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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이같은 대사는 보통 조선시대를 그린 사극드라마에서 신하가 왕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할 때 쓰는 말임을 볼 수 있다. 왕이 하사한 술을 '어주'라고 하듯 왕이 내린 것은 모두 그 명칭이 다를 만큼 절대권력을 가진 왕의 행위는 모든 게 아주 특별하게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충(忠)을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멀리 유배를 가서도 임금을 그리며 시를 통해 연모의 정을 나타냈다. 그런데 이처럼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실에서 내린 은사물은 어떤 것이었을까?

은사첩 왕실에서 고산 윤선도에게 내려진 은사품이 적혀있다. 주로 쌀, 포, 잡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은사첩 왕실에서 고산 윤선도에게 내려진 은사품이 적혀있다. 주로 쌀, 포, 잡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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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신하와 백성들에 대해 여러 가지 예(禮)를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은사를 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어떤 공을 세운 신하나 백성들에게 특별히 상을 내려야 할 때 또는 어떤 일에 대해 감사나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할 때, 그리고 사적인 관계에서 의례적으로 선물을 줄 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하에게 은사가 내려졌다.

이처럼 왕실에서 내린 은사물을 기록한 문서를 첩으로 엮어 만든 '은사첩(恩賜帖)'이 해남윤씨가 녹우당에 전해져 오고 있다. 해남윤씨가의 종택인 녹우당에 전시되어 있는 '은사첩'은 인조와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윤선도가에 미(米)·포(布)·잡물(雜物) 등을 사급(賜給)한 사송장(賜送狀)을 모아서 첩(帖)으로 만든 것이다.

이 은사첩에서는 당시 왕실에서 내린 하사품목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보면 일상생활에서 주로 어떤 것들이 쓰이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종의 선물 목록인 '은사첩'에는 당시 최고의 권력이었던 왕실로부터 받은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로 이같은 선물들이 오고갔는지를 살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어떤 은사물이 내려졌나

녹우당에 소장된 '은사첩'은 건(乾)·곤(坤) 두 책으로 엮어져 있으며 윤선도가 왕으로부터 받은 유지, 전교를 비롯하여 왕실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발급한 문서인 은사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은사문은 고산이 인조 때 봉림대군(뒤에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로 있었던 기간에 받은 것이 대부분인데, 윤선도는 봉림대군의 사부였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장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선도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5년 동안 겸임하면서 왕실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윤선도에게 여러 차례 내려진 은사 물품과 은사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은사는 고산이 사부를 그만둔 뒤에도 몇 차례 있었지만 사부 시절에 받았던 은사처럼 일상적으로 행해지지는 않고 있어 대군사부에 대한 왕실의 예우가 어떠했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윤선도는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겼지만 특별히 사부를 겸하여 5년 동안 대군들의 사부로 있었는데 왕실의 대우가 융숭하여 대전(大殿), 내전(內殿), 대군방(大君房)에서 한달도 거른 적이 없을 정도로 하사품이 내려졌으며 한 달에 두어 번 내린 적도 있었다.

은사문 내용 윤선도에게 내려진 은사물은 주로 대군방에서 보내진 것으로 이는 윤선도가 봉림대군의 사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은사문 내용 윤선도에게 내려진 은사물은 주로 대군방에서 보내진 것으로 이는 윤선도가 봉림대군의 사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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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문은 대전이나 내전·대군방 등에서 내려졌는데 대전의 내수사는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로 왕실의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내수사에서 보낸 물품을 보면 소금이 가장 많고 이밖에 쌀, 콩, 조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은사물을 보낸 곳 중에서는 대군방(大君房)에서 보낸 것이 가장 많다. 이는 고산이 대군(봉림대군, 인평대군)들의 사부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대군방에서 보낸 물품들은 보내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윤선도가 대군들의 사부로서 강학청에 있었을 때는 벼루, 먹, 붓, 삭지 등을 보냈다. 또 고산이나 고산의 아들이 병이 있을 때는 향유가루, 육군자탕 10첩의 재료 등과 같은 의약과 날꿩고기, 생선, 날문어 등의 음식물을 보냈다. 그리고 윤선도의 생일에는 증편, 절육, 소육, 어만두, 정과, 오미자, 자두, 홍소주, 산삼편 등 푸짐한 생일 선물이 보내지기도 하였다. 또한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갈모와 부채를 12월에는 책력(曆日), 전약(煎藥), 황감(黃柑)등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은사물을 보면 보통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미(米)·포(布)·잡물(雜物) 등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사첩에 있는 주요 물품은 마른문어, 마른대구, 마른숭어, 마른붕어, 마른광어, 전복, 생선, 날대하, 날꿩고기, 날사슴뒷다리, 날웅어, 날노루고기, 잣, 당유자, 동정귤, 붉은소주 등이 있다. 또 후추, 부채, 말, 마포교초를 비롯하여 조금 희귀한 것으로 표범가죽도 있다. 이들 품목은 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에서 쓰는 식료품과 같은 성격의 물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실에서 보내는 은사물도 생활필수품과 같은 물품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일종의 물물교환과 같은 성격이 있지 않나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화폐의 유통이 조선후기로 들어서서야 활발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현물이 당시에는 훨씬 더 실용적이고 필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암일기 속의 선물 주고받기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를 보면 이러한 주고 받기식 선물이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암일기를 보면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보다 물물 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품들을 더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은사첩에서는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물품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에 반해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서는 당시 양반 사대부층이 서로 주고받은 것들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미암일기'를 보면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손님들이 찾아올 때 가지고 온 물품과 이에 대한 답례로 준 품목이 적혀있다.

이를 보면 단순히 선물이라기보다는 주고 받기식으로 물품교환을 통해 필요한 생필품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미암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는 물품에 관한 기사의 일부다.

미암일기 미암 유희춘이 기록한 미암일기에는 사대부가에서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주고받은 물품들의 목록이 적혀 있으며 대부분은 쌀 등의 잡물류가 차지하고 있다.
▲ 미암일기 미암 유희춘이 기록한 미암일기에는 사대부가에서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주고받은 물품들의 목록이 적혀 있으며 대부분은 쌀 등의 잡물류가 차지하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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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1567) 10월 초3일 : 해남의 성주(城主) 김응인이 팥 다섯 말, 젓 담근 게 40마리, 잡게 100마리를 항아리에 담아서 봉하고 마른 민어 세 마리와 함께 보내왔다."

"정묘년 10월 초5일 : 큰 초 한쌍, 메밀쌀 두 말, 찹쌀 두 말을 송충순의 집으로 보내 장례비용에 부의를 했다."

해남의 성주가 보낸 것은 주로 곡물과 식료품과 같은 물품이다. 그리고 장례비용으로는 곡물이 보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묘년 10월 초8일 : 임천현감이 보내준 먹을거리가 백미 한 섬, 깨 서 말, 찹쌀 서 말, 마른 민어 다섯 마리, 조기 열 두름, 마른 숭어 세 마리, 흰 새우젓 한 항아리, 뱅어젓 한 항아리, 누룩 한 동, 청주 한 동이었으니 참 푸짐하다."

미암은 처가 고향인 담양으로 주거지를 옮긴 이후에도 고향(출생지)인 해남에 남아 있는 누님과 첩에게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정묘년 10월 19일 : 해남의 경방자(京房子)가 윤동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안동대도호부사 윤복과 해남누님과 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또 성주 김응인 앞으로 청어를 파는 배에다 작은 묘표석 세 개를 실어 순천의 영춘(유희춘의 사촌동생)에게 보내달라고 가지고 왔다."

"신해(辛亥) 3월 26일 : 해남 누님의 편지가 왔는데 성주 이사영이 부임한 뒤로 정치를 인자하고 공평하게 하며 또 누님댁에 쌀 두 말과 어물을 주고, 첩의 집에 백미 두 섬과 장 한독을 줬다고 하니 감사하다."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는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간에 걸쳐 기록한 것인데 미암은 여러 관직을 거쳐 1575년에는 이조참판까지 오르는 것을 볼 때 정치적으로 실권을 누리고 있던 때 쓴 것이라 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이처럼 많은 물품들이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권세가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것이 생겨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았던 것이 당시 조선시대였다.

덧붙이는 글 |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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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 <민속원> 2012년, '녹우당'<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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