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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김좌진 등 18명이 강도죄로 체포, 구금되었다는 기사가 머리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정무통감부에서 발표한 언론시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조선은행법이 공포되어 조선에도 은행이 생기게 되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대충대충 큰 활자 위주로 읽어 내리던 김태수는 독자 투고란에 실린 글에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민중화의 시대다. 학문도 민중화, 정치도 민중화, 모두가 다 민중화하는 시대니 어찌 기생이라고 민중화가 아니 되랴? 옛날은 관기라 하여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였던 기생도, 일조에 양반 정치가 끊어지면서 민중화되고 말았다. 인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

김태수는 변화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어느 양반의 글이라고 보았다. 투고 독자의 주소가 충청도 고향 근처라서 관심이 생겨 읽은 것이었는데 의외로 글이 고약하다고 생각 들었다.

첫째로 이 양반 독자는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생을 독식했던 조선조의 관리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제가 못 가지는 것을 가지는 자에 대한 증오가 있다는 점이었다. 독자 양반의 말대로라면, 김태수 자신은 영락없이 ‘황금만 가진 개쌍놈의 아들’이 되는 셈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기생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기생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김태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기생이란 돈이 필요해서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은 여자들이었다. 물론 그 직업을 좋게 볼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 예로부터 세속적인 것을 가장 비천하게 보아 온 것은 조선인의 도덕적 전통이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독자 양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다.

“독자 양반아! 사람이 속되다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세속적인 가치를 많이 추구할 때 하는 말 아니겠냐? 세속적 가치에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 권력과 명예는 물론 학식이라는 것도 크게 보아 세속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돈은 가장 노골적인 세속적 가치에 해당된다.

이 독자 양반아! 당신이 보기에 기생들은 몸뚱이를 이용하여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니 속된 년들이겠지? 그렇게 볼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런데 돈을 주는 사람이 그 여인들을 차지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라는 거냐? 그걸 관직이나 신분을 이용하여 차지하는 군수, 사또들에 비하면 낫지 않은가? 어느 면에서 그들이야말로 기생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볼 용의는 없는 것이냐?

또 독자 양반아! 양반은 모르시겠지? 왜 기생들이 돈 많은 남자를 따르는지를. 기생들은 돈을 주는 남자는 정직한 남자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여자는 대체로 순수한 남자를 가장 좋아하고 다음으로는 정직한 남자를 좋아한단다. 그런데 순수한 놈이 어디 기방 같은 데에 드나들겠냐? 그래서 차선으로 정직한 남자를, 즉 돈을 주는 남자를 그들은 선택하는 거란다. 정직한 남자라는 생각이 드니까 몸도 주고 마음까지도 주게 되는 것 아니겠냐?

마지막으로 독자 양반아! 기생이 제일로 싫어하는 남자가 누군지 아냐? 당신처럼 돈 아닌 것으로, 다시 말해서 신분이나 교양 따위로 접근하는 남자들이다. 정신 차려라. 당신은 기생만도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물론 자식의 결혼을 이용하여 신분을 높이려 하고, 돈으로 광산 김씨 족보나 사들이려고 하는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갑오개혁 이후 왕실은 300여 명의 기생을 해고했다 그리고 1908년 일제는 기생단속령을 내렸다. 관기가 없어지면서 수많은 지방 관기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서울, 즉 한성은 기생으로 넘쳐났다.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기예만 하던 예기들도 매음을 불사하게 되었다.

기생을 가장 밝힌 것은 일본인 무역상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미를 간직하고 있는 기생을 좋아했다. 한편 중국인들은 기생에게 예술적 기생, 즉 끼나 프로페셔날쉽을 요구했다. 다음으로는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이 조선에 많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은 선교사를 비롯한 기독교 관련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미 공사관 의사였던 알렌이 고종을 회유하여 얻어낸 운산금광에 종사하는 미국인이 꽤 있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것을 조선 기생에게 기대했다. 그들은 서구적인 고상한 품격을 요구한다고 했다.   

밖에서 하인이 태수를 부르고 있었다.
“최 대감 댁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이 와 있습니다.”
“그럼 아버님께 안내하면 될 게 아니냐?”
“도련님을 뵙겠답니다.”

최영애가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시간과 장소를 알려달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미 혼인 문제를 전달했고 그것을 그녀는 알았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당돌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김태수는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오랫동안 궁리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변명은 물론 해명할 이유도 없는 거였다. 태수가 그녀에게 잠시 호감의 빛을 보였을 때 그녀는 냉담했었고, 그 이후 김태수가 갑부의 아들임을 알더니 갑자기 자기에게 고운 눈길을 보인 최영애였다. 그녀에게 손끝 한 번 스친 적이 없었고, 아무런 언약도 한 바가 없었다. 잘못은 당사자들을 제쳐 두고 정혼을 한 양가의 부친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일을 시끄럽게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 한편 구석에는 최영애에 대한 미안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명월관에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전했다. 그는 최영애를 만난 후 가까운 오윤정에 들러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오윤정에 가 볼 요량으로 중간 지점에 있는 명월관을 택한 것이었다.

최근 개업한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을 지낸 안순환이 지은 요릿집이었다. 안순환은 대궐에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책임졌던 궁중요리 전문가였다. 광화문 아래 황토현에 있는 명월관은 장안에서 최고급 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회색빛 2층 양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1층을 일반석으로 개방하고 있었다.

김태수는 얼마 전 아버지 김인용과 함께 명월관 특실인 2층 매실에서 기생을 앉히고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그 날 김인용은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들을 한 번이면 된다고 사정하다시피 해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두 기생의 이름을 대며 방에 들이라고 했다.

태수 옆에 앉은 기생은 이름이 산월이라고 했다. 나중에 그녀는 주옥경이라고 본명을 밝혔다. 그녀는 나이가 어려 보였지만 내면에 숨겨 놓은 자존심이 있는 것 같았다.

“태수야, 예수 믿는 것보다는 기생질하는 게 낫다. 예수 믿으면 조상도 모르게 되고 민족도 가볍게 본다. 그리고 그게 경비도 더 먹힌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었다. 태수의 형이 교회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쓴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혹시라도 둘째 아들마저 교회에 빠질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입에서 민족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굉장히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는 얼마든지 와도 좋단 말이다. 혹시 나를 마주치게 되면 모른 척해도 된다. 사내는 이런 곳에 다닐 때 떳떳해야 한다. 지조와 절개 운운하는 사람들도 이런 데를 의외로 좋아한단다.”

옆에 앉은 기생 산월이 김태수의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거다. 독립 운동한다고 돈 달라고 오는 사람들도 이런 곳을 얼마나 밝히는지 아니?”

술이 대여섯 잔째 들어간 아버지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은 아버지만 마신 게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아버지께서 아시는 분들이나 그렇겠지요.”
“넌 나를 항상 가볍게 보는 게 탈이다. 아버지가 아는 사람들이란 다 그만그만하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 이런 곳에 결코 오지 않는 사람도 알고 있다. 신규식 공이다. 중국으로 떠난다고 했는데 갔는지 모르겠구나. 무역하러 간다고는 했지만 틀림없이 다른 뜻이 있을 거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돈을 주어도 끝내 받지 않더구나.”

산월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호기심이 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산월 쪽을 보았다.
“우리 사돈댁 고령 신씨, 의금부 도사의 자제 분인 신규식 공 얘기다.”
“궁금했던 것을 친절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기분이 앙앙해져 있었다. 김태수도 산월이 맘에 들었다.
“태수야, 법적 혼인 연령이 15세로 낮아졌더구나. 저번 네 말을 아비가 들어 주었으니 이번에는 너도 응해야 한다.”
김태수는 술맛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님,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말씀을 더 하시렵니까?”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머쓱한지 더 이상 혼인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명월관에 도착한 김태수가 인력거에서 보니, 최영애는 들어가 있지 않고 문 가까운 데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서 들어가 앉아 있기는 어려웠나 보았다. 최영애는 신식 한복을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으며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었다. 김태수는 인력거꾼에게 대기하라고 이르고는 최영애 함께 명월관 안으로 들어갔다.

최영애는 눈이 조금 부어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러실 수가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 뵙자고 했어요.”
“어떤 말을 들으셨습니까?”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분은 필자 개인 사정상 2월 4일에 올립니다.



태그:#명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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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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