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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낙원 동상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백범 기념관에서 만난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다. 동상 옆에는 김구 선생이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썼다는 '북망자운(北忘慈雲)' 족자가 걸려 있다.
 
곽낙원 여사가 오른팔에 소중하게 감싸든 것은 아들에게 줄 밥이다. 온종일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고 얻은 찬밥 한 덩어리를 들고 아들이 있는 인천 감리소로 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치하포 의거'(아래 상자기사 참조)로 아들 김구 선생이 '인천 감리소'에 수감 중이기 때문이다.
 
곽낙원 여사의 동상 앞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임시 정부 요인들에게 김치라도 먹이고 싶어 시장 거리 버려진 야채 더미에서 매일 배춧잎들을 주웠다'는 일화를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진 일화보다 훨씬 많은, 몇 겁의 고통스러운 일들이 김구 선생의 가족과 여사에게 있었으리라.
 
"… 저러한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님은 참말 갸륵하시다! 십칠년 징역을 받을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백범일지> 어머니 회고
 
이런저런 생각에 여사의 동상 앞에서는 매번 발을 쉽게 떼지 못했었다. 그러니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걸음은 자연히 숙연할 수밖에 없다. 2층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것은 <백범일지>(보물 제1245호)를 저술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김구 선생과 백범일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백범일지가 보물?
 
청소년기에 읽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읽고 싶던 지난 10월 초 어느 날 우연히 백범일지가 보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친필이 궁금해 지난 2006년 2월 <장보고 김구 앙드레 김>(이우탁)이란 책을 읽으며 '한번 꼭 가보아야지!' 다짐했으면서도 까닭 없이 미루다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을 찾게 되었다.
 
<백범일지>가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선생이 당시 독립운동 관련 사실들을 친필로 상세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아들에게 쓰는 편지형태로 적은 두 권의 <백범일지>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적으로 무척 중요한 자료이다. 그래서 보물이다.
 
혹은 말한다. 6·25 동란으로 수많은 문화재와 기록이 유실된 터에 <백범일지>마저 없었다면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 등은 훨씬 오랫동안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독립운동 관련 사실이 우리에게 훨씬 늦게 알려졌을 것이며 많은 부분이 지금처럼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중략)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백범일지> 설명 중에서)
 
 1947년에 국사원이 발간한 필사본 <백범일지>
이런 <백범일지>가 올해로 발간 60주년이다. 1947년 12월에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에 의해 국사원에서 처음 발행된 이후 올해로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발간 환갑을 맞이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민족의 자존을 안겨준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 우리뿐이랴. <백범일지>는 일본, 중국, 독일, 영국에서도 출판되어 꽤 많이 읽힌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백범일지>(출판물)만해도 이십 여종. 대략 몇 종, 어느 정도나 책으로 나온 걸까?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백범 기념관, 즉 백범 김구 기념 사업회에서조차 근사치에 가까운 통계는 힘들다고 한다. 최근에 잠정 집계한 것만으로 어른용 50~60종, 어린이용 50~60종이란 것밖에는 말이다.
 
이것은 조국 광복과 자주적인 통일 등 민족과 겨레를 위해 살았던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 가족들이 저작권을 겨레에게 돌렸기 때문에 출판 제약을 받지 않아 여러 출판사에서 <백범일지>를 출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범일지>를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있는 저마다의 감동만큼이라는 표현이 마땅할지도 모르겠다.
 
백범 기념관 2층 전시실에는 이 <백범일지>가 전시되어 있어서 선생의 국한문 혼용 친필을 직접 볼 수 있다. 영인본이어서 선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틀려서 고친 부분이나 번호를 다시 매긴 부분 등을 직접 볼 수 있는데 <백범일지>를 읽으며 선생의 사상과 이념, 독립 운동 관련 이야기들을 만나던 감동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민족의 스승으로 어렵게만 느껴지던 선생의 친필에서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과 장난기도 얼마쯤 지닌 천연덕스러운 면까지 어림짐작 느낄 수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잠시,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국 독립의 중심에 있었던 선생의 흔적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동스럽고 숭고해진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중략) 더우기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백범일지> 설명 중에서)
 
개관 5주년을 맞이한 백범 기념관
 
백범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난산으로 태어난 선생의 유년시절을 비롯하여 교육 계몽이나 동학 의병 활동, 치하포 의거 등 1919년 상하이 망명 전의 자료들을 만날 수 있고 2층 전시실에서는 상하이 망명 이후 선생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안전까지 포기하였던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의 이름과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매번 마음이 숙연해진다. 독립 자금 모금을 위하여 미주 교민들에게 편지 쓰기 운동을 펼쳤던 선생이 쓴 편지도, 윤봉길이나 이봉창이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김구 선생에게 제출했던 이력서 등도 눈길을 끈다.
 
이뿐이랴. 한인 애국단, 장제스와의 만남,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 등 굵직굵직한 독립 운동 관련 자료들과 광복 직후 조국의 자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선생이 서거하기 전까지 고단한 한국 근대 굵직한 사건들이 시대별 흐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덕분에 많은 일이 한꺼번에 거센 태풍처럼 몰아닥친 시기라 알고자 들면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당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는 정리되었다고 할까?
 
10월 초에 우연히 시작된 첫 관람 이후 11월 2일까지 다섯 번을 관람하는 동안 말이다. 정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책을 통하여, 혹은 삼일절이나 광복절 특집 방송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이야기가 고스란히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실까지. 개관 5주년을 맞이한 백범 기념관에 좀 더 일찍 갔더라면 역사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깊지 않았을까?
 
 김구 선생의 유품들
 백범기념관 2층 전시관에 있는 이봉창의 친필 편지와 윤봉길의 친필 이력서
 <백범일지>(영인본 촬영)
백범기념관에서 구입한 <백범일지>(백범 학술원 편,나남 출판사, 9800원)를 읽으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자 5번째로 백범 기념관을 찾았다. 하지만 몇 번 더 찾게 될 것이다. 광복 이후의 복잡한 한국 근대사가 머릿속에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2층 전시실 광복관부터 서거까지 본격적으로 관람할 작정이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하여 믿고 찾아가면 될 만큼 귀중한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전시한 곳이 백범 기념관이다. 이처럼 좋은 자료가 많은 전시물 앞에서 매번 아쉬웠다. 단체 관람은 많다는데 평일 일반인들의 관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백범일지>를 읽고 감동을 느끼며 선생을 존경할 때보다 백범 기념관을 찾아 선생의 일생을 만나는 동안 더 깊이 알게 되었으며 존경하게 되었다고 할까?
 
청소년기에 읽었던 <백범일지>를 이 가을에 다시 읽으며 도드라지도록 감동스러운 부분은 상권의 마지막, 선생이 172라는 숫자를 매긴 페이지다.
 
"(중략) 아비로서 너희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 너희들을 키운 것은 사회이니 너희는 너희를 키워준 사회에 헌신하여라…."
 

 

'치하포 의거'(1896년)란?

 

김구 선생은 동학 의병 활동에 가담, 팔봉 접주로 ‘해주성 전투’에서 선봉으로 싸우지만 관군과 일본의 신무기에 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선생은 황해도 신천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면서 안중근과 안명근,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선생은 스승 고능선의 권유로 조국 회생의 염원을 품고 청국과 간도 지역 등의 정세를 알기 위해 길을 나서게 된다. 이런 중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듣고 귀국하는데 황해도 치하포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만난다.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가담한, 일본이 촉망하는 스찌다였다. 선생은 치하포에서 만난 이 일본인을 죽임으로써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민족의 치욕을 씻고자 한다. 이것이 치하포 의거요, 선생이 본격적으로 조국의 독립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속 사진은 일반인의 촬영이 금지되었으나 백범 기념관의 허락을 얻어 촬영했습니다. 사진 촬영 허락과 자료를 협조해준 백범 기념관(백범 김구 기념 사업협회)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선생의 고액 화폐 확정도 축하드립니다.

백범기념관은 서울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①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백범 기념관 홈페이지(www.kimkoomuseum.org)에서 볼 수 있다.


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돌베개(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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