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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 막연하게 자리 잡게 된 관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대운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대운하가 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직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딱히 찬성도 할 수 없고 딱히 반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성경 속에서 대운하는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자기 자신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대운하에 관한 입장이 더욱 더 곤란한 것이라면, 한 번쯤 성경에서는 대운하가 어떤 이미지를 띠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운하 하면 동양권에서는 흔히 수나라 양제를 연상하지만, 수양제 시기보다 근 2천 년 전에 이집트에서도 이미 운하가 존재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파라오)의 박해로부터 구출해 낸 출애굽의 시대(BC 13세기)에 이집트에서는 이미 운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엔 국민경제라는 관점에서 운하를 건설하지만, 고대에는 왕실경제라는 관점에서 운하를 건설했다. 땅이 너무 넓거나 해로를 이용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내륙에 운하를 파서 조세 징수의 신속성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좁거나 해로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경우에는 굳이 운하를 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 바로가 건설한 운하는 출애굽의 시대에 ‘재앙’과 ‘고집’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 이집트 운하의 이미지가 성경 속에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구약성경 출애굽기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이주민 집단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이 모세와 그 형 아론에게 부여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집트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줄 것을 요구하도록 한다.

말로만 요구하면 바로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론에게 기적의 권능을 부여했다. 바로가 보는 앞에서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함으로써 모세와 아론의 뒤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음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보고도 바로는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 마술사들을 불러 동일한 기적을 보여주도록 함으로써 모세와 아론의 기를 꺾으려 했다. 결국 아론의 지팡이가 이집트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지만, 그런 기적을 보고도 바로의 마음은 더욱 더 “강퍅”(출애굽기 7:13)해질 뿐이었다. 바로는 이집트 백성들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음 번 기적을 바로에게 보이기로 했다. 그는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이집트, 인용자 주)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게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에와 나무 그릇에와 돌 그릇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출애굽기 7:19.

뱀의 기적에 이어 하나님이 바로에게 보인 기적은 위와 같이 애굽의 모든 물이 핏물로 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연적인 하수·못·호수뿐만 아니라 인공적인 운하도 모두 핏물로 변하도록 했다. 이런 기적을 통해 바로의 심리를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바로는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번과 똑같이 이집트 마술사들을 동원하여 동일한 기적을 보여줄 뿐이었다.

운하 등이 핏물로 변하는 것을 보고도 바로가 마음을 고치지 않자, 하나님은 아론에게 또 다른 명령을 내린다.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할찌니라.”-출애굽기 8:5.

이에 따라 개구리가 운하 등에서 올라와 온 애굽 땅이 개구리 천지가 되었지만,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이집트 마술사들을 동원해서 동일한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거절의 뜻을 한층 더 분명히 했다.

이후 바로가 마음을 고치게 된 것은 결국 유월절의 대재앙을 입고 나서였다. 바로의 장남을 포함해서 모든 이집트인의 장남은 물론 모든 짐승의 첫 새끼까지 죄다 죽임을 당하는 대재앙이 이집트 전역에서 벌어졌다. 출애굽기 12장 30절에서는, 그 밤에 이집트에서 큰 울음소리가 있었고 그 나라에서 사망자가 없는 집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만큼은 마술사들에게 동일한 기적을 선보이라고 할 수 없게 된 바로는 그제야 모세와 아론을 밤에 은밀히 불러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라”(출애굽기 12:31)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운하 등이 핏물로 변하고 거기서 개구리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에 바로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면, 그는 애꿎은 이집트 백성들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자신의 장남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운하의 재앙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꼭 붙들어 두려다가 결국 이집트 백성들만 크게 잃고 말았다.

이것이 대운하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다. 운하와 관련된 이야기는 출애굽기 외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듯하다.

출애굽과 운하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운하는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이미지와 ‘이집트 왕 바로의 대책 없는 고집’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주기를 거부하는 바로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운하를 포함한 이집트의 모든 물을 핏물로 바꾸고 뒤이어 거기서 개구리들이 튀어나오도록 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운하는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식수가 고갈되고 온 거리에 개구리들이 난무하는 대재앙 속에서도 이집트 왕 바로는 마음을 쉽사리 바꾸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노예로 잡아두려 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운하는 ‘이집트 왕 바로의 대책 없는 고집’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성경 속에서 6이라는 숫자가 ‘불길함’으로 표현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듯이, 대운하 역시 위와 같이 한없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미지는 ‘재앙’과 ‘고집’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태그:#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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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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