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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입구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
 낙성대 입구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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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꼭 쾌걸 조로를 연상케 한다. 12월 26일 오전엔 관악산 인근이 어두침침해서 그런지, 강감찬의 날렵한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서 약자들을 구하러 오는 쾌걸 조로 같았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관악산 방향으로 약 900미터 정도 올라가면 강감찬의 출생지인 낙성대가 있고, 그곳 입구에 쾌걸 조로를 연상시키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동상이 있다. 강감찬이 출생할 때에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落星垈)이지만, 날씨 탓인지 하늘이 죄다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낙성대였다.

낙성대 군데군데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안내문구의 표현)는 ‘낙성대 휘호’나 ‘은행나무’ 등등 때문에 관람의 정취가 약간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감찬은 그 나름의 역사적 가치를 갖는 인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이용했다고 해서 절대로 떨어뜨릴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강감찬은 갖고 있다.

그렇다면, 강감찬의 역사적 가치란 무엇일까? 군사정권이 강조한 것처럼 단지 호국정신에서만 그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낙성대 안의 안국사(安國祠)나 안국문(安國門)에서 풍기는 것처럼, 오로지 안국이나 호국의 가치에서만 강감찬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안국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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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호국도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호국정신을 내세워 강감찬을 홍보하는 것은 도리어 그의 수명을 감소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지구촌으로 하나 되는 세상에, 침략전쟁이건 방어전쟁이건 간에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다는 사실은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 따로 사는 세상 같으면 강감찬을 호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도 별 상관이 없겠지만, 좋건 싫건 간에 한·중·일 3국 나아가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이웃나라 청년들을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호국적 접근법은 강감찬의 역사적 수명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고수한다면, 온 세계가 하나가 되면 될수록 한국의 위인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치 한국 농업이 세계화 추세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듯이, 한국 위인들 역시 세계화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이 강감찬의 역사적 가치를 유지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국제적 관광 상품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강감찬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호국이란 이미지는 국내적으로 봐도 좀 촌스러울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는 아예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 향불에서 풍기는 진한 향냄새는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 향불에서 풍기는 진한 향냄새는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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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에 강감찬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란 무엇일까? 그 점은 1018년 귀주대첩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유인책을 통해 거란족 요나라 대군을 수장시킨 귀주대첩은 단순히 고려의 사직만을 보존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당대 동아시아 최강국인 요나라의 국제적 입지를 축소시킴으로써 동아시아 세력균형 시대를 유지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크게 두 번 정도의 세력균형시대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고려-요나라-송나라-서하 시대(10~12세기)였고, 두 번째는 고려-금나라-송나라-서하 시대(12~13세기)였다.

이 두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한쪽도 절대 패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각 나라들이 일정한 지분을 갖고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귀주대첩 같은 전쟁도 발생했지만, 외교적 방법에 의한 국제적 균형의 유지가 전체적인 대세를 이루었다. 송나라의 문치주의 문명이 이때 융성했던 것도 그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귀주대첩도. 강감찬 장군 영정의 오른쪽에 있다.
 귀주대첩도. 강감찬 장군 영정의 오른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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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소개한, 10세기부터 형성된 첫 번째 시대의 세력균형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인해 한층 더 견고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바로 그 점에서 귀주대첩의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만약 강감찬의 고려군이 귀주에서 요나라 군대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고려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송나라는 물론 서하까지도 운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독특한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베이징 혹은 황하 유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지역은 바로 한반도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해로를 통해 랴오둥반도(요동반도)나 산둥반도(산동반도) 등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수나라·당나라의 황제들은 지역패권 장악의 전제조건으로서 한반도 제압을 최우선적 위치에 두었다. 한반도를 그냥 두고는 그 위쪽의 요동(만주)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양제·당태종이 결국 실패한 것은 한반도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한무제나 당고종이 결국 성공한 것은 한반도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이 한반도를 장악한 뒤에 마음 놓고 요동을 공격하려 한 한족 왕조들처럼,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 등 북방민족들 역시 그런 관점에서 한반도를 이용하려 했다. 한반도를 옆에 두고는 마음 놓고 중원을 침략할 수 없다는 전략적 인식 하에 한반도를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만들어 두려 했던 것이다.

몽골족·만주족은 결국 한반도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여 중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는 한반도를 완전한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 실패하여 결국 세력균형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려는 요나라나 금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일정 거리를 두는 전략을 고수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요나라가 마음 놓고 중원을 공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요나라가 오늘날의 베이징 이북 지역에 만족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사건이었다. 귀주에서 고려에 대패한 요나라는 그런 고려를 등 뒤에 놓고서는 마음 편히 중원으로 남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당사자인 고려가 생존했음은 물론이고 송나라나 서하도 안심하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낙성대 경내의 모습.
 낙성대 경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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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요나라의 대약진에 제동을 걺으로써 동아시아 세력균형시대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1018년 귀주대첩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귀주대첩의 주인공인 강감찬의 역사적 가치도 바로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이상처럼 외교적이거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세력균형을 이룩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란족을 상대로 한 방어전쟁에서 침략군을 대파하여 요나라의 기를 꺾음으로써 요나라가 더 이상 동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약자들을 구하러 달려오는 쾌걸 조로처럼, 강감찬도 당시 동아시아의 약자들인 고려·송나라·서하 등을 보호하는 데에 기여했던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세력균형과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한 강감찬의 역사적 가치가 간과된 채, 오로지 호국이라는 일국적 가치만으로 강감찬을 숭상하는 것은 그와 귀주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호국의 영웅으로만 부각시킨다면, 동아시아의 영웅으로 부각될 수도 있는 인물을 한국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 가두어두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과거의 군사정권은 강감찬을 띄워준 게 아니라 도리어 그를 가두어 둔 셈이 되는 것이다.

쾌걸 조로 같은 강감찬은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 한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달려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홍보 부족 때문에 한국 안에서만 갇혀 살았다.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지구촌 시대에 한국이 강감찬의 동아시아적 가치를 부각시킨다면, 그는 한국이 아닌 동아시아의 관광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의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의 위인들도 국제적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태그:#강감찬, #세계화, #낙성대, #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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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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