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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당선자가 특수목적고와 자립형 사립고의 설립을 약속하자, 강남의 입시학원장들 중에는 이를 반기면서 “누구나 똑같이 배우는 건 공산주의”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 그런 주장의 명분이지만, 그 속에는 재산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하는 논리가 숨겨 있다. 그 속에는 또 양반과 상놈을 가른 전통시대의 신분차별에 대한 암묵적 긍정도 숨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시대에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나름대로의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양반-상놈 차별이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에도 차별이 있었으니까 오늘날에도 차별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때는 없었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사상이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오늘날보다 신분차별이 훨씬 더 심했던 과거에도 인간사회에서는 인간이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전통시대라고 하여 인간을 없이 여겼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인간을 무시하는 사상이 자리를 잡는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물 1000마리의 죽음은 ‘물건’ 1000개의 훼손으로 간주하면서도 사람 1명의 죽음은 온 우주의 상실로 간주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다. 어찌 보면 인간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일이지만, 또 어찌 보면 그만큼 인간이 인간을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근대 사회에서 양반-상놈 차별이 행해진 것은 왜일까? 인간을 중시한다는 인간사회에서 인간을 신분별로 차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근대 시대에 존재한 ‘인간 존중’과 ‘신분 차별’이 언뜻 보아서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전근대 나름대로의 실용적 이유가 있었다. 그 시대에는 신분 차별을 통해 인간 존중을 달성한다는, 그 시대 나름의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아무런 명분도 없이 신분을 차별했다면 인간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는 피치자들의 심리적 복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피치자들이 신분차별에 어떤 식으로든 동의하지 않았다면, 신분차별을 제도화한 사회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근대 시대에는 모든 인간을 똑같이 대하고서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통사회는 그런 인식을 기반으로, 각각의 인간을 차별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행복을 증진시키려 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오래 전부터 차별적 예법이 지배력을 행사한 데에는 그 같은 전통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저변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전통시대 사람들은 평등이란 관념을 몰랐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혼란만 초래될 뿐이라고 인식하였다.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을 원칙상 평등하게 대하면서도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전근대 사회는 아직 그 정도의 단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제도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질서가 붕괴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관념을 갖고 있던 전근대 사람들, 특히 전근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각각의 인간에게 사·농·공·상이라는 차별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질서를 창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행복을 증진시키려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사(士)가 되기 위해 투쟁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상(商)이 되기 위해 투쟁한다면, 사회는 ‘무엇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밤낮을 지새우게 될 것이란 게 전통시대 사람들의 우려였다.

또 그러한 과잉 투쟁은 사회적 자원의 불필요한 낭비만 초래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우려였다. 예컨대, 누구나 다 왕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100명의 대권 후보가 쟁탈을 벌일 경우에 왕이 될 수 없는 나머지 99명의 인적 자원은 결국 사회적 낭비가 된다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

소수의 왕자(王子)들에게만 왕자(王者) 교육을 시킨 것은 대권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불필요한 과잉투쟁을 방지하기 위한, 그 나름대로는 일리 있는 실용주의였다. 대통령후보 12명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도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전통시대의 기술수준으로는 감히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전통시대에 동아시아에서 사·농·공·상을 차별한 데에는 위와 같이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포스트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그 후유증을 통제할 만한 사회적 장치를 개발하지 못했던 그 시대로서는 아예 처음부터 신분 구별 즉 직업 구별을 해놓는 게 편했던 것이다. 이는 성교육 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남녀 청소년을 무조건 떼어놓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인간에게 처음부터 신분 즉 직업이 주어졌기 때문에 전통시대에는 각 개인에 대한 교육의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왕이 될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왕자(王者) 교육을 하고, 사대부가 될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농사나 공장(工匠) 혹은 장사를 할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그에 맞는 교육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적 교육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그것은 국가가 각 개인의 신분 즉 직업을 보장해준다는 전제였다. 국가는 신분질서 보호 즉 직업 보호를 통해 각 개인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그런 전제가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농·공·상으로 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래의 직업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신분별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시대 사람들이 신분별 교육에 순응한 데에는 국가가 개인의 신분 즉 직업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가 광범위하게 붕괴되면, 그 사회는 개혁이나 역성혁명 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통사회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면에서는 현대 사회보다 취약한 데 비해, 개인의 장래 직업을 보장해주는 면에서는 현대 사회보다 우수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통사회는 직업을 둘러싼 경쟁을 억제하는 대신 각 개인에게 제각각의 직업을 보장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갈등 해결장치가 취약했던 전통시대에는 신분별 구분을 통해 사회적 질서와 사회적 행복을 달성하려 했고, 국가가 각 개인의 신분(직업)을 보장하는 전제 하에서 신분별 교육이 행해졌다. 그 당시로서는 그게 실용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치자들이 그런 시스템에 순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날에도 그런 신분별 차별과 그에 기인한 차별화 교육이 과연 필요할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시대에 인간의 신분을 차별한 것은, 신분이 없을 경우에 발생할 혼란을 통제할 만한 사회적 장치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통제할 만한 사회적 장치가 고도로 발달해 있다.

현대 사회의 갈등 해결기법이 얼마나 고도화되어 있는가는, 예전 같으면 들판에서 칼을 들고 싸웠을 정치세력들이 오늘날에는 의사당 안에서 표 대결로 승부를 가리게 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칼싸움에서 지고도 승복할 줄 몰랐던 정치세력들이 이제는 표 대결에서 지고도 기꺼이 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회가 고도로 발달해 있다. 정치세력들은 표 대결로 승복할 수 없을 경우에도 ‘기껏해야’ 멱살잡이나 주먹질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의사당에서 추태를 벌이는 의원들을 보고 유권자들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찌 보면 정치세력들이 그 정도의 대결만으로도 분을 풀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전처럼 사병들을 이끌고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이처럼 갈등 해결기법이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신분별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다 뒤섞어 놔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한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등한 대결을 펼친다 해도, 현대 사회는 얼마든지 그런 갈등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의 신분별 차별이 필요 없다는 것은 그 신분별 차별을 전제로 한 신분별 교육도 불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현대 사회에서 차별화 교육이 시행된다면, 이는 도리어 사회의 불확실성만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전통시대에는 각 개인에게 미래의 직업이 보장된 상태에서 신분별 교육이 행해졌지만, 개인의 사회적 포스트가 미리 결정되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 차별화 교육이 시행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각 개인에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특히나 아직 공부하는 중에 있는 학생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회적 불확실성을 더욱 더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강남의 학원장들은 능력에 따른 차별이라고 강변하지만, 아직 능력을 키우는 중에 있는 학생들의 능력을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교육이 모두 끝나고 직업선택의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몰라도, 아직 능력을 키우는 중이고 또 앞으로 능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 놓인 학생들에게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차별화 교육을 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불확실성을 더욱 더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말로는 능력에 따른 차별이라고 하지만, 그 본질은 재력에 따른 차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신분적 차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를 내세운다 해도, 이 개명된 21세기에 신분별 교육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는 처사일 것이다.

만약 학생들에게 차별화 교육을 시키고자 한다면, 낮은 단계의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그 정도의 교육만 받고도 훗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보장 장치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 장치도 만들어두지 않고 차별화 교육을 제도화하는 것은 양반-상놈 시대의 지배층만도 못한 일일 것이다.


태그:#이명박,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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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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