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겨울의 브라운관에 전격 등장한 어우동(어을우동)이 SBS 사극 <왕과 나>의 최근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오는 28일에 방영될 제44회분에서는 옥사에 갇힌 어우동을 애타게 바라보는 성종과 그런 성종을 좌절의 심정으로 지켜보는 중전(폐비 윤씨)의 모습이 묘사된다고 한다.

 

어느 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어우동의 미모에 반한 이후로 성종은 툭 하면 미행(微行)을 핑계 삼아 궐 밖 출입을 일삼는다.

 

어떤 날엔 어우동과 함께 헛간 같은 곳에서 밤을 새우다가 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신분이 발각되기까지 성종은 어우동에게 자신을 그냥 ‘이 생원’이라고만 소개한다. 국왕의 신분은 숨기면서도 차마 자신의 성씨만큼은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러 나갈 때마다 온 궐 안은 발칵 뒤집히고, 주인공인 내시 김처선마저 이 때만큼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위한 조연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우동의 등장으로 ‘왕과 나’의 ‘나’는 내시 김처선이 아니라 어우동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실록에 나온 이 생원은 누구?

 

그렇다면, 과연 성종-어우동 스캔들의 진상은 무엇일까? 어우동이 실제로 만났다는 그 ‘이 생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10월 18일자 기사에 어우동의 화려한 애정 행각이 요약·정리되어 있다. 거기에서 어우동과 ‘이 생원’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다.

 

어우동과 이 생원이 만난 때는 어우동이 한창 장안의 ‘주목’을 받던 시절이었다. 어우동이 이성관계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한성의 사대부들이 너도나도 어우동의 집 근처를 서성대던 바로 그 시기였다.

 

그중에는 관료들도 있었고 성균관 등에 다니는 유생들도 있었다. 나중에 수사당국이 밝혀낸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 명이었다고 할 정도로 어우동은 그렇게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생원도 그 남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실록에서는 이 생원에 대해, 짧지만 상세하게 그 애정행각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는 이 생원이란 선비가 자기 집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예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바로 어우동이었다. 어우동의 외모에 반한 이 생원은 즉시 ‘헌팅’을 시도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생원은 길거리에서 어우동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말도 걸고 희롱도 걸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생원을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조선 후기나 구한말 이후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양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조선 전기에 생원은 전도유망한 예비 관료의 대우를 받았다. 생원 중에서도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들의 경우에는 국왕도 함부로 대하기 힘든 사회적 파워를 갖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어우동은 자기 뒤를 졸졸 따라오는 선비의 행색에서 예사사람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우동은 처음 만난 그 선비를 자기 집 대문 안에까지 들이고 급기야는 침실에까지 끌어들였다.

 

침실에 들어온 이 생원은 방 안에 있는 비파를 만지작거리면서 직접 연주까지 해본다. 그런 이 생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우동이 질문을 던진다. 이름이 무어냐고.

 

“이 생원이요”라고 하자, “장안에 이 생원이 한 둘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럼, 이 생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이혈’은 아니었을까? 혈은 성종의 이름이다.

 

이 생원은 이렇게 말한다.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 생원도 모르는가?” 자못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이 생원은 춘양군의 사위인 이승언(李承彦)이라는 사람이었다.

 

낯선 남자의 신분이 확인되자 어우동의 방에서는 곧바로 불이 꺼졌다. 이 생원은 잠간의 즐거움을 얻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두고두고 실록에 남기는 ‘영광’도 함께 얻었다. 

 

성종과 어우동은 어떤 관계였을까?

 

<성종실록>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처럼, 어우동과 스캔들을 일으킨 실제의 이 생원은 성종 이혈이 아니라 이승언이라는 선비였다. <왕과 나> 속의 이야기는 순전히 드라마 작가의 상상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당시 성종 임금은 어우동과 정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까? 정말로 그랬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9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종이 어전회의에서 어우동의 풍속교란에 대한 형벌을 논의한 적이 있다. 성종은 어우동에 대한 재판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대로라면 장형이나 유배형을 당했을 어우동에게 극형을 내리도록 명령한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성종은 어우동의 수명을 단축시킨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종이 어우동의 사형을 주장한 것을 두고 “성종이 뭔가 꿀리는 게 있어서 어우동을 죽여 없애려 한 게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 9월 2일자 기사에 소개된 어전회의 참석자들의 발언록을 들여다보면, 성종의 사형 주장이 꼭 어떤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날 어전회의에서 의금부는 어우동의 죄를 두고 “법률에 따르면, 어우동의 간통죄는 장(杖) 100대, 유배 2천 리에 해당한다”는 소견을 제출했다. “장형이나 유배형을 내리는 것이 법률상으로 맞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일종의 검찰 구형이라 할 수 있는 의금부의 소견표명을 두고 대신들 간에 논의가 벌어졌다.

 

실록에 그 발언내용이 기록된 12명 중에서 정창손·김국광·강희맹·홍응·한계희·이극배·채수·성현 8명은 “법률에 따라 장형이나 유배형으로 처리하자”고 제의했다. 반면, 극형을 제의한 사람은 심회·윤필상·현석규·김계창 4인이었다. 성종은 이 중에서 소수의견인 극형에 찬성한 것이다.

 

성종이 다수의견을 배척하고 소수의견인 극형을 지지한 사실 때문에 ‘혹시 성종이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 날의 발언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성종이 사형을 지지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규정도 없이 죄인을 죽일 수는 없다" VS "중대 범죄자에 가벼운 처벌은 불가"

 

우선, 극형 대신 장형이나 유배형을 주장한 8인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창손은 “어우동은 종친의 부인이자 양반의 딸로서 창기와 같은 음행을 저질렀으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지만”이라고 단서를 달면서도 “그냥 법대로 장형이나 유배형을 내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극형을 내리는 게 마땅하지만, 엄연히 간통죄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으므로 법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창손과 의견을 함께한 사람들도 대개 다 비슷한 논리를 폈다. 어우동의 간통죄가 일반 간통죄보다 훨씬 더 중하기는 하지만, 간통죄에 대한 처벌규정을 무시하고서 극형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어우동의 사형을 반대한 사람들도 ‘어우동은 죽여야 마땅하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다들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사안이 중대하더라도 사형 규정도 없이 죄인을 죽인다면, 법에 대한 신뢰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우려였다.

 

한편, 사형을 지지한 사람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법률 규정대로라면 장형이나 유배형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런 중대 범죄자에 대해 어떻게 그런 가벼운 처벌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위와 같이 대신들은 ‘어우동은 죽여야 마땅하다’는 점에서만큼은 일치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법률은 지켜야 한다”는 쪽과 “이런 상황에서까지 법률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을 뿐이다.

 

이런 의견대립 앞에서 성종은 ‘어우동은 죽여야 마땅하다’라는 참석자 전원의 공감대를 명분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하게 방종을 일삼은 어우동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에게 어떻게 경계가 되겠느냐?”면서 “의금부에 명하여 극형을 적용하여 다시 아뢰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어전회의의 분위기를 본다면, 성종이 어떤 사적 감정 때문에 어우동의 극형을 주장한 게 아니라 대신들의 전체 분위기에 근거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우동의 간통죄가 법적으로는 사형에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극형을 내렸을 뿐이다.

 

사형을 반대한 대신들도 한결같이 “어우동은 죽여야 마땅하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인 점을 본다면, 당시 사회 여론이 “어우동은 죽여야 마땅하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왕 성종은 그런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서 일시적으로 법의 예외를 인정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종(成宗)을 성종(性宗)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이러한 실록의 기록을 본다면, 역사픽션 <왕과 나>에서 묘사되는 성종과 어우동의 스캔들은 별다른 사실적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는 두 사람 간의 스캔들을 보여주는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론케 할 만한 정황 자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성종과 어우동 사이에는 실제로는 아무런 스캔들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자신을 성종(成宗)이 아닌 성종(性宗)으로 묘사하고 있는 <왕과 나>에 대해 저승의 성종은 혹 불편해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왕과 나> 속에서 진하게 묘사되는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그냥 연애소설 정도로 즐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드라마 내용을 토대로 성종(成宗)을 성종(性宗)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태그:#왕과 나, #성종, #어우동, #이 생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