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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위문제를 놓고 대책회의 중인 동궁 사람들. 오늘날로 치면, ‘국왕직 인수위원회’라 할 수 있는 모임이다. <이산> 제39회(28일 방영) 예고편에서.
 양위문제를 놓고 대책회의 중인 동궁 사람들. 오늘날로 치면, ‘국왕직 인수위원회’라 할 수 있는 모임이다. <이산> 제39회(28일 방영) 예고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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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드디어 세손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다. 불한당 같은 김귀주가 돌아왔고, 정후겸은 여전히 칼을 갈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앞날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하다. 보위에 오르기 전까지 이산은 한바탕의 홍역을 치러야만 한다.

역사픽션 <이산>에서는 말년의 영조가 세손에게 보위를 넘겨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양위가 아니라 대리청정이 문제가 되었다. 아래에 소개될 실제 팩트를 보면, 당시 상황에서 양위는 고사하고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손의 부축 없이는 일어나 앉기도 힘든 영조는 대리청정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반대파들의 저항을 물리치느라 엄청난 체력소모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영조는 저승사자보다도 대리청정 반대파를 더 경계해야 할 판국이었다.

나 죽은 뒤에 세손 말고는 별다른 대책도 없을 텐데,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건가? 노쇠한 영조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럼, 영조의 속을 태우고 세손의 애간장을 녹인 세손 반대파의 핵심 인물은 누구였을까? 국왕의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세손 이산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새로운 하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위험한 생각을 품은 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동안 <이산>을 보아온 시청자들은 정순왕후·김귀주·화안옹주·정후겸 중에서만 그 주범을 찾으려 할지 모른다. 이 중에서 정후겸은 세손 반대파의 핵심 인물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주범이 있었다. 이 ‘또 다른 주범’은 정후겸보다도 훨씬 더 극렬하게 세손을 반대한 인물이다. 그는 바로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홍인한(1722~1776년)이었다.

홍인한이 죽은 해와 정조가 즉위한 해가 같은 점을 보면, 홍인한과 정조의 악연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인한과 이산의 최종 대결장면을 <영조실록> 및 <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정조와 홍인한의 악연

죽기 10년 전인 1766년경부터 영조는 심각한 건강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세손이 주야로 간호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상태가 한층 더 악화된 1775년 봄부터는 세손이 크고 작은 의례를 대행해야 할 정도였다. 영조는 이미 눈도 희미하고 정신도 혼미하고 가끔씩 헛소리도 하곤 했다. 이때가 정조 즉위 1년 전이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82세의 영조는 영조 51년(1775) 10월 상참(편전 국무회의) 때에 대리청정의 뜻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적이 있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고, 이때부터 대리청정을 막기 위한 방해공작이 가열되었다. 이 시기에 홍인한과 정후겸이 대리청정 반대를 주도하고 있었다. 

다음 달인 영조 51년 11월 20일(서기 1776년 1월 10일)에 영조는 또다시 대리청정을 시도했다. 이 날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들인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좌의정 홍인한이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어떤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조실록>에 실린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이산>의 홍인한. 드라마 상으로는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산>의 홍인한. 드라마 상으로는 별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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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은 조정 논의를 알 필요도 없고, 인사문제를 알 필요도 없으며, 국사는 더욱 더 알 필요가 없습니다!”

동궁은 나라 일에 대해 알 필요가 없으므로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왕조시대에 ‘동궁 사람들’은 사실상 ‘국왕직 인수위원회’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오늘날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처럼 너무 표 나게 활동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동궁이 국왕직을 인수해야 할 장본인인데, 그런 동궁이 국정을 알 필요가 없다는 홍인한의 말은 누가 들어도 분명히 억지였다. 

억지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좌의정 홍인한이 그토록 반대하고 또 홍인한을 따르는 무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영조는 일단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서는 이때 영조가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고집을 부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집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건강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홍인한 "동궁은 국정을 알 필요가 없다" 억지

위의 대신회의가 있고 나서 며칠 후에 영조는 단독으로 대리청정을 강행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편전회의니 대신회의니 같은 것도 소집하지 않고 곧바로 교지부터 내리려 한다. 그래서 승지를 부른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이번에도 홍인한이 또 제지하고 나선다. 영조는 버럭 화를 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영조와 홍인한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영조는 이번에는 교지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옥새 등을 미리 동궁전에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하루에 서너 번씩 교지를 내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홍인한이 계속 훼방을 놓는 통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리 시도해 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영조는 임금의 권한으로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려 했지만, 문제는 홍인한의 방해 때문에 임금의 권한조차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리청정을 관철시키느냐보다도 임금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가 더 문제였다.

영조가 임금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저 얄미운 홍인한’이 어떻게든 사라져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영조가 직접 홍인한을 제거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뭔가 명분이 생기지 않은 한 홍인한을 제거할 길은 없었다.

바로 그때에 ‘구원투수’ 같은 활약을 펼친 인물이 바로 전 대사헌·이조판서 서명선이었다. 한동안 ‘벤치 한구석’(한직)에서 소일거리를 찾고 있던 서명선이 ‘불펜’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마운드’로 뛰어들어서는 홍인한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전격적으로 올린 것이다. 이때가 영조 51년 12월 초순 즉 서기 1776년 1월 하순이었다.

그의 활약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영조는 서명선의 상소를 명분으로 홍인한을 전격 파면하고 서명선을 도총관에 임명했다. 그리고는 대리청정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서기 1776년 1월 27일에 대리청정을 명했고, 3일 뒤인 1월 30일에 대리청정 의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의식에 참여한 신하들 사이에서는 "천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로써 세손 이산은 공식적으로 대리청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대 라이벌 홍인한이 제거됨으로써 천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등극까지 가자면 훨씬 더 험난한 파고를 넘어야만 했다. 홍인한은 제거되었지만, 아직 정후겸이라는 강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권을 향한 동궁 사람들의 전진은 여전히 계속되어야만 했다.


태그:#이산, #홍인한, #대리청정,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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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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