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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한 비서관의 돌연한 사퇴가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 양상과 맞물리면서 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태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 임명된 지 한 달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 비서관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정두언 의원에게 발탁돼 한나라당 선대위 전략기획팀장으로 활동할 만큼 정무적 판단력과 기획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에 들어온 이 비서관은 정무적 능력 등을 감안해 정무비서관에 기용될 것이 유력해 보였지만, 실제 비서진을 짜면서 연설기록비서관으로 발령이 났다. 청와대 내 세력간 주도권 다툼에서 '정두언계'인 이 비서관이 '이상득계'로부터 견제를 받고 밀려난 것이다. 

 

이 비서관은 당시 비서관직 수행 여부를 놓고 고심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이명박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 작성 실무를 총괄하고 대통령의 발언록을 정리, 보관하는 직무를 수행해왔다.

 

"업무가 내 적성에 맞지 않았을 뿐"... 예정된 사표?

 

어느 정도 예고됐던 그의 사퇴가 논란이 된 것은 사의 표명 시점 때문이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에 대한 정두언 의원 등의 총선 불출마 요구가 끝내 실패로 돌아간 직후에 그가 사의를 표명한 것.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청와대 내 이상득 부의장측 인사들이 정두언 의원의 측근인 이태규 비서관을 '찍어낸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됐다.

 

이상득 부의장 측은 정두언 의원을 포함해 한나라당 소장파 55명이 이상득 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고 나선 배경에 이태규 비서관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태규 비서관 본인은 이런 해석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비서관은 28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업무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사의 표명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지난 한 달 동안 붙들고 해보려고 했지만, 엔돌핀이 돌아야 일을 할 것 아니냐"며 "아무리 청와대 비서관이 좋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사의 표명 시점도 이상득 부의장에 대한 소장파들의 불출마 요구가 있기 이전이라고 했다. 그는 "일주일 전에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보고했는데, 류 실장이 후임자가 올 때까지만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던 것"이라며 "지난 일요일에 사표를 내려고 했는데, 이른바 '생육신의 난'이 있었지 않나. 그래서 월요일에도 못내고 화요일 저녁에 냈다"고 말했다.

 

정두언 의원은 이상득 부의장 불출마 요구가 실패하자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불출마 요구를 한 55명은 오직 당과 대통령을 위해 나선 만큼 '생육신'으로 불러줬으면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시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여섯 선비와 달리 55명은 '목숨(공천)'을 버리지 않은 점을 빗대 '생육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특히 이 비서관은 '권력싸움의 희생양'이라는 시각에 대해 "만일 그런 문제 때문에 나가는 것이라면 내가 그냥 나가겠느냐"며 "부당한 것을 조목조목 얘기하고 나갔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소장파 55명의 이상득 부의장 사퇴 요구를 이 비서관이 기획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내가 정말 (기획)했다면 그렇게 엉성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이 비서관은 "내가 당초 정무비서관이나 기획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연설기록비서관이 된 것을 두고 일각에서 '물 먹었다'고 했는데, 그 배경은 맞다"고 인정했다. 이 비서관은 "1~2주 정도 쉬었다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한다"면서 "대통령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나. 나도 뜯어고치고 하는 게 적성에 맞으니까,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계속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상득 불출마' 실패... 권력투쟁 희생양?

 

이태규 비서관은 부인하고 있지만, 최근 대통령 연설문이 비서관 결재없이 상부로 직보되거나 업무처리 과정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비서관의 사퇴 배경을 두고 여권 내 권력 주도권 다툼과 이로 인한 후유증이 가시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상득 부의장의 총선 불출마 문제를 둘러싼 여권내 권력투쟁에서 패한 정두언 의원의 향후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정 의원은 "권력 투쟁 요소는 전혀 없었다. 이 부의장은 존경받고 사랑받는 원로로 남을 수 있다고 봐서 불출마를 요구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의원은 "현장을 다니면서 급속도로 악화되는 민심을 아는데, 후배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며 54명의 소장파 의원들과 '거사'에 나섰던 배경을 설명했다. 이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고, 지역구에서 야당에게 역전 당하는 후보들이 생기면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는 것이다.

 

정두언 의원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부터 복심 역할을 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최측근이다. 그러나 지난 1월 초 인수위 인선 과정에서부터 권력의 균형추가 이 부의장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양측의 긴장관계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인수위 때 당선인 비서실 보좌역이었던 정두언 의원은 청와대 비서진이나 초대 내각 인선과 관련 '능력보다는 대외 이미지나 도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상득 부의장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은 '이 대통령이 믿고 쓸만한 사람'을 인선 기준으로 삼으며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다고 한다. 정 의원이 이상득 부의장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것이다.

 

이후 '고소영-강부자' 내각에 이어 장관 후보자가 줄사퇴하는 인선 파동이 터지자, 정 의원의 불만도 폭발했다. 지난달 25일 초대 장관 인선에 대해 "참으로 아슬아슬한 인사"라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부적절한 인사나 '형님 공천'으로 상징되는 공천 갈등 문제가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한 정 의원은 23일 수도권 공천 후보자 54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득 부의장과의 동반 불출마 카드를 꺼내들었던 이재오 의원이 이 대통령과의 독대 뒤, 출마 쪽으로 선회하면서 정 의원의 '거사'는 물거품이 됐다.

 

정 의원은 이재오 의원이 총선 출마를 택한 데 대해 "모두 황당해 하고 있다. 이 의원 자신이 '바른 길이니까 함께 갑시다'라면서 나섰던 만큼 출마한다니 너무 황당하다"며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공신의 난' 실패한 정두언,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나

 

정 의원은 '이상득 불출마'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을 계기로 권력의 핵심부로부터 밀려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로부터 대국민 사과를 요구받았다는 점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의원도 지난 25일 MBC라디오에 출연, "내가 듣기론 청와대에서 정두언 의원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자신의 친형의 불출마 문제를 매개로 자신에게까지 칼을 겨눈 정 의원에 대해 이 대통령이 "괘씸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가족 이기는 가신은 없다"며 "집권 과정에서는 기능적 인물도 필요하고 가신들도 필요하지만 결국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대통령의 가족을 정면 충돌해서 찍어내는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상득 부의장과 대립각을 세웠던 정 의원은 이번 공천 파동으로 인해 이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은 물론 이재오 의원과도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됐다. 총선을 앞두고 잠시 잠복해 있는 권력 주도권 싸움은 총선 이후 다시 급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파워게임에서 밀린 정두언계가 청와대 내부 인사에서 계속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궁지에 몰린 정 의원이 향후 어떤 식의 독자행보를 걷게 될지 주목된다.

 

한편 이태규 비서관의 사퇴가 청와대 내 권력싸움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에 대해 청와대측은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이동관 대변인은 "연설기록비서관은 본인의 적성에 그 일이 맞지 않다고 여러차례 사의를 표명했다"며 "(사표 수리는) 공공개혁TF에서 일하고 싶다는 본인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 대변인은 "특정 개인과의 연계 문제로 추측해서 보도가 되는데, 다시 말하지만 청와대에는 계보가 없다. 오직 이명박 계보만 있다"며 "특정인과 가깝다는 것은 인사상의 유불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태그:#이명박 대통령, #정두언 의원, #청와대 파워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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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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