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공선옥 님이 두 다리로 사람들 삶터를 부대끼면서 적어 내려간 이야기책입니다.
▲ 겉그림 공선옥 님이 두 다리로 사람들 삶터를 부대끼면서 적어 내려간 이야기책입니다.
ⓒ 월간 말

관련사진보기

- 책이름 : 마흔에 길을 나서다
- 글 : 공선옥
- 사진 : 노익상ㆍ박여선
- 펴낸곳 : 월간 말(2003.7.5.)
- 책값 : 8500원


 〈1〉 우리 살림살이가 우리 세상 모습

오늘 아침은 조금 포근합니다. 어제 아침만 해도, 그제 아침만 해도 햇볕이 맑게 비추었으나 날은 쌀쌀했어요. 햇볕이 괜찮구나 싶어서 이불을 담벼락에 널었지만, 잘 안 마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을 아닌 가을이라서, 가을을 잊은 가을이라서, 가을이 이제 우리네 땅에 "한국사람들아, 나는 이제 한국땅에서 못 살겠다. 너네들이 돈벌이에 이름날리기에 무리짓기에 매달리면서 내가 깃들 조그마한 땅뙈기 안 남겨 놓는구나!" 하고 마지막말을 남기고 떠나는 즈음이라서 날씨 변덕이 대단합니다.

.. 그러나 배달호 씨가 다니던 회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이 두산이라는 민간기업으로 넘어갔을 때도 정부는 공기업의 실질적 주인이랄 수 있는 국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고 나자마자 한국중공업 노동자 천 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해고된다는 것은 그 노동자의 가정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가정이 깨지고 그 가정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  〈233쪽〉

왜 변덕스러운 날씨가 되었을까요. 올봄에는 왜 이리 하늘이 뿌연 채 무더웠으며, 올여름에는 왜 이리 벼락비가 쉴 새 없이 오래오래 쏟아졌을까요. 올가을에는 왜 이리 더웠다가 확 추워졌다가 오락가락일까요. 올겨울은 어떻게 될까요. 올겨울은 무시무시한 강추위가 몰아닥칠는지, 아니면 파리와 모기가 알을 깔 만큼 텁텁한 날이 될는지.

.. “요새는 마트라는 게 생겨 가지고 장사 안 돼요. 자가용 타고 마트 가서 싣고 가면 그만인데, 이런 데 누가 옵니까?” 그는 하루 종일 연탄난로 끼고 앉아,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테레비’ 보는 것도 중노동이라고 했다 ..  〈205쪽〉

엊저녁,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잠깐 들렀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는 목요일에 진도에 다녀왔다면서, "이제 헌책방도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봐."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생각이 '거기 낙후되었잖아요? 거기 지저분하잖아요? 거기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하면서 책을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 것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에 두는지 모르겠어. 기준도 없을 거야." 하는 말을 붙입니다.

책이면 그냥 책이지 헌책과 새책이 따로 없습니다. 공장에서 막 찍어서 잉크 냄새 폴폴 나는 책이 새책일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원고를 묶어서 펴낸 책이라고 새책일 수 없습니다. 절판되었던 책을 새로 찍으면 새책일까요. 서른 해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교보문고에서 사면 새책일까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옛날 문학과지성사 판으로 사서 읽으면 헌책일까요? 따끈따끈한 책을 교보문고에서 샀다고 해도, 책값을 치른 그때부터는 헌책인가요? 껍데기에 먼지 하나 안 묻히고 살며시 읽은 뒤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놓으면 새책 대접을 받을 수 있나요? 우리한테 새 것이란 무엇이고, 헌 것이란 무엇일까요.

.. 안동 하회마을이 좋았던 것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전시용으로 지어 놓은 ‘전통마을’이라면 정말로 끔찍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 삶을 위한 거래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갈수록 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만 있는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하면 하회마을은 그 얼마나 복받은 마을인가. 좀 뜬금없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사람을, 이웃을 반기지마는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담도 성벽같이 에워싸고 자물쇠도 철통같이 닫아 거는 것일까 ..  〈201쪽〉

헌책방 아주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기후변화도 다 사람이 만들어 가고 있잖아. 난데없이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붓는다든지……."

전국 곳곳에 새 길을 닦는다고 부산합니다. 전국 구석구석에 새 아파트 올린다며 법석입니다. 도시 변두리고 시골구석이고 공장을 끌어들여서 물건을 팔 수 있어야 지자체 벌이가 늘어나고 우리 살림이 나아지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백 억이나 수천 억 원이 손해라고 하면서도 지하철 공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 지역 지하철역은 큼직큼직 지어 놓습니다. 교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자동차는 마냥 늘어나야 하고 버스도 하냥 늘어나야 하며 지하철도 끝없이 늘어나야 합니다. 지구 한쪽에서는 머잖아 석유가 동이 난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기름먹는 자동차 생산을 자꾸 늘리려 하고,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찻길을 더 많이 더 넓게 늘리려고 합니다.

.. 그 노동, 그 땀,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이라는 것이 그곳에 사는 사람한테 어떤 의미인지를 시골살이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그 노동과 그 땀과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의 의미란, 말하자면 수 틀리면 돈으로 맞바꾸어 쉽게 손 털고 나갈 수도 있는 그런 종류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  〈172쪽〉

우리들 사는 집에서 일터까지 오가는 거리는 얼마쯤 될까요.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서 오가자면 얼마쯤 걸릴까요.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 얼마쯤 되지요? 한 시간 걷기를, 삼십 분 자전거 타기를 꺼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꼭 자가용을 몰고 ○○마트에서 쇼핑수레 한 가득 물건을 사들여서 차 짐칸에 그득그득 싣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마트에서는 비닐봉지 값을 얼마 받는다고 하며 비닐봉지 덜 쓰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파는 물건을 보면 낱낱으로 비닐포장을 하고 있으며, 끼워팔기하는 물건마다 비닐이며 랩이며 테이프며 덕지덕지입니다.

.. 인사동에 딱 들어서는데, 받은 첫 느낌은 새로 단장하는 데 돈 꽤나 들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사동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153쪽〉

요일에 맞추어 쓰레기를 나누어 내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사람들 집과 길거리는 조금 깨끗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내놓고 있는 쓰레기는 참말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서 꾸역꾸역 쓰레기산을 이루어 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제대로 삭을까요. 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우리들 집과 일터에서 때는 기름과 돌리는 에어컨에 들어가는 온갖 자원이, 냉장고며 가습기며 정수기며 텔레비전이며 전자레인지며 오븐이며 세탁기며 비데며…… 우리는 얼마나 알맞게 물건을 갖추어서 쓰고 있을까요. 꼭 써야 할 물건을 알맞는 자리에 두고 있는가요. 몇 해 쓰지 않고 내다 버리거나 '새 것'으로 갈아치울 물건을 유행 따라 돈푼 내며 주워모으고 있지는 않나요.

먼길을 나설 때,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일곱 시간이고 여덟 시간이고, 때로는 열 시간이고 달리면서, 이 나라 길을 내 몸뚱이로 끌어안았습니다.
▲ 길동무 자전거 먼길을 나설 때,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일곱 시간이고 여덟 시간이고, 때로는 열 시간이고 달리면서, 이 나라 길을 내 몸뚱이로 끌어안았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2〉 우리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겠지

가까운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가든, 서울에 있는 책마을 사람이나 동무를 만나러 가든, 가방에는 사진기 두 대를 챙기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앞에는 작은 가방 하나와 사진기가방을 멥니다. 꼭 행군을 앞둔 군인 차림새입니다. 늘 마주치는 이웃사람들도 "어디 여행 가셔요?" 하고 묻습니다. "늘 이런 차림인걸요."하고 대꾸하며 웃습니다. 동네에서도, 서울에서도, 또 다른 곳에서도, 긴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 얼굴을 보고는 "외국사람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산 같은 가방에 한쪽 손에는 늘 사진기가 들려 있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저는 저대로 자전거를 몰며 길을 나서고, 때때로 자전거를 집에서 쉬게 한 다음 두 다리로 길을 나섭니다. 자전거를 몰 때면 한결 먼거리를 네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달립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에도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걷습니다. 양말을 신지 않는 맨발 고무신 걸음이니, 남들은 한 해 남짓 신을 수 있다던 고무신도 여덟 달이나 열 달만 되어도 뒷축이며 바닥이며 다 닳아서 구멍이 나고, 발가락이며 발바닥이며 굳은살로 딱딱합니다. 늘 무거운 짐과 사진기를 짊어지거나 자전거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 손아귀는 굳은살이 깊게 박힙니다.

땀이 물줄기 되어 볼을 타고 흐르거나 방울이 져서 똑똑 떨어지더라도 걷거나 자전거를 몹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을 밟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나는 냄새를 맡습니다. 비록 나날이 답답해지는 바람이고 코가 매운 냄새로 비위가 거슬리고 속이 울렁거립니다만, 이 모습 이 삶 이 터전 이 사람이 우리들 이웃이요 우리 자신이며 우리 겨레이고 우리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 방 안으로 들어섰다. 냄새가 난다. 좋다. 그 방에서 나는 냄새는 바로 ‘옛날 엄마’ 냄새다. 신식이 아닌, 고생 많이 한 구식 엄마들만이 낼 수 있는 냄새가 바로 그 방에서 나고 있다. 나는 숨을 흠씬 들이킨다. 밖에서는 내린 눈이 녹아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  〈28쪽〉

골목길에서도 무서운 빠르기로 내달리는 저 시커먼 자가용 모는 양복쟁이 아저씨도 우리 한겨레입니다. 담배꽁초나 빈 과자봉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휙휙 던지는 젊은이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읊는 예닐곱 살짜리 꼬마아이들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차방귀 고스란히 들이마시는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1000원짜리 김밥과 가래떡을 파는 아주머니 할머니도 우리 이웃이요 한겨레입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날로 무뚝뚝해져 가는 어린 학생들도 우리 동생이며 한겨레입니다.

사천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만 가지 얼굴이 있고 사천만 가지 목소리가 있으며 사천만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사천칠백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칠백만 가지 모습에 사천칠백만 가지 꿈에 사천칠백만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나 꾸준하게 늘어나는 이 나라 사람들 숫자처럼 우리 삶이나 일이나 놀이나 이야기나 책이나 생각이나 몸짓이나 모양새들이 저마다 다르며 알콩달콩 어울린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한 가지로 틀에 맞춰지는 사천만, 또는 사천칠백만이 아닌지요.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인터넷을 즐기면 즐길수록 판에 박힌 길을 그예 달려가는 허수아비로 바뀌어 가지 않는가요.

전국 여기저기를 자전거로 돌아다닌 덕분에, 자전거 한 대는 그예 퍼져서, 더는 타고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림집 한쪽에 고이 세워 놓고는, 고맙다고, 참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 길동무 자전거 2 전국 여기저기를 자전거로 돌아다닌 덕분에, 자전거 한 대는 그예 퍼져서, 더는 타고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림집 한쪽에 고이 세워 놓고는, 고맙다고, 참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 "옥수수는 돈이 좀 되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묻기 싫은 질문을, 그러나 해야만 할 것 같은 약간의 의무감으로 묻고야 말았다. 돌아온 할머니 대답이, “돈이 되나 마나, 씨 뿌릴 때 됐으니 씨 뿌리고 거둘 때 되면 거두는 거지 뭐." ..  〈76쪽〉

살림집 앞으로 문구 도매상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어제 낮에는, 아스테이지를 사러 이 문구 도매상을 하나하나 들어가 보는데, 어느 가게에서도 아스테이지를 팔지 않습니다. 문구 도매상은 말 그대로 '도매상'일 뿐일까요. 아니, 이름은 도매상을 내걸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물건은 몇몇 가지로만 못박혀 있지 않을까요. 가만히 헤아려 보니, 문구 도매상과 가까운 거리에 초등학교가 세 군데 있고 고등학교도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도매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문방구붙이를 살피거나 찾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기는 내가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그래도 집집이 부엌문 겸 현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성냥갑 같은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들에 사람들은 갇혀 버린 듯이 느껴진다 ..  〈106쪽〉

지지난주에 부산 나들이를 하면서, '부산에 왔기에 맛볼 수 있는 밥은 무엇이 있고, 부산에 왔기에 느낄 수 있는 골목은 어디가 있으며, 부산에 왔기에 함께할 수 있는 삶터며 놀이며 무엇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어다녔습니다. 자갈치시장이 있고 국제시장이 있고 광안리니 해운대니 있는 부산이고, 부민동이니 광복동이니 오랜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골목은 많기는 하나, '부산다움'이 무엇인가는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사는 인천에서도, 가까운 수원에서도, 평택에서도, 천안에서도, 청주에서도, 대전에서도, 아산에서도, 홍성에서도, 익산에서도, 전주에서도, 그곳에 머무르기에, 또 그곳을 찾아갔기에 느낄 만한 삶터란 무엇일까 모르겠습니다.

살고 있는 땅이름만 다른 우리 나라일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살고 있는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가 다르며 흐르는 물과 바람이 다릅니다만, '그래 이것이군' 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이야기를 못 찾겠습니다.

.. 자신은 외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사람으로 자부심이 있고, 그래서 한국에 오면 더욱더 우리 말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런데 왜 공사판에서 전부 일본말을 쓰냐, 언어가 있는 민족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힘내자고 하지 않고 화이팅이라고 하더라, 말은 얼인데 이렇게 자기 말 천대하면 생김새만 한국사람이지, 다 외국계 민족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앞서 최씨가 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의 ‘배운 자’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  〈114쪽〉

우리네 구석구석 모두들 '먹고살기 어렵다'고 느껴서 그러할까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자원을 얼마나 헤프게 쓰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러할까요. 어떻게든 돈만 더 벌면 되지만, 돈을 더 벌어도 나보다 더 많이 버는 남이 있어서 벌고 벌고 또 벌어도 마음이 차지 않을까요.

우리는 얼마만큼 벌어야 비로소 '먹고살 만'하다고 느낄까요. 내 살림살이가 이웃 살림살이보다 얼마만큼 높거나 많아야 마음을 놓을까요. 내 차는 얼마나 커야 하고 내 집은 얼마나 넓어야 하나요. 차도 없고 집도 없이 살면 사람다움을 잃은 삶인가요.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바보인가요. 전세집이나 월세집에 살더라도 집옮길 걱정이 없이 오래오래 지내려는 마음이라면 너무 어리석은가요.

..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는 이유는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일 뿐이다. 그들은 이 땅에 주둔하는 게 아니고 점령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에는 이 땅의 민중들은 그들의 'Meal'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 땅은 삶의 터전이지만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이 땅은 다만 작전지역 중의 한 곳일 뿐이다 ..  〈146쪽〉

벼를 겨만 벗겨서 누런쌀로 먹으면, 깎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나 품이나 시간이 덜 듭니다. 누런쌀은 흰쌀보다 우리 몸에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누런쌀이 몸에 좋다는 지식은 머리속에 있어도 누런쌀을 먹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저잣거리나 쌀집에서 누런쌀을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덜 깎아 품이 적게 드는' 누런쌀이 '더 깎으며 품과 자원이 더 많이 쓰게 되는' 흰쌀보다 비쌉니다.

두 다리로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을 만납니다. 골목길에 내다 놓은 빨래를, 꽃그릇을, ......
▲ 길에서 만나는 두 다리로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을 만납니다. 골목길에 내다 놓은 빨래를, 꽃그릇을, ......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3〉 길사람

아침 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물끄러미 기찻길을 바라봅니다. 오늘 햇살은 제법 따사롭네요. 이불 널어 놓은 담벼락에 기대어 봅니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며 눈앞을 지나갑니다. 요 앞, 조그마한 텃밭에서 알을 깬 나비인 듯하네요.

도심지 골목길이기에 길바닥은 모두 시멘트바닥이지만, 골목집 사람들은 흙을 조금씩 퍼 와서 작은 꽃그릇을 마련하고, 돌을 쌓아 텃밭까지 일구곤 합니다. 옥상에 텃밭을 마련해 나무를 심는 분도 있습니다. 메마르고 팍팍하기만 하던 도심지 한켠은, 골목집 사람들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때로는 예순 해 동안 한 자리를 고이 지키면서 가꾸어 온 풀과 나무로 작디작은 숨구멍이 생깁니다. 이 작디작은 숨구멍에는 애벌레도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잎사귀를 뜯어먹었을 테고, 이 애벌레가 자라 흰나비도 되고 노랑나비도 되겠지요.

.. 그래, 아들아, 받아쓰기 좀 못해도 좋다, 영어 같은 거 안 해도 좋다, 그러나 풀빛 향기 가득한 오월의 저문 강가에서 어미와 함께 들었던 저 소쩍새 소리를 너는 기억하려무나. 눈물로 기억하려무나. 악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악이다. 무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음이 무기가 되고 흉기가 된다 ..  〈246쪽〉

마흔에 길을 나섰던 공선옥 님은 어느덧 마흔다섯 나이로 달려가고, 머잖아 쉰 살 나이가 되겠지요. 그 쉰 살에도 지금과 같이 길을 나서면서 살아가실까요.

생각해 보면, 공선옥 님은 마흔일 때만이 아닌 서른에도 길을 나섰습니다. 스물에도 길을 나섰고 열에도 길을 나섰겠지요. 다만 공선옥 님 스스로 그 나이에는 당신이 길을 나섰다는 생각을, 느낌을, 마음을, 넋을 부대끼지는 못했으리라 봅니다.

저도 그래요. 곰곰이 돌이키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든 골목길 나들이를 하든 저잣거리 장보기 나들이를 하든, 날마다 '길을 나서며'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 살고 있는 집사람이면서, 길에서 사는 길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내 동무 모두 집사람이며 길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며 돈벌이에 매여 있는 동무들도 '멀고 먼 자기 꿈을 이루기까지 힘들고 고달픈 길을 돌고 돌아’
' 길을 떠난 셈입니다. 인천 배다리 골목에 뿌리를 내려 쉰 해나 일흔 해를 살아온 아주머니 할머니도 '어디 먼 구경 다녀 본 적'은 없다고 해도, 바로 이 뿌리내린 동네 한켠에서 늘 길을 나서면서 살아온 셈이에요.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여기는 꽃집이네!" 하는 집을 수없이 만납니다. 아니, 골목집은 모두 꽃집이라고 느낍니다. 낡거나 구멍이 나서 버릴 만하다고 생각하는 고무다라이나 항아리도 테이프를 붙이거나 이래저래 깨진 데 메워서 꽃그릇으로 씁니다.
▲ 길에서 만나는 2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여기는 꽃집이네!" 하는 집을 수없이 만납니다. 아니, 골목집은 모두 꽃집이라고 느낍니다. 낡거나 구멍이 나서 버릴 만하다고 생각하는 고무다라이나 항아리도 테이프를 붙이거나 이래저래 깨진 데 메워서 꽃그릇으로 씁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사람마다 자기 길이 있고, 사람마다 제 깜냥과 주제대로 길을 나섭니다. 어떤 이는 몇 천 킬로미터 바깥까지 길을 나서고, 어떤 이는 몇 백 미터 테두리에서만 길을 나섭니다. 더 먼 데까지 나간다고 더 홀가분하거나 즐겁게 길을 나서는 셈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까운 테두리까지만 길을 나선다고 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길나섬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백 살까지 살아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스물밖에 못 산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한 달에 십오만 원 가까스로 번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기가 길사람을 느끼고 언제나 길나섬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어느 곳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부대끼더라도 아름다운 자기 삶터를 두 발로 튼튼하게 디디며 걸어가고 있는 멋있는 사람, 곧 멋사람이라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공선옥 님 <마흔에 길을 나서다>를 읽으며, 제가 떠나고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헤아려 봅니다. 공선옥 님 스스로 당신 발자국을 돌아보는 길나섬은, 우리들한테는 우리들 스스로 저마다 걷고 있는 길이 어떤 모습인가를 또렷이 돌아보자는 조그마한 말건넴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월간말(2003)


태그:#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길나섬, #책읽기가 즐겁다, #길사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