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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 코믹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메시지만큼은 진지하다.
 KBS 2TV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 코믹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메시지만큼은 진지하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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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이 독차지 할 뻔한 최근의 TV 사극무대에서 홀로 평민의 신분으로 대활약을 펼치는 인물이 있다. KBS 2TV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왕이 아닌 평민으로서 주인공이 된 인물 중에 내시 김처선도 있지만, 요즘 그는 상류층 여인인 어우동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준 듯하다. 그래서 평민 신분으로 사극 주인공을 차지한 인물로는 홍길동이 유일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서울의 어느 미용실에서 손질한 듯한 머리에 큼직한 갈색 선글라스를 낀 홍길동을 보면서 “이거 완전히 픽션이구나!”할지 모르지만, 세종·성종·정조를 다룬 다른 드라마들도 어차피 다 픽션이기는 마찬가지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쪽은 아예 픽션임을 공개적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한쪽은 진짜 사실인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역시 픽션이라는 점이다.

대중의 역사인식에 혼란을 초래하는 측면에서는 <대왕세종> <왕과 나> <이산>의 ‘죄과’가 오히려 더 클지도 모른다. <쾌도 홍길동>처럼 누가 보더라도 픽션인 경우에는 역사 인식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아주 적지만, <대왕세종> 같은 드라마들처럼 진지한 모드로 나가는 경우에는 시청자들이 깜빡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응원단 같은 단발머리 무희들이 춤을 추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쾌도 홍길동>. 그래서 그 누가 보더라도 역사 인식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드라마이지만, 우리 그 속에서 진지한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쾌도 홍길동>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비록 코믹 사극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서민들의 한과 울분 그리고 정치적 이상이 담겨 있다. 대중의 정치적 욕구를 최대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쾌도 홍길동> 같은 드라마가 더 높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홍길동 이야기에서는, 대한민국 서민들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나의 문제를 훌륭한 군주들의 자애로운 처분에 내맡길 것인가? 아니면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할 것인가?

<쾌도 홍길동>이 이 문제를 얼마나 잘 다룰지는 계속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또 다른 홍길동 드라마를 통해 내 문제의 해결법을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쾌도 홍길동>을 즐긴다면, 군왕 위주의 드라마들 틈에서 자칫 망각할 수도 있는 ‘내 자신의 문제해결법’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홍길동 이야기에서 그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 이야기가 단순한 픽션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 문제를 나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실제적 삶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홍길동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홍길동이 아무리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홍길동전>이나 <쾌도 홍길동>에서처럼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홍길동에 관한 몇 안 되는 역사기록들을 살펴보면, 홍길동이 정말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실제 위력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 못지않게 대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홍길동의 위력이 주로 무예를 통해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홍길동의 위력이 사회적 영향력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럼, 홍길동의 실제 위력은 어땠을까?

홍길동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근거한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홍길동이 체포된 시점은 연산군 6년(1500) 10월 22일 이전이었다. <연산군일기> 같은 왕조실록에까지 그가 거명된 것을 보면, 실제의 홍길동이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연산군 6년의 실록에는 홍길동(洪吉童)과 홍길동(洪吉同)이라는 두 인명이 등장하는데, 내용상으로 보면 이 두 인물이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끝 글자인 ‘동’의 한자만 다르게 되어 있을 뿐이다.

위의 10월 22일자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삼정승이 국왕 연산군에게 홍길동 체포에 관한 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의정 한치형을 포함한 삼정승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그 무리들을 다 잡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이 보고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는 일정한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독’이라고 표현될 만큼의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반대파나 야당세력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여·야를 포함한 사회체제 전체를 다 뒤흔들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홍길동을 잡았다는 소식에 삼정승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우스갯소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인물이 가끔씩 한 번 출현해주면 여·야 정당들이 상호 간의 보수적 동질성을 재확인하고 거국일치를 이루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위의 사료에서는 홍길동을 강도라고 표현했지만, 사료에 묘사된 홍길동의 이미지를 보면 그가 단순히 도둑이나 의적 정도의 인물에 그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홍길동이 관복을 입고 첨지(정3품)를 자칭하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의 홍길동이 일정한 정치적 권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 그가 어떤 정치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의적 정도에 그쳤다면, 관복을 입거나 첨지를 자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홍길동 집단이 진짜로 의적에 불과했다면, 관복을 입고 다니는 홍길동을 보고 부하들이 “우리 두목 왜 저래?”라며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홍길동, 정치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고도의 외부적 압박을 받는 집단일수록 그 집단의 리더는 고도의 내부적 신망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홍길동이 내부적 공감대도 없이 그냥 ‘폼’으로 관복을 입고 다녔다면, 홍길동은 집단 내에서 리더십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관복 입은 홍길동의 이미지는, 홍길동을 따르는 집단이 어떤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첨지’라는 타이틀을 통해서도 그의 실제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왕조 흥망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반란세력 수장의 칭호는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따라 점차 높아진다. 처음에는 그저 장군 정도를 칭하다가 나중에는 왕을 칭하기도 하고, 그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되면 황제를 칭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칭호들은 그 시점에서 그 집단이 가진 정치적 파워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장군 정도를 칭하면 딱 알맞을 지도자가 ‘주제넘게’ 황제를 칭한다면, 그 밑의 부하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이다. 타이틀과 실제 위상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도 반란군 지도부가 고심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체포 직전의 홍길동이 정3품 첨지로 불린 것을 보면, 그가 아직 정부를 구성할 만한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막강한 반란집단을 지도하는 수준에는 도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국제법에 교전단체와 반란단체라는 개념이 있는데, 홍길동 집단은 반란단체에 가까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교전단체라는 것은 일정한 지역에서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된 사실상의 정부를 형성한 집단을 가리키고, 반란단체라는 것은 그 정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집단을 가리킨다. 홍길동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는 반란단체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첨지 정도로 불리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길동 집단은 조선왕조를 위협할 만한 파워와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광범위한 사회세력이 홍길동 집단에게 동조한 것을 보면, 상황의 진전에 따라서는 홍길동이 보다 더 큰 꿈을 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더 큰 꿈’이라는 것은 왕조의 성씨를 뒤바꾸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고위직 무반 당상관인 엄귀손이 홍길동에게 협력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대신들이 어전에서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향촌세력인 권농·이정이나 유향소 관리들까지 홍길동에게 협력한 일을 두고 조정이 고심하는 장면도 나온다. 홍길동 군대가 지방 관아를 습격하는데도 이를 방어하기는커녕 도리어 방조하는 향촌세력이 많았던 것이다. 

홍길동, 조선왕조를 위협할 만한 힘 있었나

고위직 중앙관들이 홍길동에게 가세한 점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향촌세력까지 가세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향촌세력은 대개  보수적 성향을 띠기 마련이다. 국회의원선거 결과보다도 지방선거 결과가 더 보수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향촌세력 중에서 홍길동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향촌세력 밑에 있는 일반 백성들 중에서 홍길동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수적인 향촌세력이 홍길동을 좋아해서 그렇게 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동요하는 일반 백성들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홍길동을 도와주었다고 보는 편이 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처럼 홍길동은 단순히 정의의 쾌도만 휘두른 게 아니라, 그 칼 아래에 관료와 향촌세력 일부를 굴복시키는 데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탁상 위에서만 세상의 변혁을 꿈꾼 공상적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성과까지 거둔 인물이었다.

홍길동의 위력이 어떠했는가는 홍길동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조정에서는 여전히 홍길동 악몽이 잊히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종실록> 중종 8년(1513) 8월 29일자 기사에는, 호조가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그 황폐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 오래도록 양전(토지측량)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조세를 거두기가 힘듭니다”라고 중종에게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홍길동이 체포된 시점은 1500년이고 위의 보고가 제출된 시점은 1513년이므로, 홍길동 폭풍 때문에 충청도의 세입이 10년 이상이나 힘들어질 정도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들을 보면, 실제의 홍길동이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지나간 충격의 여파가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조선 후기의 허균이 ‘도술을 부리는 홍길동’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그의 실제 영향력을 그런 상징적 방법으로 형상화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백성들의 일정한 지지를 바탕으로 중앙 관료들뿐만 아니라 향촌세력의 협력까지 얻어내 비록 잠깐이나마 조선왕조를 강타한 홍길동. 그는 단순한 의적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복을 꿈꾼 혁명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비록 독자적 정부를 구성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만약 할 수만 있었다면 또 조건만 형성되었다면 이씨의 나라를 뒤엎고 홍씨의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던 그런 ‘위험한 인물’이었다.


태그:#쾌도 홍길동,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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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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