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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고롱고로 고원의 심바 캠핑장을 떠나 아침 일찍 사파리의 대명사인 세렝게티(Serengeti)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겨울 추위 같은 한기와 이슬이 맺힌 풀들을 보면서 한참을 내려오니 그 사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1시간 정도 달리자 세렝게티 공원의 입구가 나타났다.

나비 힐 게이트(Naabi Hill Gate)라 불리는 공원 매표소에는 세렝게티 공원에 대한 설명과 여행객의 주의사항 등을 적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공원관리소의 설명문에는 세렝게티 평원(Serengeti Plains)은 세렝게티 국립공원과 응고롱고로 보호구역을 모두 포함하는 "초원의 바다(Sea of Grass)"라고 되어 있었다.

사파리 차량의 운전사가 공원 출입 수속을 밟는 사이 나는 매표소 왼쪽에 있는 작은 바위 산에 올랐다. 작은 바위산 위에 오르니 탁 트인 세렝게티 초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넓은 초원을 보니 가슴마저 뻥 뚫리는 기분이다. 세렝게티 대평원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텔레비전 프로인 '동물의 왕국'의 단골 촬영지이자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가 얼룩말과 함께 뛰어 놀던 세렝게티 대초원. 작은 나무들인 관목만이 가끔 보이고 넓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지평선이 보일 정도다. 초원 넘어 또 초원이 이어졌다. 세렝게티라는 말 자체가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약 3~4백만 년 전에 형성된 이 세렝게티 대평원은 화산재가 대초원에 쌓이면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 나무는 살지 못하고 풀이나 작은 나무만 자라는 사바나 초원이 됐다. 우리나라 강원도(1만6613㎢)와 비슷한 1만4763㎢의 엄청난 크기다.

동쪽으로는 응고롱고로 국립공원과 연결되어 있고 북서쪽으로는 빅토리아 호수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케냐의 마사이마사 국립공원과 맞닿아 있다. 이 드넓은 평원에 300만 마리의 동물과 독수리와 황새 등 350여종의 조류가 어울려 살고 있다.

▲ 들불로 돋아난 새싹을 먹고 있는 톰슨가젤.
ⓒ 김성호
초원의 들불은 새싹을 돋게 하는 자연의 선물

세렝게티 초원에는 곳곳에 들불을 놓아 시커멓게 탄 곳이 많았다. 내가 간 7월은 아프리카에선 겨울이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이기에 초원이 대부분 누렇게 변했고 간혹 파란 새싹들이 돋아난 곳이 보였다. 시커멓게 탄 초원에서 오히려 새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들불은 누 떼가 떠난 뒤 공원 관리인들이 새싹을 돋게 하기 위해 놓은 것이다. 초원의 들불은 밀렵꾼들이 동물을 몰거나 사냥 흔적을 감추기 위해 고의로 놓기도 하고, 건기에 나무끼리 부딪히고 번개로 인해 자연 발생적으로 발화되는 경우도 있다. 어떻든 들불은 재앙만이 아니라 자연의 재생을 돕는 역할이 더 크다. 모기 같은 해충을 죽이고 불에 탄 재는 거름이 되어 새싹들을 빨리 돋아나게 하기 때문.

실제로 내가 갔을 때도 불이 난 곳에는 다른 곳보다 새 잎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이 새싹을 먹고 있는 앙증맞은 동물이 바로 톰슨가젤이었다. 옆구리에 검은색의 줄무늬가 인상적인 톰슨가젤은 펄쩍펄쩍 뛰면서 달리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작은 몸집에 다리가 긴 톰슨가젤을 '대초원의 귀염둥이'라고 부르고 싶다.

톰슨가젤들은 새싹을 뜯어먹기 위해 초원의 여기저기를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처음으로 만난 톰슨가젤이 반가워 우리 차량이 가까이 다가가자,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고개를 숙여 새싹을 한번 뜯어 먹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영락없는 겁쟁이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사파리 차량의 도로를 가로막던 사자의 당당함을 넘어선 오만과 누 떼를 뒤쫓으며 사파리 차량을 불쾌한 듯 쳐다보던 하이에나의 거만함과는 전혀 다르다. 톰슨가젤이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것은 먹이사슬의 최하위 단계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대초원에는 사자와 표범, 치타 하이에나, 심지어 자칼까지도 호시탐탐 톰슨가젤을 노리고 있다.

▲ 큰 나무가지에서 자고 있는 표범(오른쪽 가지의 아래로 늘어진 부분이 표범의 다리).
ⓒ 김성호
아프리카 속담, 가젤과 사자의 이야기

오죽했으면 아프리카 속담에서도 매일 살아남기 위해 달려야 하는 가장 불쌍한 동물로 등장하겠는가. 초원의 최약자인 가젤과 동물의 제왕인 사자가 쫓고 쫓기는 이야기다.

"매일 아침 아프리카에선 가젤이 눈을 뜬다.
그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사자 또한 눈을 뜬다.
그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이 사자이건 가젤이건 중요하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은 질주해야 한다."


'가젤과 사자의 이야기'는 애초 미국의 컨설팅전문회사인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이 경제경영 보고서에서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해 "속도와 경쟁, 변화의 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소개한 뒤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 <마시멜로 이야기>,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들이 이를 다시 인용하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되었다.

가젤과 사자의 이야기는 이곳 세렝게티에서는 실제로 매일 일어나는 죽음의 경주다. 초식동물과 포식자 사이의 달리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질주다. 톰슨가젤과 사자의 빠르기는 시속 80.5km로 동률. 누가 먼저 달아나거나 달려드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톰슨가젤은 언제나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톰슨가젤이 가장 두려워하는 포식동물은 치타다. 치타는 무려 빠르기가 시속 112.7km나 되기 때문에 사자보다 훨씬 미리 접근하는 것을 포착하지 않으면 바로 붙잡히기 때문이다.

▲ 바위 위를 기어가고 있는 무지개아가마.
ⓒ 로렌스 스미스
체 게바라, '사자는 제국주의, 톰슨가젤은 아프리카 민중'?

지난 1965년 콩고민주공화국의 밀림에서 혁명투쟁을 하던 체 게바라는 인접국인 탄자니아에서 톰슨가젤의 사진이 있는 엽서를 어린 딸에게 보냈다. 체 게바라는 "사바나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작은 가젤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우리 딸 생각이 나더구나, 이곳엔 사자가 있다는 점만 빼면 별로 다를 게 없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가젤들이 누구한테도 쫓기지 않고 맘껏 달릴 수 있는데…"라고 썼다. 체 게바라는 사자를 제국주의로, 톰슨가젤을 아프리카 민중으로 본 듯하다.

톰슨가젤은 우리 차량이 다른 동물을 보기 위해 떠날 때까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톰슨가젤을 떠나 초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타조 두 마리가 다정스럽게 걸어가고 있고, 사자 2마리는 풀숲에 누워 있고, 하이에나도 더위에 지친 듯 푹 파인 흙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머리만 삐죽 내놓고 있었다.

더위에도 배가 고픈 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초원을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3마리의 기린도 그렇고 물소와 코끼리, 개코원숭이들도 보였다. 작은 연못에는 수십 마리의 하마가 고개만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생김새와 우스꽝스럽게 뛰어노는 모습으로 '초원의 어릿광대'라 불리는 누 떼와 얼룩말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는 그렇게 흔하던 누와 얼룩말이 아니던가. 세렝게티 초원도 평소 100만 마리의 누 떼와 20만 마리의 얼룩말, 15만 마리의 톰슨가젤 등이 뒤섞여 살고 있는 동물 천지세상이다.

내가 운전사에게 "동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말하자 그는 "동물들이 북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은 세렝게티에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3, 4월에 세렝게티에 오면 가장 많은 동물을 볼 수 있다"고 했다.

▲ 세렝게티 동물의 계절별 이동 경로.
ⓒ 세렝게티 국립공원
동물의 대이동을 이끄는 먹구름과 천둥번개

그 많던 동물들은 이미 4월부터 세렝게티 초원을 떠나 북쪽으로 물과 푸른 초원을 찾아 대이동을 떠났다. 지금쯤은 아마도 강 언덕과 물속에 사자와 악어들이 우글거리는 마라 강을 건너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곳 세렝게티에서는 건기가 시작될 무렵인 4월이 되면 누를 선두로 얼룩말과 가젤 등 초식동물들의 대이동이 펼쳐진다. 초식동물을 쫓아 사자와 치타, 하이에나 등 포식동물들도 움직인다. 세로나 강과 그루메티 강을 건너 마지막으로 마라 강을 지나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까지 갔다 10월 세렝게티에 우기가 찾아오면 다시 돌아온다. 무려 1000k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물 대장정이다.

남쪽의 세렝게티에서 출발한 동물들은 북서쪽의 빅토리아 호수 방향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북쪽의 케냐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을 거쳐 북동쪽을 통해 애초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오는 순환형 대이동을 한다. 단순한 왕복 대이동이 아니라 순환형 대이동을 해야 1년 내내 풍부한 물과 풀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와 얼룩말은 핏속의 본능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안다. 광활한 대초원에서 이들을 이끄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동물을 위한 도로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데. 바로 먹구름과 천둥번개이다. 세렝게티 대초원에 갑자기 먹구름과 천둥번개가 치면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달려간다. 먹구름과 천둥번개는 비를 몰고 오고 비는 초원에 새싹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세렝게티 초원의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얼룩말과 누.
ⓒ 김성호
대이동에서 누와 얼룩말은 백기사요 흑기사

머나먼 여행에는 설렘이 있지만, 고독감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누와 얼룩말은 그래서 함께 여행을 떠난다. 강에는 악어가 노리고 있고, 뭍에서는 사자와 표범 등 포식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세렝게티의 위험한 대이동에서 누와 얼룩말은 서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이자 백기사요 흑기사다.

시각이 뛰어난 얼룩말은 항상 한 마리가 보초를 서서 포식자의 등장을 재빨리 알려주고, 후각이 뛰어난 누는 물을 잘 찾아내어 물웅덩이로 안내한다. 얼룩말은 24시간 경계를 늦추지 않고 포식자가 나타나면 바로 "히히잉~"하는 경고음을 내는 동물 중 최고의 보초병이다.

누와 얼룩말은 같이 뭉쳐 다니면서 포식자의 공격에 인해전술로 집단방어를 하기도 한다. 서로 뜯어먹는 풀이 다르니 먹이싸움을 할 일도 없다. 재미난 사실은 얼룩말이 날씬하게 생긴 모습으로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한' 모양의 누보다 빨리 달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얼룩말이 시속 64.4km인데 반해 누는 시속 80.5km나 된다.

누 떼와 함께 동물의 대이동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관을 펼치는 것은 순록이다. 열대지방의 누와 한대지방의 순록. 누 떼가 건기를 피해 사자와 악어가 있는 강을 건너 아프리카 열대지방의 사바나 대평원을 가로질러 간다면, 순록은 겨울을 피해 커다란 강과 높은 산을 넘어 북극의 툰드라 지대를 건너간다. 누가 이동하는 세렝게티 대평원의 주인이 마사이족이라면, 순록이 이동하는 툰드라의 주인은 에스키모인이다.

▲ 세렝게티 초원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타조.
ⓒ 김성호
방랑은 인간과 동물의 동일 유전인자

인간의 역사도 누나 얼룩말처럼 끊임없는 이동의 역사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인류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나일 강을 따라 서아시아 지역과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문득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우리의 마음에는 이동의 본능이 꿈틀거린다. 수백 만 년 동안 인류의 핏속에는 디엔에이(DNA)를 통해 방랑의 유전자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머나먼 여행에선 생명의 위험과 이탈, 낙오, 이산가족이 생기게 마련이다. 누와 얼룩말의 대이동에도 어미와 새끼가 서로를 잃고 이산동물이 생기고 여행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동물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도 오지를 탐험하려는 여행객들은 오늘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세렝게티의 누와 얼룩말도 내년 4월이 되면 어김없이 대이동을 시작한다.

톰슨가젤을 떠나 우리 차량은 나무숲이 보이는 초원의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20여 마리의 얼룩말이 풀을 뜯거나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얼룩말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에는 그렇게 흔하던 얼룩말과 누 떼가 정작 세렝게티 초원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그만 강가에는 30여 마리의 얼룩말과 누가 다정스럽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위쪽의 강물에서는 2마리의 얼룩말이 코를 아예 물속에 대고 코끼리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무척 목이 말랐나보다. 누와 얼룩말을 보려면 나무 그늘이나 강가에 가야 했다.

▲ 나무 밑에서 풀을 먹거나 쉬고 있는 얼룩말.
ⓒ 김성호
얼룩말과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

기다리던 얼룩말을 보자 '초원'이가 생각났다. 실제 자폐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 말이다. 어릴 적부터 내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아프리카 여행의 본능을 자극한 영화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 남미 여행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함께.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는~ 수십 만 마리의 초식동물들이 무리를 지어살고 있습니다~. 해마다 동물들은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습니다~. 저어기 갓 태어난 새끼와 함께 있는 어미 얼룩말이 보이는군요…. 어린 새끼는 생후 즉시 달릴 수 있습니다…."

'초원'이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했던 그 얼룩말이 영화 속 대사처럼 세렝게티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오직 마라톤을 통해서만 행복을 느끼는 자폐아의 실제 이야기를 그린 <말아톤>은 단순히 자폐증 어린이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장애를 통해 인간의 소외를 불러오는 오늘날의 사회적 자폐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폐증을 앓은 '초원'이에게 달리기는 사회와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초원'이에게 얼룩말은 동물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달리기라는 소통수단을 통해 세상과 말하는 친구였다. 영화의 끝맺음 장면에도 '초원'이는 세렝게티 초원에서 얼룩말과 달리기를 하면서 행복에 겨워한다.

말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뜻을 전달하는 '우정의 매개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상처의 칼'이 될 때 누구든 자폐아가 된다. 삶아가면서 말로써 받는 상처가 얼마나 많은가. 자폐증은 유아자폐증뿐 아니라 성인자폐증, 사회자폐증, 국가자폐증 등 자신과 가족, 개인과 사회, 국민과 국가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소통상의 장애가 해당된다.

▲ 누 고기의 남은 살점을 뜯어 먹고 있는 독수리떼.
ⓒ 김성호
세렝게티 초원에서 달리던 '초원'이가 갑자기 말문을 트는데

'초원'이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 사회적 장애는 무엇일까. 나도 어린 시절 텔레비전의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보면서 얼룩말과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초원'이에게 그대로 전이되고 있었다. '초원'이는 애초부터 장애아가 아니었다.

그 무엇인가가 '초원'이가 사회를 향해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인간이 6백만 년 전 침팬지와 헤어져 밀림에서 내려온 뒤 과학기술 분야에서 놀라운 속도로 진화해왔지만, 뒤에 남겨진 인간의 발자국에는 끊임없는 소통의 문제를 남겼다. 역사의 진보만큼 인류의 행복지수가 정비례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눈에 갑자기 환상이 어른거렸다. 나와 함께 사파리 차량에 타고 있던 '초원'이가 갑자기 차에서 뛰어내려 얼룩말과 세렝게티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초원'이 뒤로는 놀란 사파리 차량의 운전사가 붙잡으려고 뛰어가고…. 결국 사파리 운전사에게 붙잡힌 '초원'이가 외친다. "아저씨, 나 얼룩말과 달리기 했다~"라고.

'초원'이는 얼룩말과 달리기를 한 후 말문이 트여 사회적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수다쟁이가 된 아들의 모습을 본 '초원'이의 어머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초원'이 대신 얼룩말을 쫓아 세렝게티 초원을 뛰어가고 있었다.

▲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짝짓기를 하는 얼룩말.
ⓒ 김성호
'초원'이의 실제 주인공과 어머니

나는 영화 <말아톤>은 본 뒤 얼마 되지 않아 '초원'이의 실제 주인공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남북교류단체인 사단법인 지우다우에서 개최한 '장애인 금강산 통일기행'에서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도우미들이 함께 북한의 금강산을 오르는 행사였다. 행사에는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과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이희아가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참석해 금강산에 올랐다.

그런데 형진이와 희아의 뒤에는 늘 따라 다니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형진이를 달리게 하고 희아에게 장애를 극복하면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한 것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이었다. 다만 늘 그렇듯 어머니의 희생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

형진이가 금강산에 오르는데,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을 시켰다.

"형진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몸매는?"
"끝내줘요."


영화 장면 속의 대사와 똑같다. 영화에서는 '형진'이 대신 '초원'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형진이를 사회와 소통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모성의 본능은 야수들이 사는 아프리카 대초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는 얼룩말도 새끼를 포식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리 안으로 감싸고,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누 떼가 이동할 때 새끼가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뒤에서 밀고, 마니아라 호수에서 코끼리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새끼를 코로 끌어당기고, 개코원숭이가 새끼를 자신의 등꼬리 부분에 태우고 가는 것도 모두 어미다.

어미 톰슨가젤은 풀숲에 숨겨 놓은 새끼에게 다가가는 치타의 눈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되어 유인하다 새끼 대신 죽어간다. 마라 강을 먼저 건너간 어미 누는 새끼가 겁에 질려 강에 뛰어들지 못하고 건너편 강둑에서 서성거리자 다시 되돌아 강을 건너 새끼를 무사히 뭍에 오르게 한 뒤 자신은 악어의 밥이 되고 만다. 자신의 목숨보다 새끼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어머니와 어미뿐이다.

▲ 물통의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시는 개코원숭이.
ⓒ 김성호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시는 개코원숭이

한참을 동물을 쫓아 초원을 달린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오후 2시께 핌비(Pimbi) 캠핑장으로 들어갔다. 음식냄새가 나자 근처의 개코원숭이 3마리가 캠핑장 부엌까지 들어와서 음식을 가져가려 하자 요리사가 쫓아냈다. 그냥 갈 원숭이들이 아니었다. 개코원숭이들은 부엌 대신 사파리 차량에 남아 있던 감자 칩을 챙겨서 순식간에 나무숲으로 달아나 버렸다.

덩치가 큰 수컷 개코원숭이는 슬금슬금 주위를 살피더니 철제 물탱크로 다가간다. 놀랍게도 잠겨 있는 물통의 수도꼭지를 앞발로 틀어 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다. 사람이 수도꼭지를 틀어 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개코원숭이는 물을 마신 다음 꼭지를 다시 돌려 잠그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 물이 계속 흘러 나왔다. 물을 마신 원숭이가 수도꼭지를 다시 잠그는 예의만 갖췄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후 4시가 되어 다시 동물 구경에 나섰다. 10분 정도 달리자 표범이 나무 가지 위에 올라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큰 나무의 중간 높이의 가지에 배를 대고 축 늘어져 자고 있었다. 앞뒤 발과 꼬리는 떨어지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꼭 감싸고 있었다. 이른바 '빅5'에서 가장 보기가 어렵다는 표범을, 멀리서나마 자고 있는 모습으로라도 본 것은 다행이었다.

단독생활을 하는 표범은 45kg의 사냥감을 물고 6m 이상의 나무 위로 끌고 가 며칠 동안 천천히 배를 채운다. 초원에는 사자와 하이에나 등 경쟁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표범 역시 사자 등 다른 고양잇과 동물들이 그렇듯 밤에 사냥하기 위해 낮에는 잔다.

표범이 자고 있는 나무 멀리에는 사슴영양의 일종인 하테비스트(Hartebeest) 5마리가 어둠이 몰려오기 전 잠자리를 찾아가는 초원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임팔라와 비슷한데 하테비스트는 얼굴이 더 좁으면서 길고, 뿔도 더 작고 단단한 것이 다르다. 여우같이 생긴 작은 자칼 한 마리도 사자가 먹다 남은 고기라도 없나하고 초원을 두리번거리며 다닌다.

▲ 귀 뒷부분에 펜을 꽂은 듯한 비서새.
ⓒ 김성호
새들의 항의, 세렝게티에는 나도 있다

세렝게티 초원에는 동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봐 달라'는 듯 새들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넓은 초원에 비서새가 한껏 멋을 부리고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관학의 자태와 붉은배찌르레기의 화려한 깃털도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의 희귀조류 중 하나인 비서새(Secretary Bird)는 새의 도가머리가 깃펜을 귀에 꽂은 비서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뱀을 잡아먹는 새라고 해서 뱀잡이수리로도 불린다. 다리가 긴 이 새는 밤에는 나무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자다가 낮이 되면 땅에서 곤충과 뱀 등을 잡아먹는다.

사파라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건너 초원으로 걸어가는 관학(Crowned Crane)도 그 자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머리에 밤 모양의 노란 관 같은 볏이 있어 이름 붙여진 관학은 빨강 노란 검정 흰색의 다양한 색깔로 화려함을 자랑한다. 걷는 모습도 마치 공주처럼 우아하다. 우간다의 나라새다. 붉은배찌르레기(Superb Starling)는 머리는 검고 깃털은 윤택이 나는 푸르고 녹색 빛의 작은 새다.

초원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먹잇감을 노려보는 대머리 독수리도 빼놓을 수 없다. 세렝게티 사파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 나비 힐 매표소 근처 초원에서 나는 독수리 50여 마리가 누 의 머리 부분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몸통은 사자나 하이에나가 먹고, 머리 부분의 뼈 사이에 남은 살점을 독수리들이 뜯어먹고 있었다. 초원의 청소부 서열을 보더라도 독수리는 최하위이니 좋은 고기가 남을 리가 없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고기를 잡은 뒤 뾰족한 부리로 쫒아 물어뜯으니 살점이 떨어져 나왔다.

초원의 조그만 바위 위에는 화려한 도마뱀의 일종인 무지개아가마(Red-headed rock Agama, Rainbow Lizard)도 보인다. 몸통은 붉고 꼬리 부분은 파란색을 띤 무지개아가마의 색깔은 오염되지 않은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몸 색깔은 카멜레온처럼 환경에 따라 스스로 바꾼다.

▲ 초원의 도로를 건너가는 아름다운 관학.
ⓒ 김성호
세렝게티 초원의 텐트는 동물과 동침하는 곳

동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기분만으로도 세렝게티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게임 드라이브가 부족하면 초원 드라이브로 보충하면 된다. 탄자니아 어린이들은 "세렝게티, 잘 보존해야죠, 우리의 미래니까요"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세렝게티 초원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전 세계의 보물이며, 인류가 자연에서 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저녁 7시가 되자 초원의 바다는 어둠의 바다로 변했다. 깜깜한 어둠의 병풍이 쳐진 세렝게티 초원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김광석의 시디음악을 듣는 것뿐이다. 동물들이 뛰어노는 대초원과 김광석의 노래는 제법 어울렸다.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사람에게는 아프리카의 기나긴 밤을 보내려면 음악이 필요하다.

캠핑장 주변의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밥 도둑질을 하러 몰래 들어오는 개코원숭이들의 부스럭 거리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세렝게티 초원 안의 텐트 속에서 꿈만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동물들과 동침을…. 응고롱고로의 심바 캠핑장과 달리 세렝게티 초원은 고도가 낮아서 그리 춥지 않았다.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태그:#아프리카, #세렝게티, #말아톤, #얼룩말,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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