 하다. 한참을 서서 고민했다. 근데 고민하기보다는 점점 가야 되겠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터넷에 산행기도 많이 올라오던데. 그럼 그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예전에 등산로기 때문에 조심히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고 있다.

무모한 도전... 곰의 공포와 싸우며

무척 내키지 않은 산길.
▲ 산길에 서서 무척 내키지 않은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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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무척 내키지 않아 한다. 사실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반야봉이 가고 싶다.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산길이라 편안하게 올라간다. 점점 하늘은 보이지 않고 산길은 어두침침한 깊은 숲 속으로 이어진다. 가늘 길에 곰의 똥이 군데군데 보인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무를 할퀸 자국들도 보인다. 섬뜩하다.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지?"
"산을 가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아내는 성질을 버럭 낸다. 불안한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곰이 나오기를 바라는 말로 들리는 가 보다. 길은 뚜렷이 보이지만 숲이 우거져 밀림 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고, 커다란 나무를 만나면 위를 쳐다본다. 가끔씩 키를 넘어서는 조릿대 숲 속을 걸어갈 때는 공포가 엄습한다. 옆에서 곰이라도 나타난다면 꼼짝없이 당한다.

이런 산길을 계속 가야 하나? 이미 산속 깊이 들어와 버렸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가는 길에 멧돼지 흔적도 보인다. 뿌리를 먹으려고 이곳저곳 땅이 헤쳐져 있는 산길을 가려니 등골이 오싹하다. 멧돼지는 더 무섭다던데. 후회가 막심하다. 왜 이런 길로 들어섰는지.

곰과 멧돼지 같은 야생 맹수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오싹한 공포. 키보다 더 큰 조릿대가 덮고 있는 숲길을 헤치며 걸어갈 때 느끼는 무서움. 산행 내내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만약 곰을 만났다면?

무려 세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열심히 걸었더니 사람소리가 들린다. 지리산 주 등산로근처다. 사람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숲을 도망쳐 나오듯 빠져나왔다. 삼도봉(1533m)이다. 우리가 올라온 길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선을 따라 이어진 불무장동 능선길이다. 옛날 장사꾼들이 지리산을 넘어 화개장터로 장보러 가던 길이라고 한다. 삼도봉은 날라리봉이었는데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라고 하여 삼도봉이라 부르고 있다.

안도의 마음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긴장과 공포 속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마냥 마음이 들뜨고 흥분된다.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중에 자연스럽게 아내와 곰 이야기를 한다.

"근데, 정말 곰이 나타났으면 어떡했을까?"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했는데, 얼른 배낭에서 소시지를 꺼내서 까주면 받아먹지 않을까? 그때 도망가는 거야."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선 과자를 꺼내 주고, 다 먹으면 오이도 꺼내주고, 밥도 주고 하다보면 곰이 친해지지 않을까?"

산길에는 군데군데 곰 출현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 곰에 대한 주의 안내 산길에는 군데군데 곰 출현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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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말은 안했지만 아마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곰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급박하게 떠오르는 게 가장 단순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런 대응이 엄청 위험하다는 걸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곰에 대한 대처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걸 보고 서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다시 그길로 내려갈까?"

아내가 슬쩍 농담을 건넨다.

"아니. 두 번 다시 그 길로는 안가."

비지정 등산로로는 다시는 안가기로 마음먹었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반야봉

다리는 무척 힘들다. 적지 않은 높이를 급하게 올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반야봉으로 올라야 한다. 올려다보이는 반야봉은 높기만 하다. 다시 숲 속으로 들어섰다. 아까 느꼈던 숲과는 달리 편안하기만 하다.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산의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온다. 오르막길에서는 점점 힘에 겹다. 마지막 오르막길이라 생각하고 쉬엄쉬엄 올라갔다. 등산객들도 올라가는 게 힘든지 군데군데 쉬고 있다. 철쭉은 끝물이지만 연한 붉은빛이 여전히 매혹적이다.

산정이 가까와 질수록 철쭉 등 키 작은 나무들로 변하며 사방이 확 터진다.
▲ 반야봉 올라가는 길 산정이 가까와 질수록 철쭉 등 키 작은 나무들로 변하며 사방이 확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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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표지석과 어울린 정상
▲ 반야봉 정상 작은 표지석과 어울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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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올라서니 정상이 보인다. 정상(1732m)에는 산의 규모와는 달리 작은 표지석이 여유롭게 서 있다. 크고 웅장함은 산이지 표지석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산정에서 둘러본 경치는 너무나 좋다. 환하게 터진 사방과 발 아래로 보이는 능선들. 뾰족하게 자라고 있는 구상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피어나는 구름들. 너무나 편안함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않아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떠나기가 싫다. 천왕봉은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앉아 있기가 힘들어 사진만 찍고 내려왔던 기억과는 대비된다. 여유로운 산이다. 오랫동안 있고 싶지만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다가가고 있다.

사람들은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오랫동안 앉았다가 내려 간다.
▲ 정상 풍경 사람들은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오랫동안 앉았다가 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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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계곡으로 내려선 지루한 하산 길

내려가는 길은 안내판에 계산된 시간보다는 훨씬 짧아진다. 노루목으로 내려서서 임걸령으로 향했다. 임걸령은 많은 추억이 있다. 아내와 결혼 전 지리산 종주하면서 비를 맞으며 점심을 먹던 장소이다. 그때는 텐트며 먹을 것이며 한 짐씩 메고 다녔는데, 지금은 도시락 하나도 힘들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피아골로 내려섰다. 지리산을 갈 때마다 느끼지만 내려오는 길은 정말 힘들다. 체력이 많이 소모된 데다가 내리막길은 끝이 없는 듯 이어진다. 시원한 계곡물 소리는 처음에 아름답게 들리다가 나중에는 머리를 비우게 만들어 버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루한 하산 길.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는 산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 피아골 계곡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는 산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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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산장에서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다람쥐가 열심히 먹이활동을 한다. 아직도 먼 길. 언제 다 내려가나.

반달곰 대처법


☞ 반달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는
반달곰 대처법
 반달곰 대처법
ⓒ 국립공원 멸종위기종 복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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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곰과 마주치게 된다면
반달곰 대처법
 반달곰 대처법
ⓒ 국립공원 멸종위기종 관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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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멸종위기종 복원센터(http://www.bear.or.kr)


비지정 탐방로의 위험을 상기하며

산에서 내려온 후 비지정 탐방로(샛길, 특별보호구 등)로 다니는 게 얼마나 무모한 행동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지리산은 주요 탐방로를 제외하고는 휴식년제 시행 등 오랜 시간 출입을 통제해서 원시상태의 숲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있다.

특히 반달곰 복원을 위해 곰을 방사해 놓았으며, 아직까지 사람을 공격한 사례가 없다고는 하지만 야생성을 회복한다면 언제든지 맹수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멧돼지는 산에서 만날 경우 무척 위험한 맹수이다.

비지정 탐방로로 산행하다 적발될 경우 자연공원법에 의해 과태료(50만원)를 부과 받는다. 혼자만의 즐거운 산행을 즐기려다 관리공단 직원과 실랑이를 하는 기분 나쁜 산행이 될 수도 있다.

깊은 산 속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조난을 당했을 경우 인적이 없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지리산은 생각한 것보다 산이 크다. 나 하나 정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선 산길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후회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나? 물론, 다음부터 절대로 비지정 탐방로로 들어가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출입금지 안내판 옆에 곰과 멧돼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문구를 써 놓았다면 쉽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자세한 안내도 중요하지만 위험을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태그:#반야봉, #반달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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