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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는 그 흔한 ‘슬로시티’ 지정을 알리는 현수막 하나 없다. 면사무소를 방문해도 전라남도와 담양군에서 하는 일이라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슬로시티’ 지정을 위한 창평(삼지천 마을) 마을 현황만 한 부 컴퓨터에서 인쇄해 준다. 그리고 저기 교회 뒤를 따라 쭉 내려가면 모두가 돌담길이라고 말한다.

 

6일 오후 5시, 광주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담양군 창평면을 찾았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면은 어느 시골 면소재지처럼 한가하였다. 상점들이 늘어선 도로만 유일하게 분주했을 뿐 한가하기 그지없다.

 

교회 뒤를 따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내려가니 역시 돌담길이었다. 아직은 전혀 정비가 되지 않은 돌담길이다. 어떤 담은 그대로 비닐 포대로 덮여 있고, 어떤 담은 허물어졌다. 그래도 시골 옛 정취 그대로 구불구불 이어진 돌담길이 계속되었다.

 

한가하기 그지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도 보기 드물다. 가끔 골목길을 지나가는 승용차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 집 안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만 돌담길은 넘어가는 석양만큼이나 한적하다.

 

 

11개국 97개 도시가 '느리게 사는 곳'

 

'느리게 살자'가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의 4개 도시가 '고속사회의 피난처'를 자처하면서 시작됐다. 소음과 교통량을 줄이고, 녹지대와 보행자 전용 구역을 늘리며, 지역의 전통 문화와 음식을 보존하는 등 55개에 이르는 서약 조항을 이행한다.

 

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이탈리아 브라 시는 인구 3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로 상점들은 오후 3시가 넘어야 문을 연단다. 마을에는 자동차도, 편의점도, 네온사인도 없다. 시민들은 하루 3시간의 낮잠과 해질 무렵의 산책을 즐긴단다. 모든 일은 걸어서 해결하고 1주일에 이틀은 반드시 쉰다. 시민들은 달콤한 인생이라고 자랑한단다.

 

슬로시티국제연맹은 지난 1일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열린 총회에서 한국의 전남 완도 청산도와 신안 증도, 담양 창평, 장흥 유치 등 4곳을 ‘슬로시티’로 지정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이다.

 

이 운동은 빠른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환경 속에서 지역 고유문화를 느끼며 쾌적한 삶을 향유하기 위한 것으로 10개국 93개 도시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돼 있다. 전남지역 4개 지역 가입으로 슬로시티국제연맹 가맹국은 11개국 97개 도시로 확대됐다. 그만큼 이 네 지역이 갖고 있는 농경과 음식 등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인들이 인정한 것이다.

 

 

전통가옥, 전통식품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적

 

창평면 소재지인 삼지천 마을에는 모두 해서 돌담길 3600m, 돌담장 2200m가 있다. 골목길이 구불구불 뻗어 있다. 돌담이 아니라 벽돌로 된 담도 있다.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도 있고, 시멘트 포장이 된 곳도 있다. 그냥 땅으로 된 곳도 있고, 자갈을 깐 곳도 있다.

 

돌담은 그냥 시골 돌담이다. 덕수궁처럼 정교하고 맵시를 내어서 쌓은 담이 아니다. 흙반죽에 돌을 얻어 쌓은 돌담이다. 어떤 돌담은 흙은 거의 없고 돌로만 쌓은 곳도 있다. 대체로 돌로만 쌓은 돌담이 오래 간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에 담쟁이 넝쿨이 가득 뻗어 있다. 담쟁이 잎은 모두 떨어져 얼기설기 그물이 처져 있는 것 같다.

 

기와집으로 된 전통가옥 11가구 20여 동이 그대로 있다. 초가집은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기와집 중에는 허물어져 있는 곳도 있고, 말끔하게 단장된 곳도 있다. 어떤 집엔 솟을대문이 휑하게 솟아 있는데 그 옆 감나무에 아직도 까치밥이 몇 개 남아 있다.

 

장흥고씨 집성촌을 이루는 창평 삼지천 마을은 조선 초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마을이다. 그래서 고재선 가옥, 고재환 가옥 등 몇 채는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 전체가 전통문화마을로 문화재청에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담양군 창평면, 남면, 고서면, 봉산면 일대를 중심으로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가사문학의 꽃을 피웠다. 따라서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가까이 있다.

 

창평 쌀엿, 한과, 죽염, 죽염된장, 고추장, 두부, 창평국밥 등이 지역 특산품으로 생산되며, 딸기, 토마토, 고추, 포도 등 과일들과 쌀, 보리, 참깨, 고추, 마늘 등 주부식들이 많이 생산된다.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한참 돌다보면 넓은 들판이 나온다. 들판은 이제 가을걷이가 다 끝나 텅 비어 있다. 그 비어있는 들판 가운데 2층으로 되어 규모가 대단히 큰 정자인 남극루가 있다. 1830년대 고광일을 비롯한 30여 명이 세운 이 정자는 원래 옛 창평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현재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아직은 자기들의 동네가 ‘슬로시티’로 지정된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그만큼 한가롭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마을이다. 별로 자랑할 것도 없는 돌담길이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고향길이 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해 가는 문명의 이기들과 거리를 두고, 인간 마음의 고향처럼 자리  잡은 구불구불한 돌담길이다.

 

 

제발 개발만은 말아줘!

 

‘슬로시티’로 지정되자 전라남도와 담양군이 관광상품으로 내어 놓기 위하여 개발할 계획이란다. 하지만 그대로가 더 좋은 것 같다. 지금도 돌담길이 그대로 있고, 전통 한옥에서 민박을 할 수 있는 몇 집이 지정되어 있다.

 

담장 위에 얼키설키 얽혀 있는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얽혀 있으면 좋겠다. 섣부른 개발로 마음의 고향이 파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불록으로 쌓인 담장을 다시 돌담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담장도 세련된 덕수궁 돌담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처럼 창평에 왔으니 시장통에 있는 창평국밥집에나 들려 보고 싶다. 원래 5일 장마다 열었던 국밥집이었는데, 명성이 자자해지자 매일 열게 되었다. 그리고 집도 더 튼튼하게 지었다. 그래도 창평국밥집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대기하고 있다가 먹어야 한다.

 

다시 돌담길을 돌아가니 해는 이미 지고 사방에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러자 가로등이 불을 밝혀 돌담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돌담길을 끼고 돌아가는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 둘이 보인다. 세 모자는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어둠이 깔려가는 돌담길을 평화롭게 걷고 있다.


태그:#슬로시티, #돌담길, #담양 창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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