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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니, 할머니 아직도 옥수수가 이렇게 많아요?"

"아, 자슥들 주려고 늦옥수수 심었제. 추석에 맞춰 따면 집으로들 가져가고 좋지."

"맛있겠네요?"

"그렇게 맛있어 보이면 서울양반도 꺾어서 드시유."

 

가을하늘을 찌를 듯 옥수숫대는 높았다. 총총한 옥수숫대 사이를 오가며 잘 익은 옥수수를 꺾는 물골할머니의 손놀림이 바쁘다. 내가 막 물골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추석을 맞이하여 자식들이 손주손녀를 데리고 물골에 찾아와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난 뒤 돌아갈 준비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물골이 북적거린다. 잔치의 흔적을 더듬어보면서 물골할머니의 자식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 옥수수를 따는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다듬은 옥수수를 망에 담아 차에 싣고 하나 둘 떠날 때 마다 서운한 마음이 조금씩 베어나온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열린 옥수수종자

 

 
"할머니, 옥수수종자를 무척 많이 남기셨네요?"
"저 정도는 심어야 추석때까지 꺾어줄 수 있지유. 여름부터 가을까지 올 때마다 따서 보내는 재미도 좋고. 우리 아이들이 옥수수를 좋아하거든."
"저도 무진장 좋아하는데."
"서울양반, 내 거기것도 많이 남겨놓았은께."
"제 것도요?"
"그려, 일년 살다보니 자식들보다 더 많이 왔으니 자식같제."
 
할머니는 추석음식을 하나 둘 차려서 먹어보라고 내어놓고는 가마솥에 옥수수를 삶기 시작했다. 올해 작지만 물골에 농사를 지면서 이런저런 맘고생을 많이 해서 내년에는 농사를 짓지말자고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서울양반, 저기 밤나무 아래 가봐. 밤 많아. 뱀이나 말벌집 있을까봐 우리 영감이 풀도 다 쳐놨으니까 많이 주워가."
"저희들 몫까지 남겨두셨어요?"
"줍는다고 다 먹나? 금방 벌레 먹는 걸, 그리고 다람쥐 먹이로도 남겨둬야지."
 
밤나무 아래에 서니 반짝반짝 윤이 나는 알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손이 달만한 나뭇가지에도 아람든 밤송이들이 보물을 품에 안고 가을빛에 까딱거리며 졸다가 품었던 알밤을 놓친다.
 
 

옥수수의 키가 제 아무리 커도 어머니 사랑만 할까

  

한 해가 되기도 전에 쑥쑥 자라 가을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옥수수, 그 총총한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를 꺾는 할머니의 키가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옥수수의 키가 제아무리 커도 어머니의 사랑만 하지 않을 것이요, 옥수수 알갱이가 아무리 실하게 여물었어도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만 못할 것이다.

 

"자식들이 다 가니 쓸쓸하세요?"

"아녀, 이제 품에 안고 살믄 되고, 영감생일, 설날 뭐 하면 한 달에 한 번씩은 보니께. 너무 자주봐도 그려."

"피곤하실텐데 좀 쉬셔야지요?"

"메밀배추전은 특별히 만든거니까 다 드시고, 옥수수는 딱딱해지면 다시 쪄서 먹으면 부들해진다우. 그리고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밤이 별로 맛이 안나. 찐밤보다는 날밤 까먹는게 더 맛나. 아니면 냉장고에 좀 넣었다가 먹든지. 그런데 벌레 먹은 것은 이틀만 지나면 먹을거 없으니까 미리 삶아 먹고."

 

마치 자식들에게 살림살이를 가르치시듯 한다. 할머니의 산소에 올라가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생각해 본다. 그 어느 것보다도 높고, 깊고, 넓은 어머니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있는 것이니 새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준 것은 잃어버리고, 주지 못한 것을 기억하는 어머니들
 
"할머니, 옥수수 따서 다 주고 나면 아깝지 않으세요?"
"아깝긴, 어차피 영감하고 둘이 다 못먹을테고, 안 그러면 쇠죽으로 다 먹일텐데 뭐. 그러고 자식들 한테 주는거 아깝다고 하는 부모가 있나?"
"그러네요. 늘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하시는 것이 부모님들의 마음이라고 하데요."
 
그랬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준 것은 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가 보다. 옛날 이야기를 듣다보면 늘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들만 있다. 그러고보니 나도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 늘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다. 자식은 늘 불효자인가 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나는 목사고, 할머니는 갑천에 있는 작은 교회를 출석하시는 권사님이시다. 그런데 그 웃음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미륵불'을 보는 듯하다고 밖에는.
 
그렇게 자식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물골에도 밤이 왔다. 구름이 간간히 끼어있긴 하지만 보름달이 떴고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온다. 풀벌레 소리가 높아지는 만큼 보름달도 높아지고 물골은 달빛에 물들어 수묵화 속에 들어있는 듯 착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그 곳에 있었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걷기도 하고, 작은 실개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물골 노부부는 저녁 8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을 30분 앞두고, 물골에서 나왔다. 아파트와 콘트리트에 묻혀버린 고향, 그 곳을 떠나 고향 아닌 고향을 다녀오는 길임에도 긴 귀경행렬 속에 나는 고향에 다녀오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조금 막히는 것도 고향가는 맛, 돌아오는 맛의 하나인 것 같다. 오랜만에 나도 고향을 다녀오는 기쁨을 맛본 추석이었다.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석 풍경> 응모글


태그:#물골, #옥수수,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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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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