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더 많이 부딪히고,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서로 상대방을 더욱 뚜렷이 자기 삶에 남기는 관계. 친구는 아니지만 친구보다 더 가깝고, '죽고 죽이는' 적으로 만난 사이도 아니면서 웬만한 싸움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다투는 '웬수사이'가 되기도 하는 이들.

한 마디로, 같은 게 많으면서도 생각하는 건 때론 너무 달라보이는 이들. 하루에도 수없이 대화를 많이 나누는 사이면서도, 어느 순간 갑자기 상대방 말을 빌미 삼아 공격을 일삼는 사이. 도대체 이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남자인 나로서는 사실 '판독 불가' 판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 그렇다. 이들은 엄마와 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들에 관한 책이다.

난 아들, 어머니는 늘 '너, 내 얘기 듣니?'라고 물으신다

남자인 나는 가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불쑥 화를 참지 못할 때가 많다. 도대체 저 말이 언제쯤 끝날지, 무엇보다 어머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다. 그야말로 미주알 고주알 쏟아놓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어느새 하품만 나온다.

때론 시작도 끝도 없는 어머니 얘기를 듣다가 가끔 핀잔을 듣는다. '너, 내 얘기 듣고 있는거야?'라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코 앞에서 듣고 있을 때도 그런 얘길 하니 말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거나 '응' 소리에 변화가 없다 치면 금세 나는 어머니에게 무관심한 아들로 '평가'받곤 한다.

그러다, 어머니를 한 여자로 여기고 그 얘기를 일부러 귀담아 들으려고 먼저 얘기를 청하고 듣다보면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평소와 다른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 얘기가 재밌게 들린다치면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고 묻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일부러 얘기 중간에 '그건 재미없는데요. 건너뛰고 다음 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내 반응에 어머니가 피식 웃기라도 하면 나는 다시 옆구리를 찌르거나 하는 식으로 장난을 친다. 그렇게 모자간 대화는 몸짓 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끔이나마 모녀관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이해하겠지만, 이런 상황은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사실상 상상에 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엄마와 딸 사이에는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무언가가 있긴 있나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말이 오가고 그걸로 서로 상대방 인격이며 삶을 따지고 들고, 그리고 나서는 어느 순간 다시 '친구'가 되는 걸 보면 말이다. 난, 남자인 난 그런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를 잘 아는 같은 여자이며 언어학자이기도 한 데보라 태넌이 쓴 <가슴으로 말하는 엄마 머리로 듣는 딸>과 같은 책을 읽을 때는 빼놓고는 말이다.

"그들은 최고의 대화 상대이다. 또한 최악의 대화 상대이기도 하다. 엄마와 다 자란 딸은 서로에게 둘 다가 될 수 있다. 엄마나 딸의 말은 다른 어느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 아픔을 치유하기도, 또 더 큰 상처를 안겨주기도 한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모든 관계의 어머니'이다." (<가슴으로 말하는 엄마 머리로 듣는 딸>, 들어가는 말, 5)

짐작일 뿐이지만, 엄마와 딸 사이가 '가깝고도 먼' 관계 또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인 것 같다. 그리고, 수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면서도 최고와 최악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게 정말 나 뿐인지를 궁금해 할 때가 많다. 집안에서 여자 목소리를 듣기 힘들어서인지, 눈 앞에 있지도 않은 사람과 끝없이 얘기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남자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의 무게를-말이 그렇게 무거운(중요한) 것인지를 남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행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은 어느덧 남자를 위한 책이 될 수도 있다. 현실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벅찬 여자의 대화를 이 책에서도 끝없이 들어야 한다는 게 그리 내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여자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녀들의 엄마에 대해 가장 자주 들었던 불만이 "엄마는 나를 놓고 어떻게든 늘 트집거리를 찾아내요"였다. 반면 내가 엄마들과 이야기하면서 딸들에 대해 가장 자주 들었던 불만은 "입도 벙긋할 수가 없다니까요. 무슨 말만 해도 트집을 잡는다고 받아들일니 말이에요"였다.

양측의 불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딸들과 엄마들은 어떻게 하면 대화가 벽에 부닥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다. 하지만 분란의 빌미를 누가 먼저 제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각자 자기 관점으로 행간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딸이 트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엄마는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단지 도움이 되려고, 자신의 식견이나 충고를 전해 주려고 애썼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둘의 주장은 다 맞다."(같은 책, 42)

이 책을 읽는 내가 남자임을 다시 강조해서 말하고 싶다. 어떤 특별하고 분명한 문제가 없는 대화에서도 행간의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건 남자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별 뜻 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너, 내 얘기 듣는 거야?'라고 되묻는 이유를 남자인 나는 여전히 이해못할 때가 많다.

엄마와 딸, 가깝다 못해 한 몸일 만큼 가까워서 탈이다

책을 재밌게 읽었느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남자인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보기엔 다 같은 얘기고 사소한 문제인데, 왜 이런 문제를 이리 장황하게 적어놨지?'라는 질문을 하기 바빴다. '몇 장 몇 장은 그냥 좀 한 장 정도로 합쳐도 되겠는 걸'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머리모양 한 가지에 관해 티격태격하는 엄마와 딸의 대화를 가지고 한 장(2장 나의 엄마, 나의 헤어스타일: 관심과 비판)을 34쪽 정도나 되는 분량을 채울 수 있다는 데에는 여전히 좀 당황스러움마저 느낀다. 그래서 내가 남자 독자들에게 이런 책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해보는 것이다. 나처럼 똑같은 질문을 할지 안 할지 보고 싶을 정도니 말이다.

'최고의 친구, 최악의 적: 어두운 곳으로의 산책'(7장)을 읽다보면, 엄마와 딸은 정말 '피아간에 구분이 안 되는 전쟁터에 놓인 사람들'보다 더 끔찍한 관계를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이면서도 어느 때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없어 못 사는 친밀한 사이로 돌아가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내가 남자임을 또 말하게 된다-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행간의 의미 찾기, 이건 '시도때도 없이' 대화하는 여자 사이에서도 어려운 문제인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자들이 반드시 어떤 문제를 다 파헤치기 위해서 장시간 대화를 하진 않는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장시간에 걸친 대화, 상대방 삶을 구석구석 넘나드는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사실 친밀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어렵거나 확신하기 어려우면 나처럼 '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를 수시로 들을 가능성이 높다. 감히 확신컨대,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대가 나처럼 남자라면 말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보면 엄마와 딸 관계도 아빠와 아들 같은 남자에게도 가까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가족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며 조금 인내해주길 바란다. 이런 책은 누구에게선가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하며 읽는 게 좋다.

그러니까, 이런 책은 읽는다기보다 듣는다고 생각하라(또 말하지만, 그대가 남자일 경우엔 이점을 꼭 기억하자. '듣자, 듣자, 들어보자'). 너무 자주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죽 읽어라. 그리고 가끔 다음과 같은 말 몇 개 정도 기억해 두면서 이 책을 읽는 게 좋겠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살펴부고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란 양날의 칼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딸들과 엄마들의 관점이 어긋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가 보호와 교감을 보는 곳에서, 딸은 자기의 자유가 제약받고 사생활을 침해받는다는 사실을 볼 수도 있다. 딸들은 자기들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욕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엄마들은 자신들의 염려가 딸들에게는 그녀들의 자신감을 침해하는 일이 될 수 있으며, 관심보다는 비판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책, 248)

늙으신 어머니가 잠든 다 큰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려고 목발을 짚고 오던 모습을 잠결에 보게 된 지은이가 한 말이다. 관심과 간섭의 차이를 구분하고 서로 그 차이를 좁혀가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비단 엄마와 딸 사이에서만 생기는 문제인가 말이다.

9장에 걸쳐 엄마와 딸 사이에서 대화가 같는 의미와 무게감을 살펴보려 노력한 저자는 "같은 대화에서 한 여자는 보살핌을 보고, 다른 쪽은 비난을 본다"고 말을 여러가지 표현으로 바꾸어 가며 수시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뒤얽힘을 풀 수 있는 길을 없을까?"를 묻고 방법을 찾아갔다. 물론, 방법은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왔겠지.

결국 서로 상대방 말을 좀 더 귀담아 듣고 상대방 말 뜻 그러니까 그 말을 하게 된 이유를 찾으려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행간의 의미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끝없는 대화를 하는 여자와 딸 사이는 물론 아빠와 아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가슴으로 말하는 엄마 머리로 듣는 딸> 데보라 태넌 지음. 문은실 옮김. 부글북스, 2006.
(원서) You're Wearing That? by Deborah Tannen (2006)



가슴으로 말하는 엄마 머리로 듣는 딸

데보라 태넌 지음, 문은실 옮김, 부글북스(2006)


태그:#가족, #엄마, #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