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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옛집으로 가는 길.
 녹두장군 옛집으로 가는 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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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태풍이 밀고 온다는 일기예보도 들린다. 그러나 일단 계획한 답사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길을 나선다. 역사기행이란 무엇인가. 요즈음 내가 <오마이뉴스>에 이런저런 여행기를 쓰고 있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닌 곳이 많은 걸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터.

그러나 젊었을 때를 제외하면 내 여행의 역사란 사실 보잘 것 없다. 난 문화유적 답사니 무어니 하는 것 자체를 별로 시덥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다. 몇 년 전엔가, 어느 단체에서 하는 답사를 졸레졸레 따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 보니 답사라는 게 일종의 고고학적 지식 '집어넣기'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식의 답사나 기행은 자칫 역사를 단순히 지식으로 전락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는 왜 갑오농민군의 전적지를 찾아가는가. 100여년 전의 역사에서 나는 무엇을, 어떤 삶의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만석보와 백산, 그리고 황토재 등 갑오농민군의 옛 싸움터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비록 동학혁명의 빌미가 되었던 학정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수탈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행여 내용과 형식을 달리한 채 아직도 우리 곁에 엄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첫 번째 행선지는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사적 293호 전봉준 고택이다. 신태인 근방을 지나자 퇴색한 건물들의 벽 여기저기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미 FTA 통과시킨 김원기는 정읍에 올 수 없다." 'Free(자유로운)'란 낱말은 얼마나 불공정하고 무자비한 규칙을 등 뒤에 감추고 있는가.

사적 293호 전봉준선생고택지.
 사적 293호 전봉준선생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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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안채.
 고택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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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인가, 전봉준 선생인가

마을 입구에서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은 일직선이다. 전봉준 장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미처 가다듬을 짬도 없이 금세 고택에 닿고 만다. 고택 담장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을 들여다 보니 전봉준 선생 고택지라 쓰여 있다. 전봉준 선생이라. 뭔가 어색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본다.

그가 한때 서당 훈장을 했대서 선생이라 했을 까닭은 없고, 그 학문이나 인격이 출중해서 그쪽만을 기리자는 호칭일까.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선생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못하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러한 호칭은 어디까지나 그가 담당했던 역사적 사실의 종합적 평가여야 하므로 이순신 장군이지 결코 이순신 선생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 전봉준 선생, 이순신 선생 하고 뇌어보다가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전봉준 장군이지 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 송기숙 산문집 '녹두꽃이 떨어지면' 중에서

백배, 아니 천 배나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아마 지하에서 녹두장군이 이 안내판을 읽는다면  "이거, 영 쑥쓰럽구먼!"이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까.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전면에 앞면 4칸, 옆면 1칸에 초가지붕을 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작지만 잿간을 겸한 변소가 있는 헛간채도 있다. 원래는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였다고 하는데 복원할 때 한 칸을 더 늘려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는 이곳이 아니다. 이견이 있지만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집에서 살았던 것은 고부 농민봉기를 전후한 3년 가량으로 전해진다.

1974년 이 집을 해체·보수할 당시 '무인 2월 26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무인년이라면 1878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때 이 집을 처음 지었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고부 봉기 후 안핵사 이용태가 불을 질렀다고 하는데 전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누군가 채 타지 않은 집을 수리하여 계속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一)자 형태로 구성된 안채는 마당에서 바라봤을 때 우측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 순서로 돼 있다. 큰 방에는 세로로 그리 길지 않은 시렁이 걸쳐 있고, 윗방에는 장롱과 고리짝, 다듬이가 놓여 있다. 두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라 할 수 있다.

고택에서 옛 고향집을 떠올리다

서까래 아래 걸려 있는 사각등.
 서까래 아래 걸려 있는 사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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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살문.
 대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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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내게 고향집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규모만 나의 고향집이 약간 클 뿐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내 고향집에도 석가래 아래엔 사각등이 걸려 있었다.

여름날 저녁 무렵, 등을 켜면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박각시 등 온갖 나방들이 몰려들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나무판자 대신 대나무로 짠 툇마루에 앉아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까먹곤 했는데, 한 손으로는 다슬기를 까면서, 한 손으로는 나방을 쫓던 기억이 새롭다.

방문 역시 대나무로 살대를 교차시킨 대살문이었다. 살대가 끊어지면 그 부분만 다시 살대를 이어 붙였다. 지금껏 복원된 초가들을 적잖이 보아 온 터인데 내가 보기에 이 전봉준 고택은 상당히 사실에 가깝게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한 칸 더 크게 지은 것만 빼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오랜만에 1984년에 나온 최두석의 시비 <대꽃> 속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전봉준의 토담집 봉창의 한지가 바람에 울고 있었다. 이 울음은 조선 모든 초목의 이파리에서 공명하여 논밭에 잠든 손을 깨워 일으켰다. 콩밭 수수밭 고구마 넝쿨을 헤치고 손은 서릿발 선 논둑을 걸어 맨발로 봉준의 사립을 밀었다. (열린 문으로 수십 인의 농군이 뛰쳐 나갔다.) 손이 봉준의 헛간에서 두엄을 치고 여물을 써는동안 농군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넘실대는 만석붓물이 아니더라도 분노의 봇물은 터뜨려 동네동네를 뒤덮어 흘렀다. 이 물결을 이끌고 봉준은 부안, 정읍, 고창, 무장, 영광…. - 최두석 시 '대꽃 2 - 전봉준'

그렇다. 갑오동학혁명은 샛바람에 부르르 떠는 문풍지의 울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승냥이 울음 같은 소리가 "조선 모든 초목의 이파리에서 공명하여 논밭에 잠든 손을 깨워 일으" 킨 것이다.

전봉준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몇 가지

뒤꼍의 항아리 굴뚝.
 뒤꼍의 항아리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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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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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뜰로 돌아가자 몇 개의 항아리가 놓인 장독대가 있다. 그리고 담장에 붙은 굴뚝이 있다. 항아리로 만든 연통이 인상적이다.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재판장의 신문에 전봉준은 "사(士)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전한다(전봉준 1차 공초). 그리고 "소위 (동학의)접주라 하는 사람은 평상시는 어떤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별로 행하는 일이 없다"라고  답한다(전봉준 2차 공초).

이미 몰락해버린 양반 계층이었던 전봉준. 서당 훈장 노릇을 했다지만 때로 농사일에 품을 팔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 윗동네 서당에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서당 훈장은 보리타작이 끝나면 보리 두어 말을 받았고 가을이면 다시 쌀 두 말 정도를 받았다.

뒤꼍에 저렇게 장독이 있었다면 그 중엔 아마 쌀 독아지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고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곡창 지대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가 거의 1세기 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곤궁했을 살림살이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아마도 아침은 늦게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초저녁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리라.

그가 담배를 피웠는지 피우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담배를 피웠다면 아이들 앞에서 차마 배고픈 내색을 하지 못한 채 뻐끔뻐끔 담뱃대를 빨면서 연신 헛기침을 해댔을 전봉준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분탄을 이기지 못해 이 일을 하였노라

공동우물.
 공동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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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마을 앞 들판.
 조소마을 앞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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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하의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 전봉준 장군은 1895년 3월 29일에 손화중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다시는 이 고택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옹색한 고택 대신 역사라는 커다랗고 영원한 집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푸르고 싱싱한 녹두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만 고택을 나선다. 되돌아나오는 길에 동네 초입에 있는 공동우물을 들여다 본다. 땅 위로 석단의 돌을 쌓은 데다 뚜껑도 아주 무겁다. 그 당시에 이렇게 돌을 쌓았을 리도 없고 뚜껑을 덮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 우물은 도에 너무 거창하게 복원된 것이 틀림 없다.

마을을 걸어나오면서 들판을 바라본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농토란 없으면 없어서 서럽고, 있으면 가렴주구의 대상이 되어 서러운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저 들판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색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저 들판을 바라보며 봉기를 꿈꾸고 어떻게 조직을 꾸릴 것인가를 구상했을 것이다. 어쩌다 말목장터에서 열리는 5일장에라도 가게 되면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너는 어떤 계책으로 탐관을 제거하려고 하였느냐?
_별도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심의 간절한 바가 안민에 있으므로 탐학을 본즉 분탄을 이기지 못해 이 일을 하였다. - 서기 1895년 2월 11일 제2차 신문 공초


그는 제2차 신문 공초에서 말하길 별도로 계책이 있어 동학혁명을 일으킨 게 아니라 공분 때문이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1968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발통문의 존재는 이 진술을 뒤엎고 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둥근 원 주위에 전봉준을 포함한 20명의 서명자 명단을 한자와 한글로 쓴 연통문을 말한다.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도록 이름을 차례대로 써넣지 않고 둥근 원의 형태로 써 넣은 것이다. 만약 이 사발통문이 사실이라면 전봉준은 동학혁명의 첫 단계인 고부 봉기 때부터 상당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발통문은 아직도 '진짜냐, 가짜냐'라는 논쟁에 휘말려 있다. 어쨌든 내 다음 행선지는 사발통문 발견지와 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이 될 것이다.


태그:#전봉준 고택, #동학농민혁명, #녹두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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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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