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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부터 늦잠을 잤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해맞이를 가려다가 폭설로 인해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일어나서 눈장난을 하자고 하는데 못들은 척 하고 버텼습니다. 대신 일어나자마자 마당과 대문 앞 그리고 자동차 위에 내려앉은 눈을 치우느라 애를 좀 먹었습니다.


‘게으른 아침’을 먹고 아이들의 등살에 못이겨 어디론가 가기로 했습니다. 최소한 지척에 있는 대학캠퍼스나 구청광장에라도 나가서 눈싸움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쉬는 날인데 가까운 곳에서 지내기엔 왠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겨울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을 줍니다. 날씨가 추운 데다 눈까지 많이 내려 골목길이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눈구경을 가려면 산이 제격인데, 지리산 성삼재 도로나 무등산 진입도로도 통제한다는 소식입니다.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또다시 담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엊그제 눈 내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관방제림을 다녀왔던 터여서 이번에는 창평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들판과 창평이 왠지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담양 창평은 지난해 12월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곳입니다. ‘슬로시티’란 이른바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지역을 뜻합니다. 패스트푸드와 상반된 슬로푸드 정신을 지역 전체로 확대하면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반성하고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해야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운동인데, ‘빠르게’로 대변되는 속도 지향적인 사회 대신 ‘느리게’ 살면서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집에서 창평은 자동차로 30여분이면 거뜬한 거리입니다. 국립 5·18민주묘지만 지나면 금세 닿습니다. 도로변에는 잎마저 떨어져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소담스럽게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가을걷이 이후 황량했던 들판도 온통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습니다.


날씨 탓에 활동량이 줄어들고 안으로 움츠리게 되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가니 참 좋았습니다. 이 계절에, 그것도 새해 첫날 모처럼 가족 모두가 드라이브 길에 나서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꼭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런 환상적인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담양 창평은 전통의 가옥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돌담길도 옛 추억을 떠올려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과와 쌀엿 같은 전통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도 여러 군데 보입니다. 옛 집들과 돌담길을 거닐며 지난 1년을 떠올려 봅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나름대로 열심히 바쁘게 지낸 날들이었습니다. 그 사이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참 소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바쁘게 산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귀중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주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남은 것이 하나 없는 사람에게도 그 시간은 정말 소중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주어진 1년의 시간도 소중하게 쓸 것을 다짐해 봅니다. 비가 오는 날도, 안개 자욱한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그 너머에서 매일 해가 뜨고 지듯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 것을…. 무조건 바쁘게, 빠르게 사는 것이 아닌, 느리게 살더라도 속이 꽉 찬 참다운 행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나름대로 새해 다짐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눈덩이 하나가 날아와 제 등짝을 세게 때립니다. 둘째아이 예슬이가 던진 눈덩이였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눈싸움이나 하자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본격적인 눈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2대 2로 나눠서 하다가 나중엔 1대 3으로 편을 갈라서 했습니다. 숫자의 균형이 통하지 않은 탓입니다.


한참 눈싸움을 하는데 예슬이의 코 주위가 빨개지기 시작했습니다. 눈덩이를 맞은 때문입니다. 눈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설사 눈덩이를 맞더라도 울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을 받아놓은 터여서, 울음을 참고 있는 듯 했습니다.


“울면 안돼, 울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대” 했더니 “괜찮아! 크리스마스 지났고, 선물도 받았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까지 합니다.


눈싸움으로 아빠를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큰아이 슬비가 야구를 하자고 합니다. 아빠가 눈을 뭉쳐 던지면 나무막대로 그것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는 모양입니다. 헛방망이질을 여러 차례 하더니, 이젠 겉옷을 벗어던지며 피구를 하자고 합니다.

 

 

아빠가 눈을 뭉쳐 던지면 자기들이 피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하던 오자미 놀이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노래 ‘텔미’에 맞춰 춤을 추면서 눈덩이를 피하는 여유까지 보였습니다. 심지어 눈밭에 드러누워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눈을 가지고 논 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힘이 부쳤습니다. 몸에서는 땀이 났습니다. 중천에 떠있던 해도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가 얼어붙기 전에 집에 가야한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과 함께 망월동에 있는 국립 5·18묘지에 잠깐 들렀습니다. 물론 올들어 첫 방문이었습니다. 조용히 집을 나섰다가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즐겁게 뛰놀고,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새해 다짐을 하고 돌아오는데 마음속까지 따스함으로 가득 찬 것만 같습니다.

 


태그:#담양 창평, #슬로시티, #슬비, #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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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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