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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 지옥의 문
ⓒ 배지영
▲ 모두 스물 두 곳에서 유황이 끓어오르고 있다.
ⓒ 배지영

아침부터 지옥을 보러 갔다. 로토루아 시내에서 로토루아 공항을 지났다. 운전하는 현기는 헛갈리는지 "숙모, 여기가 맞나 지도 좀 봐 줘요" 했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도 어색했다. 남의 나라를 렌터카로 다니면서 단 한 번에 목적지를 찾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현기는 차를 멈춰서 살펴보더니 방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로변에 '지옥의 문'이 있었다.

지옥의 문은 입장료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마오리들은 화산지대 입장료와 따로 돈을 내고 하는 스파에 대해서 얘기해 줬다. 우리는 모텔 샤워 꼭지에서도 온천물이 나오는 로토루아에서 나흘을 묵었다. 머드팩 1만 개를 풀어서 파헤쳐놓은 스파가 있다는 마오리들의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곳은 마오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다. 로토루아 시내의 와카레와레와 지열 지대가 20m 넘게 솟구치는 온천물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라면, 지옥의 문은 조붓했다.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어서 로비가 통하기도 한다면, 지옥의 문은 특별 대접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지옥의 휴양지쯤으로 보였다.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왜 지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느낌이 온다. 1시간 정도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지옥의 문은 모두 스물 두 곳에서 유황이 끓어오르고 있다. 화산 저 밑바닥의 진흙은 끓어올라 말라서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도 화산 구멍이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발랄하게 끓어올랐다.

▲ 악마의 목욕탕, 수심 6미터에 유황이 끓는 온도는 95도.
ⓒ 배지영
지옥의 문에서 처음 만나는 곳은 악마의 목욕탕이다. 수심 6m(어떻게 쟀을까)에 95도가 넘는 유황이 끓는다. 우리 아이가 생각하는 악마는 머리 모양에 신경을 쓰며 '썩소'도 날린다. 아이의 악마는 반신욕을 할 것 같은데 마오리들의 악마는 목욕탕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잠수를 하는 듯 했다. 아마도 마오리들 악마의 머리 모양은 '올백'이겠다.

지옥의 문 전체 분위기는 '전설의 고향'에서 본 저승길과 닮아 보였다. 유황은 쉴 새 없이 팔팔 끓어올라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냈다. 사진을 찍다가 뒤처진 나는 놀랐다. 저만치 앞서 걷는 작은 누나와 현기, 우리 아이가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유황은 쉴 새 없이 팔팔 끓어올라 드라이아이스 효과를 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 배지영
두 번째 화산 후리티니 못은 비극을 담고 있었다. 마오리의 한 공주는 집안싸움 때문에 이곳에서 자살했다. 엄마가 왔을 때, 딸의 흔적은 100도를 넘으며 펄펄 끓는 연못가에 남겨진 외투뿐이었다. 후리티니 맞은편에는 유명한 탐험가가 이름 붙인 지옥의 문이 있었는데 유황은 끓어오르며 소용돌이를 쳤다. 작은 누나는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네 번째부터 집중력이 떨어진다. 우리 아이는 가위 바위 보 같은 것도 '한국인은 삼세 판'이라며 한판승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패배를 받아들이게 애 쓴 내 수고는 결국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그래서 네 번째부터는 안내문을 읽지 못했다. 차례대로 유황 목욕탕, 지옥, 유소년, 수면 못을 지나서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돌았다.

지옥치고 좀 시시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안내도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아냐, 더 갈 수 있어. 숲 쪽으로 가야 해."

▲ 카카히 폭포, 사람들은 남반구에서 유일한 지열 폭포 아래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 배지영
우리는 작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카카히 폭포가 나왔다. 남반구에서 유일한 지열폭포라는 카카히는 사람이 기분 좋다고 느끼는 38도를 유지한다. 폭포 아래서 샤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폭포 위 계곡에는 순수 유황이 깔려있어서 채굴 사업을 벌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높은 임금 때문에 사업은 실패했다. 그 사람에게 이곳은 진짜 지옥이 돼 버렸다.

숲을 벗어나자 우리가 처음 지나온 곳과는 딴판인 세상이 보였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예쁘고, 뉴질랜드 고유의 키 큰 나무들이 펄펄 끓는 온천 사이로 드러났다. 우리는 화산 곳곳에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3초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아이는 화산이 끓는 구멍에 모래를 던지고, 작은 누나는 현기가 뽀뽀를 퍼부어도 "다 큰 자식이 징그럽게 왜 이래?" 하지 않았다.

▲ 잡목 숲을 지나자 다른 분위기의 지옥이 나왔다.
ⓒ 배지영
▲ 유황 곳곳에 손을 집어넣어 봤다. 뜨거워서 3초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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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뜨거운 진흙탕물이라는 악마의 가마솥도 바짝 붙어 들여다봤다. 마오리들이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불렀던 작은 화산 구멍들은 갯벌에서 게가 숨어드는 것처럼 벌어졌다가 닫혔다. 마오리들이 손으로 짠 바구니에 음식을 넣고 30분 정도 담가놓으면 음식이 저절로 됐다는 요리하는 못에서는 작은누나를 음식이라고 밀치는 장난도 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실버 펀(silver fern)을 봤다. 실버 펀은 우리나라 고사리와 비슷한데 크기가 훨씬 크고, 뒤집어 보면 은색이다. 수십 가지의 고사리 종류 중에서 마오리들 삶에 빛이 되었다. 마오리들은 밤중에 먼 길을 갈 때면 실버 펀을 길 위에 떨어뜨렸다. 실버 펀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고, 마오리들은 아무리 멀리 가도 집으로 돌아왔다.

▲ 실버 펀, 고사리보다 크고, 뒤집어 보면 은색이다. 그래서 마오리들은 밤길을 갈 때 실버 펀을 떨어뜨리면서 갔다.
ⓒ 배지영
실버 펀을 들고 어두운 곳으로 갔다. 빛이 났다. 우리 아이가 야광 팬티를 입고서 잠들기 싫다고 불 꺼버린 방안에서 돌아다닐 때처럼 선명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도로에 깔린 흰 조약돌을 보며 '헨델과 그레텔'의 오빠가 주머니에 하얀 돌을 모으는 장면을 이해했다. 마오리들에게는 실버 펀이 들어간 옛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오래전, 밤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등에서도 나오는 것을 알았다. 가로등이 없던 시골에 살 때 엄마를 따라 친척 집 제사에 갔다. 돌아올 때는 잠 든 채 엄마 등에 업혔다. 고양이 소리도 귀신 소리로 알아듣던 엄마는 "내 딸 잔가?" 물으면서 업고 있는 존재가 여우나 귀신이 아닌 이녁 새끼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셨다. 나는 바깥 기운에 잠을 깼지만 기척하지 않았다.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 엄마 등에서 나오던 소리는 지금도 잊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 해밀턴, 로토루아, 타우포, 파머스턴 노스를 렌터카로 다녔습니다. 글에 나오는 작은 누나는 우리 아이의 고모, 제게는 시누이입니다. 그러나 시누이와 올케라는 호칭이 조금 서럽게 느껴져 저는 작은 누나로 씁니다.


태그:#지옥의 문, #악마의 목욕탕, #뉴질랜드, #유황, #마오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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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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