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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라이벌로 나오는 정후겸.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의 라이벌로 나오는 정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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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서 세손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이 있다. 정순왕후, 최석주(가상의 인물), 화완옹주, 정후겸이 바로 그들이다. ‘안가’에 모일 때마다 그들은 세손을 음해하는 일이 마치 무슨 지고지선한 일이나 되는 듯 “다들 열심히 하자”며 서로 의욕을 북돋우곤 한다.

위에서 정조 이산보다 세 살 연상의 동년배이면서 법적으로 4촌지간인 인물이 정후겸(1749~1776년)이다. 나이로 볼 때, 위의 세 실존 인물 중에서 세손 이산에 대해 경쟁심을 가장 많이 느꼈을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정후겸(1749~1776년)”이라는 위의 표현에서 ‘1776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사망한 해는 정조가 즉위한 해다. 정조가 군주의 보위에 ‘올라간’ 그 해에 정후겸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겨뤄보자”며 정조한테 덤벼든 그는 정조를 쓰러뜨리지 못한 ‘죄’로 정조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드라마 속의 정후겸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가졌을 한 가지가 있다. 정후겸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씨인 화완옹주가 정씨인 후겸을 양자로 삼았다고 하니, 간혹 이 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시청자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실제로도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정후겸은 본래 어물전 집의 아들이었다. 약간 애매모호하기는 하지만 어업에 종사한 집안의 아들이었다고 하는 쪽도 있다.

그냥 그대로 살았으면 평생 생선 장사를 했을지도 모를 소년 정후겸에게 어느 날 굉장한 행운이 찾아왔다. 16세가 된 1764년에 아버지 정석달과 같은 항렬인 정치달의 부인‘이었던’ 화완옹주가 자신을 양자로 삼겠다고 나선 것이다.

같은 문중의 일원인 정치달은 1749년에 화완옹주와 결혼하였으나, 자식 없이 살다가 1757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정치달이 사망한 때로부터 7년 뒤인 1764년에 화완옹주가 그를 정치달의 양자로 삼겠다고 나선 것이다. 법적으로는 죽은 정치달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이 엄청난 행운은 결과적으로 그의 수명을 남들에 비해 절반 이상으로 감축시키는 불운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대사헌 이계가 정조에게 올린 글에 나타난 “정후겸은 요망스러운 인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역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정후겸은 머리가 매우 비상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군주의 일기인 <일성록> 정조 즉위년 3월 25일자 기사에서 대사헌 이계의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정후겸은 드라마에서 정순왕후가 주도하는 안가 회합에서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 기록을 보면, 그가 실제로도 머리가 매우 좋은 인물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가 머리가 비상하고 처세에 능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화완옹주의 양자가 되자마자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장원봉사·수찬·부교리·지평을 거쳐 나이 19세에 승지에 오른 데에 이어 나이 20세에는 강화부유수가 되었고, 20대에 이미 참판(차관급)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화완옹주 부녀의 확고한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좋게 보면 그가 윗사람의 신뢰를 받을 만큼 명석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세상사에 닳고 닳은 ‘애늙은이’ 같은 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좋게 보자면 한없이 좋게 볼 수 있는 일이고, 나쁘게 보자면 한없이 나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머리가 너무 좋은 정후겸은 불리한 상황에 놓인 사도세자의 아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앞길을 한층 더 탄탄하게 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수구세력의 편에 서서 세손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짧은 시간 안에 영조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을 보면,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세손에게도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세손에게만큼은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머리 좋은 정후겸이 보기에 당시의 세손이 그만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드라마에서는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로도 정후겸은 그 비상한 머리에서 세손 이산을 음해할 계략들을 꾸며냈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툭 하면 세손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하지만, 역사기록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실제 사실은 ▲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한 점 ▲ 첩자를 보내 동궁을 은밀히 염탐한 점 ▲ 세손을 음해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점 ▲ 심상운 같은 인물을 시켜 세손을 비방하는 글을 올리게 한 점 등이다.

세손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을 볼 때에, 실제의 정후겸은 할 수만 있다면 세손을 어떻게든 암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있는 ‘음모 제조기’ 정후겸의 이미지는 정후겸의 내면적 희망사항을 비교적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라마 <이산>에서는 그가 세손을 공격하기 위해 이조판서 최석주와 호흡을 맞춘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와 파트너를 이룬 인물은 정조의 작은 외조부인 홍인한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인물 최석주가 부각되는 대신 실존 인물 홍인한이 다소 어리뜩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 정후겸과 호흡을 맞춘 인물은 최석주가 아니라 홍인한이었다. 정후겸·화완옹주·홍인한은 세손과 친인척으로 연결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손 공격의 최일선에서 선봉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세손에게 얼마나 ‘얄미운’ 짓을 많이 했던지, 위에 소개한 글에서 대사헌 이계는 “나라를 건설하고 집안을 계승할 때에 소인은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라면서 “소인도 그러한데 하물며 난적(亂賊)이겠습니까?”라며 정후겸을 소인도 아닌 난적에 비유했다.

대사헌 이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후겸은 요망스럽고 반역적인 심보를 가진 타고난 몹쓸 종자”라며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는 화완옹주까지 싸잡아서 “참으로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면서 “이들을 즉시 물리치셔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청하기도 했다. 개혁군주 이산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이라면, 대사헌 이계와 같은 심정으로 정후겸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어물전 집 아들로 태어나 화완옹주의 양자가 된 정후겸은 어찌 보면 로또복권 당첨자 같은 행운아였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그의 길에는 계속해서 서광만 비쳤다. 운명은, 그냥 두었으면 평생 어물전을 지켰을지도 모르는 그를 자꾸만 자꾸만 왕실 쪽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복권 당첨자라고 해서 반드시 결말이 좋은 것은 아니다. 돈을 잘 관리해야 하듯이, 행운도 잘 관리해야 한다. 행운은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주인에게는 느닷없이 불운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주인이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할 경우, 도리어 주인을 관리하고 나아가 주인을 불행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행운이다.

넘쳐나는 행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손을 어떻게든 고꾸라뜨릴 궁리만 짜낸 정후겸은 행운을 잘 관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요행히 왕실에 들어온 그는 아예 ‘박힌 돌’ 세손마저 뽑아내려 했다. 행복에 겨운 정후겸은 세손의 불행으로써 자신의 행운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런 주제넘음 때문에 그는 결국 나이 28세에 정조에 의해 사사되고 말았다. 서민 출신으로서 오로지 출세를 목적으로 수구세력의 앞장을 선 그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했다. 어물전을 하던 그의 집안이 그 ‘요망스럽고 반역적인 심보’를 가진 ‘꼴뚜기’ 한 마리 때문에 이후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태그:#이산, #정후겸, #정조, #화안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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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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