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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외침략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일본 메이지 국왕. 사진은 도쿄 메이지신궁에 있는 초상화.
 새로운 대외침략법을 구사하기 시작한 일본 메이지 국왕. 사진은 도쿄 메이지신궁에 있는 초상화.
ⓒ 출처: <일청·일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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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나 임진왜란 시기까지만 해도, 일본의 ‘사냥’은 비교적 단순했다. ‘사냥감’에 대한 용감하면서도 직접적인 침략이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일본군은 제3국의 등장 때문에 곤혹을 치르다가 결국 물러서곤 했다. 신라를 침략했다가 고구려의 개입을 초래하고 조선을 침략했다가 명나라의 개입을 초래한 사례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 국왕(1867~1911년) 시기부터는 새로운 사냥 노하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종전처럼 먹잇감에게 무조건 달려드는 게 아니라, 사전에 퇴로를 차단한 뒤에 사냥에 나서는 신중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사냥꾼’ 일본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일전쟁. 1880년대 중반부터 조용하면서도 대대적인 군비확장을 통해 청나라 공격의 기회를 모색하던 일본은 동학농민전쟁 발발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청나라와 전쟁을 한 판 벌이고자 했다. 그런데 일본은 예전처럼 곧바로 먹잇감에 달려들지 않았다. 일본은 신중했다.

1894년 동학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는 6월 8일 아산에 상륙했고 일본군 선발대는 이튿날인 6월 9일에 인천에 상륙했다. 처음부터 동학군 진압보다는 청나라 공격을 염두에 두고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동안은 상당히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후 40여 일간 일본이 준비한 것은, 국제여론을 탐지하면서 청나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일본은 먼저 러시아·영국·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중립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해외공사관들은 각국의 정보를 본국에 분주히 보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체로 7월 10일까지는 일본이 세계열강의 중립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성과다. 따라서 7월 10일경부터는 청나라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불개입 방침을 확인한 일본은 뒤이어 조선을 우군화하는 데 착수했다.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했고, 다음 날에는 친일내각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위 갑오경장이 시작되었다.

청나라가 국제적으로 고립된 마당에 청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는 조선마저도 일본 쪽으로 돌아섰으니, 청나라의 처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일본은 7월 24일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청나라 사냥에 나섰다. 일본이 대륙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대승이었다.

둘째,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 한일협상조약 당시 서울 정동 손탁호텔에 짐을 푼 이토우 히로부미가 느긋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대신들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자국의 힘만 믿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 이전에 일본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일전쟁(1904~05년)에서 러시아의 기를 꺾은 일본은 한국 강점을 위한 외교적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기를 꺾어둔 일본은 한일협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영국·러시아·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일련의 조약 체결에 나섰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소위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 침략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둔 일본은, 보름 뒤인 8월 12일에는 제2차 영일동맹 체결을 통해 영국의 위세까지 등에 업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9월 5일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에서의 우위권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의 주요 강국인 영국·러시아·미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사실상 용인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11월 9일 서울에 들어와 손탁호텔에 투숙한 이토우 히로부미가 느긋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황제를 협박하여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만큼 느긋함을 보인 것은 손탁호텔의 침대가 편안해서가 아니라 국제적 분위기가 참으로 편안했기 때문이다. 한일협상조약 이전의 일본 외교는 그야말로 ‘과학’이었다.

메이지 국왕 시기의 일본이 보여준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근대 일본은 과거와 달리 보다 더 세련된 사냥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처럼 무턱대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사냥감의 퇴로를 미리 차단한 뒤에 여유 있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교적 방식으로 상대방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상대방을 여유 있게 낚아채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6자회담 때마다 소위 납치자문제를 이슈로 북한을 고립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의 인권문제를 국제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위와 같은 ‘퇴로차단 전략’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은 상대방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킨 다음에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리하게 재설정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서 북한이나 중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야스쿠니문제나 과거사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일본의 부도덕성을 상기시킴으로써 일본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연대가 형성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이 도덕성을 내세워 자신들을 고립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북한이나 중국은 일본의 부도덕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 이후로 일본이 사냥감의 퇴로를 미리 차단하는 세련된 전략을 구사한 것은 미국·영국 등의 서양열강이 일본을 후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을 야만국으로 취급하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국제여론을 주도하기 힘들었다. 미국·영국 등이 일본을 후원하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기에 일본이 새로운 사냥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세계패권이 견고하고 미일동맹이 견고한 한, 일본은 앞으로도 계속 ‘상대방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킨 다음에 사냥에 나선다’는 전략을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가 일본의 부도덕성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은 실은 공격이라기보다는, 일본이 또다시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어 혹은 견제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태그:#일본군국주의, #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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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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