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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노동 그녀와 그녀 사이전 포스터
 성노동 그녀와 그녀 사이전 포스터
ⓒ 아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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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을 향해 달리던 여성계의 언저리에서

7년 전이었다. 성매매특별법(이하 성특법)의 입안을 놓고 여성단체의 활발한 로비가 이루어졌다. 대학 내 여성주의 모임에서는 여름이면 농촌봉사활동 대신 기지촌봉사활동을 떠났다. 내가 속해 있던 모임에서도 2001년  동두천 미군 기지의 새움터로 탈 성매매 지원활동을 갔다.

당시 단체 간사는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칠판 위에 가부장적 자본주의 취업시장에서 '삼면이 막힌 벽'을 그렸다. 젊은 여성에게 허용된 유일한 출구는 '성산업'이며 화장실 벽까지 침투한 각종 광고들로 이 곳으로의 유입은 아주 쉽다고 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인 언니들은 처벌되지 않도록 하면서, 이 구조를 바꾸는 법안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비좁은 자리에 모여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반성폭력 자치규약 제정과 문화제 속에 여성의 성(性)을 몽땅 피해자로 규정했던 무거운 학내 분위기를 얼추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 해 여름, 레즈비언 커플 한 쌍을 포함한 우리 팀은 40대 이상이던 언니들과 밥을 지어먹고 센터를 지키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대학생들이었고, 가발장수가 방문하면 언니들과 가발을 써보며 신나할 뿐이었다.

마침 그 기간 중에 정부에서는 탈성매매를 지원하는 첫 지원금을 예정하고 있었다. 언니들은 지원금으로 '통닭집'을 열 계획이라고 단체에 말해놓았지만, 센터를 지키던 우리는 알게 되었다. 언니들이 단체 몰래 다른 여성을 고용해 성매매업소를 열 계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니들과의 '신뢰'를 무엇보다 중시하던 우리는 그날 밤 숙소에서 한참을 토론했다. 단체에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까? 성특법을 지지하던 우리는 전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가을, '성매매근절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다큐멘터리를 찍자며 모인 학우들 몇몇과 함께 자원활동을 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입법 논의가 한참이던 때 각국의 관련 단체들이 방문했다. 그 가운데에는 홍콩의 지텡을 포함해 비범죄화와 성노동을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지만, 편집회의에서는 고민 끝에 '활동 방향'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통째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흐르며 개중에는 평택이나 동두천 등으로 상근 활동을 하러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매번 학교 축제 때면, 언니들이 만든 목걸이며 팔찌, 귀걸이 같은 비즈 공예품들을 팔고 그 돈을 단체로 보내곤 했다. 실태조사를 위해 '이발소 등 여러 개 돌아가는' 업소에 잠입 조사를 하다가 '걸려서 뒤질 뻔 했다'는 학우의 소식도 간간히 들려왔다.

2004년 성특법이 시행되었다. 뉴스에서는 인근 상권의 반발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는 의심을 누른 채 가끔 머리를 맞대고 "여태까지 그 상권이 여성들 뜯어먹고 살았단 거야?", "분명히 마초 포주가 사주한 반대 집회일 거야"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문제를 푸는데 필요한 당사자의 목소리

이와 다른 생각이 생겨났던 건 이로부터 몇 년 뒤, 나 자신이 학교를 떠나 노동 시장에 직면한 때였다. 여성단체에 자리를 잡거나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들과 달리 '여성계 밖'의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어렵게 대중매체를 뒹굴면서 친정 격인 여성계에 취재를 나가면, 멀어진 거리만큼 가끔 까칠한 반응이 날아왔다.

기억나는 몇 가지를 떠올리자면, "잘하는 거 한 가지만 하지 뭐하러 그렇게 종합지를 지향하며 다른 것들 채워 넣는지 몰라". 나의 현재를 부정하는 이 의견에 "얘, 넌 왜 종합대학 박사과정까지 밟니. 그냥 전문대학 하나 창립해서 이사 겸 학자로 취임해"라고 맞받아 쳐야 할까 심각하게 망설였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이 그 동안 주류 미디어에 '당해왔다'고 느끼는 만큼, 당당히 기사의 '검열'을 요구한다는 점이었다. 여기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오마이뉴스의 편집국은 02-733-55XX, 내선번호 10X로 연결이 가능합니다. 국민의 알 권리가 시민 액세스 권을 포함한 삼파전으로 변화하는 현대의 상황을 고려해 편집권의 시민 배분 확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제안해 주십시오. 여성이 시민권에서 제외되어온 특수성에 대해서도 반드시 덧붙여 주십시오. 더불어 건당 24000원 상당의 원고료에 서너 차례 발품을 팔며 까칠한 인터뷰를 감내하고, 오로지 여성주의의 대중화를 생각하는 (편집권도 없는) 시민 기자에게 합당한 원고료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갑자기 내 하소연을 왜 쓰냐 하면. '여성계'의 인사들, 학자 집단일 경우가 많은데, 다른 노동 현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남성 중심성이 지구를 첩첩이 감싼 현실에서, 이들의 꺾이지 않는 비판 정신은 대단히 소중하다. 그러나 가끔 난감하다. 그러니까, 다른 노동현장에 대한 이해가 제로인 상태에서도 비판정신으로 의기 충만하다는 점이다.

거칠게 가정해봤다. 자신이 여러 해를 종사해온 직업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라면? 이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제정된 특별법으로, '성매매'는 있어서는 안될 노동으로 낙인 찍혔고, 해당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피해자'로 '재활 대상'이 되었다.

'상담'을 권유하며 무거운 표정을 짓는 활동가들, 학자들, 정치인들을 앞에 놓고, 이 여성들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니가 내 일에 대해 뭘 알아. 성매매 한번 안 해본 주제에 학위 좀 딴 늬들끼리 짝짜꿍 다 해먹어라"라고 외치고 싶었을까? '노동'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건 내게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성노동.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

 성노동 표지
 성노동 표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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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일이 부끄럽지 않거든요. 당신 부모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기회를 줬겠어요. 내게 충고할 기회를." (1997. 대만 성노동자의 증언)

지난 달, 머뭇거리던 마음으로 방문한 건 한 성노동 영화제였다.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에서 5월 5일까지 개최한 '성노동 : 그녀와 그녀 사이전'. 탈성매매의 입장인 <언니>에서부터, 네덜란드 트랜스젠더 성노동자 혜진에 대한 기록, 대만 성노동자 조직 코스와스의 투쟁까지 상영했다.

코스와스의 투쟁 기록에는 '우리는 지하의 성산업이 보이지 않는 척 할 수 있다. 정치인과 부인들의 위선을 위해. 이것은 정치적 억압이다'라는 독백이 화면 너머 깔리기도 했다. 1942년생 셰릴은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올해 51세예요. 저를 무시하지 마세요. 저는 입시도 통과했다고요. 가족의 환경 때문에 타이페이로 일하러 온 것 뿐예요. 아빠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가 제 몸을 팔 뿐예요."

김연호 대표는 "성매매에서 폭력을 고발하는 (주류) 여성운동의 축은 중요하지만, 노동의 관점은 함께 가야 하는 문제"라며 기획의 변을 꺼냈다. 기획에 앞서 대만을 방문해 당당하고 용기있게 발언하는 성노동자들을 보면서 '성적 학대도 성매매 뿐만 아니라 가정 폭력 등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데, 왜 성노동자들한테만 (낙인을) 씌우는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성 노동자가 '그 시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유입이 쉬우니까' 육체노동을 하게 된다면, 여성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성노동이다. 그런데 성매매 근절, 즉 성판매에 대한 죄인화의 낙인은 부당하다고 설명했다. "(여성 내) 계층을 인정하자는 거죠"라고도 설명했다.

'성매매근절'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획기적인 여성운동의 성과로 읽히던 그 때 사실 한국의 '언니들'도 가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노조를 결성해 정부에 대항했다.

"저는 성특법이 생기기 전 집창촌에서 일하다 이 법이 생겨 음성적인 룸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집창촌과 비교해 집세, 공과금, 차비 등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습니다. 1대1로 손님을 상대해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성폭행과 강도도 당해봤습니다.

다시 집창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우리 성노동자들의 집이며 일터입니다. 이곳 집창촌에서도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습니다. 정부나 여성단체들은 우리를 돕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성노동자들과 대화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론적 근거로만 법을 만드니 어찌 우리를 위해 만든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성노동자들을 돕고 싶다면 성노동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구조적 문제로 생겨난 성노동자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떳떳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성노동> 중, 윤보라(가명,24) 씨의 증언 요약 발췌

위의 증언이 실린 <성노동>(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7) 역시 성매매를 둘러싼 또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완전히 다른 쪽에서 출발한 나로서는 머리가 아프지만, 중요한 건 이들의 목소리를 봉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권'을 존중하라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성매매'에 덧씌운 낙인을 벗겨내는 또 다른 운동의 방식임이 틀림이 없다.

민주성노동자연대, 네덜란드 성노동자 목소리 담은 <성노동>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2007년 발간한 <성노동>에는, 성매매를 바라보는 여성계의 또 다른 시각이 담겨 있다. 7명의 한국 학자와 오사카 외국어대의 후지메 유키 교수, 여기에 더해 민주성노동자연대 위원장인 이희영 씨와 네덜란드 성노동활동가인 혜진 씨의 글이 실려있다.

규제주의, 폐지주의, 비범죄화, 합법화, 특정지역 선포 등 성매매를 둘러싼 의견들을 정리한다. 성매매, 성판매, 성노동, 매매춘 등의 용어가 흘러나온 맥락과 함의에 대해서도 논한다. '성매매특별법'을 입안한 한국여성주의운동의 성과를 부정하기 어려움,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으로 존재하는 성차별, 연대'에 대한 여성계의 토로도 들어있다.

성매매가 트랜스젠더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성소수자'의 문제로 읽어내기도 한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일본에서 관련 법안의 추진 과정, 그로 인해 불거진 문제들, 당사자들의 목소리까지 담았다.

민주성노동자연대 이희영 씨의 '성노동자들이 성매매특별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도 한 꼭지 실려있다. 이 글은 "성특법은 이미 권력에 진입한 여성계가 여성정치세력화의 대거 확장을 위한 '성주류화전략' 필요성에 따라 정치권을 압박해 관철시킨 것으로 대표적인 반인권악법이다"라고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사르코지 '국내치안법'에 대항해 행진을 벌인 성노동자들의 권리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성노동'과 '인신매매'는 구별되어야 하며 근절되어야 하는 것은 후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직업이며 그것을 제대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성에 대한 전문인이다."

가사노동의 올바른 평가가 성별분업의 고착화를 불러일으킬까 우려했던 시대가 있었다. 성노동은 <밥꽃양>처럼 남성노동운동에서도 밀려나고 있는 여성노동의 현주소가 아닐까? 연대의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나만큼이나 머리가 아플 여성주의자들을 위해 과거 프랑스 성노동 운동의 기록을 덧붙여 본다.

"그들은 정부, 경찰, 전체사회로부터 다른 여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또한 남성인 고객들을 고발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어느 정도 이점이 있다는 것과 매춘 세계가 남성우월주의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한편, 성차별주의나 해결책으로서 양성평등의 필요성 혹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 형태로서의 매춘에 대한 약간의 논의를 전개하기도 했다."(170쪽)

덧붙이는 글 | '성노동'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나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닌 경우, 현재 사회적 합의를 고려해 '성매매'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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