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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물 최석주를 소개하는 드라마 <이산>의 홈페이지.
 가상 인물 최석주를 소개하는 드라마 <이산>의 홈페이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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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픽션 <이산>에서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 인물로서 가장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다. 이조판서 최석주와 세손 호위무사 박대수가 바로 그들이다.

박대수는 드라마 속에서 정국 운영과 관계없는 인물인 데 비해, 최석주는 가상의 인물이면서도 노론의 리더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최석주란 인물이 없었을 경우에 이 드라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최석주란 인물을 배제하면, 드라마 속에서 조정과 왕실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영조, 혜경궁 홍씨, 세손 이산, 효의왕후(세손빈), 채제공, 홍국영, 홍봉한. 그리고 정순왕후, 화안옹주, 정후겸, 홍인한. 최석주를 배제한 이 인물군(群)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위의 인물들은 채제공을 제외할 경우 다들 하나같이 왕실과 친인척 관계로 연결된 사람들이다. 최석주가 없으면, 세손 반대파에서는 그나마 왕실과 무관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된다. 현재까지의 드라마 방영분에서, 채제공이 세손을 지지하는 일반 관료군을 대표한다면, 최석주는 세손을 반대하는 일반 관료군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왕실과 무관한 채제공이 현재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만약 최석주란 인물마저 없었다면 시청자들은 왕실 친인척들만이 '판치는' 이 드라마에 대해 금방 식상해졌을지도 모른다. '일반 관료들은 왜 나오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런데 왕실과 아무런 친인척 관계가 없는 고위 관료 최석주가 큰 비중을 차지함에 따라, <이산>이 왕실의 집안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가 산출되고 있다. 

실제로, 영조 후반기에는 주로 왕실 친인척들이 주도하는 탕평당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산>에서 왕실의 친인척들이 판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상황과 상당히 부합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시 왕실 친인척들만이 정국 구도에 참여한 것은 물론 아니다. 집권 외척세력 외에도 노·소론의 강온파들이 복합적인 세력판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노·소론 외척당 외에 세력판도를 형성한 당파들 중에는 소론 완론파, 노론 청명당, 남인 청론파, 소론 준론파 등이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역학구도를 온전히 표현하자면, 드라마 <이산>에는 훨씬 더 많은 출연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위와 같은 복합적인 정국 구도를 묘사하다 보면, 드라마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되어 시청자들의 흥미를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인 관료군(群)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실존 인물 채제공을 내세우고, 노론 관료군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가상 인물 최석주를 내세우는 것이 더 편리할는지도 모른다. 핵심적인 역사적 사실관계만 파괴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관료군을 등장시켜 드라마를 복잡하게 하기보다는 한두 명의 인물을 내세워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대표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이와 같이 가상의 인물 최석주는 왕실과 무관한 일반 관료집단들을 총체적으로 그것도 간편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에서 '압축의 효과'를 산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석주를 배제한 <이산>의 인물군에서 나타나는 둘째 특징은, 기타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이 비교적 고정적이라는 점이다.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김귀주가 귀양을 가는 과정에서 정후겸이 일시적으로 홍국영과 거래를 하는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후겸은 기본적으로 세손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기타 인물들의 경우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세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건 반대하는 사람들이건 간에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거의 고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정치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영조의 탕평정치는 붕당의 혁파를 최선의 목표로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했다. 붕당의 혁파는 고사하고 붕당의 조화만 달성한다 해도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영조 집권기에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붕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여러 붕당이 정치에 참여하는 동시에 군주가 왕권강화를 위해 붕당구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영조 연간의 정국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정국이 수시로 변하고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인심도 그야말로 무상(無常)이었다.

그래서 영조 연간에는 각 정파의 이합집산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는 초기의 붕당정치 시대와는 달리, 정치적 원칙이나 이념보다는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특히 영조를 보위하는 집권 탕평당 인사들은 더욱 더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풍조가 기회주의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산>에서 최석주를 제외한 왕실 및 조정 인물들은 대개 고정적인 정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국왕 영조에 대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손 이산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더욱 더 고정적이다. 세손을 철저히 지지하든가 아니면 철저히 반대하든가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정치적 변화에 따라 이합집산을 마다하지 않던 당시의 정치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위의 인물들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인물 최석주가 이 드라마에서 갖는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경(베이징)에서 돌아온 정후겸이 깜짝 놀랄 정도로 최석주는 그 사이에 세손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현실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했다. 그의 변신은, 이익을 좇아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던 당시의 정치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세태를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관료들을 등장시킬 경우 드라마 자체가 복잡해질 수 있고 또 무엇보다도 드라마가 재미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최석주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변신의 귀재라는 이미지를 씌움으로써 당시의 현실을 그런 대로 반영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 드라마 <이산>이다.

여러 인물들이 해야 할 역할을 최석주 한 명에게 맡기는 대신 그에게 이조판서라는 비중을 실어줌으로써, 그가 당시의 변화무쌍한 관료집단을 대표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른 바 일당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석주 역을 맡고 있는 '호랑이 선생님' 조경환의 체격이 최석주의 비중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와 같이 최석주는 역사 픽션 <이산>에서 가상의 인물로 나오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그는 이 드라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자칫 왕실 친인척들만의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드라마에서 그는 비중 있는 관료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드라마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또 세손에 대한 태도가 비교적 고정적인 다른 인물들 속에서, 최석주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나타냄으로써 '이익을 좇아 입장을 쉽게 바꾸던 당시 관료집단의 세태'를 반영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왕실 친인척이 아니면서도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일반 관료군의 역할과, 일관된 정치이념을 고수하기보다는 이익을 좇아 입장을 바꾸곤 하던 당시 정치인들의 역할을 최석주라는 가상 인물이 홀로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서 복잡한 구도를 연출하면서 해야 할 역할을 나홀로 해내고 있으니, 가상의 인물 최석주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는 가상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여러 실존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실존적 가상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이 드라마에서는 복잡한 정치구도가 비교적 간명하게 압축되고 있어서, 드라마 제작진이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명쾌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다른 탤런트들의 입장에서는, 일당백 최석주로 인해 출연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그:#이산, #최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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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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