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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만을 위해 준비했던 피렌체행

 

나는 '피렌체'라는 도시 이름 보다 '우피치'를 먼저 알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불면증이 심했는데 두꺼운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겠지 싶어 책장에 꽂혀있던 <서양미술사>를 읽곤 했다. '우피치'는 <서양미술사>에 자주 등장하던 미술관 이름이었다. 유명한 작품은 다 우피치에 있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는 도시마다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도시의 구조도 다르고, 문양도 다르고, 심지어는 바닥에 깔린 블럭의 크기와 디자인도 다르다. 경찰관인지 공익근무요원인지 모르겠지만 곤봉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유니폼도 도시마다 달랐다. 로마 다음으로 들른 피렌체는 로마와도 너무 달라서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라는 것을 실감했다.  

 

피렌체 두오모 앞 우피치 미술관 앞의 아쏘

 

피렌체의 거리예술은 굉장히 발달했다. 두오모 앞, 미켈란젤로 언덕, 우피치 미술관 앞, 베끼오 다리 등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곳에서 '불법' 또는 '합법'으로 예술을 만날 수 있다. 낮에는 주로 그림을 판다. 낮에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볼 수 있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밤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음유 시인들의 시간이다. 관객들의 반응이 열렬하다.

  

관광지와 거리예술은 공생 관계다. 어떤 상품이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잘 팔리겠지만,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안 되는 상품은 가능하면 유명 관광지 앞에서 팔지 못하도록 정부가 관리한다. 그런 유명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앞이었다.

 

우피치 미술관 앞의 거리예술가들은 특이하게도 풍경화를 즉석에서 그려서 팔았다. 초상화는 즉석에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풍경화는 그렇지 않다.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 이미 그려져 있는 풍경화를 팔았다.

 

그렇다고 우피치 미술관을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니었다. 관광객들이 가볼 계획이거나 혹은 이미 가봐서 기억하고 있는 피렌체의 유명 방문지를 화가가 머릿속에서 재생해서 그리는 식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그린 그림을 작가에게 직접 살 수 있다. 이처럼 거리 예술의 최대 재미는 작가와 관객이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판매는 판매원들이 하기도 한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서는 원본 이미지 하나를 두고 여러 명의 작가가 그린다. 하나가 팔리면 그와 비슷한 그림이 다시 매대에 오른다.

 

상인은 상인이고 작가는 작가다. 좋게 말하면 좀 더 분업화된 시스템이지만 그렇다면 '거리 갤러리'라고 해야지 '거리 예술'은 아니다. 또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굉장히 훌륭하지만 뭔가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없다. 반복해서 그리다 보니 늘 수밖에 없는 기술.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돼버렸다. 산마르코 광장 앞 상인들은 내가 본 최악의 거리미술이었다.

 

난 우피치 미술관 앞에서 미켈란젤로 언덕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붓질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턱수염이 없는 '밥 로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눈 앞에 없는 풍경을 슥슥 그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종이 위에는 익히 봐왔던 낯익은 풍경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나는 전날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풍경을 떠올렸다. 어느새 난 그림을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모습을 비디오로 담고 싶다며 그림 그리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전날 두오모 거리에서 화가들이 그림을 매매하는 모습을 찍었다. 급하게 잡은 장면이라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먼저 찍었는데 어떤 사람이 싫어하는 내색을 했다. 결국 그 그림 판매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녹화된 파일을 지울 테니 확인하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괜찮다고 했고 우린 통성명 후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바로 그 사람이 내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먼저 예의를 차려 촬영이 가능한지 물었다. 자기가 그림 그리는 모습은 괜찮지만 그림 자체를 찍는 것은 안된다고 했다. 이게 이 동네 규칙이다. 거리 예술은 동네마다 규칙이 달랐다.

 

서울에서 거리 공연을 했던 나는 유럽에서도 하고 싶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물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광대국인 이탈리아에서 나의 거리 공연은 불가능했다. 합법으로 거리 공연을 하고 싶다면 일정 비용을 내야 했다.

 

처음 거리 공연을 하기 위해 서울문화재단 오디션을 봤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세느 강가에서 거리예술을 하려면 권리금도 내야 한다고. 그거 내더라도 더 벌어가니까 서로 하려고 줄을 서고 있단다. 나중엔 자리만 팔아도 권리금으로 웬만큼 번다고 했다. 물론 이탈리아도 권리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용을 내야 한다. 그 거리의 화가들은 연간 5000유로를 내고 정부에서 허가를 받고 일을 하는 거란다. 그 허가를 받으려면 돈도 들고 또 2년마다 갱신해야 하니 나처럼 떠도는 여행자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그가 내게 국적을 물었다. 왜냐고 했더니 내가 한국인인 거 같아서 물었단다. 처음부터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괜히 반가웠다. 자기는 한국인이 좋고, 한국인 친구도 있단다. 당연히 이탈리아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는 이라크 출신이라고 한다.

 

처음 만난 이라크인, 한국인이기 때문에 친해지다

 

그 아티스트의 이름은 '아쏘'였다. 물론 이라크에서 쓰던 이름을 아닐 것이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필명을 만든 것 같았다. 이라크의 그의 고향마을에는 한국군이 주둔해 있는데 무척 고맙다고 했다.

 

사실 왜 그가 한국군에게 고맙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 국내에선 이라크 파병에 대해 반대 의견도 많았는데 막상 처음 만난 이라크인이 파병이 고맙다고 하니 의외였다. 알고 보니 한국군 공병부대가 토목과 건설을 해준다니 현지인들은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내 납득이 됐다.

 

아쏘의 한국인 친구는 바로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이었다. 그 군인은 나와 비슷한 또래이고 그림을 좋아한단다. 내가 일병일 때 파병을 했으니 내 또래가 맞는 듯했다. 육군에 복무했던 내 친구들도 이라크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우리의 아버지 세대가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것도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실 이라크인과 한국인이 이렇게 좋은 분위기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 중인데 말이다.

 

난 그에게 2007년 여름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행사 4개를 보고 유럽의 미술학교도 구경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아쏘에게서 이라크와 이탈리아의 미술교육 시스템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목표가 있다면 꿈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며 쓰던 붓을 선물로 주었다.

 

손에 익은 작업도구를 처음 만나는 이에게 주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는 그 붓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여행하면서 이보다 기억에 남을 기념품을 없으리라. 난 그가 한국군의 파병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으로 우피치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는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쏘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을 서둘러 정리하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움을 담아 티셔츠를 선물하다

 

짧은 피렌체 여행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 짐을 싸먄서도 아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대로 떠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우피치 앞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난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준비를 했다. 사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티셔츠에 그의 이름과 고마움을 표현할 메시지를 적었다. 그리고 짐을 메고 우피치 미술관으로 갔다. 아쏘와 나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로 교환하고 헤어졌다.

 


태그:#이탈리아, #이라크, #우피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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