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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에버 방학점의 유일한 대의원 진현미씨
ⓒ 함박은영
"나 할 말 있어."

불길한 예감이 진현미(38)씨 머리를 스친다.

"내일부터 회사 유니폼 입고 근무할게."

조합원끼리 맞춰 입는 파란 티셔츠를 벗겠다는 말이었다. 파업을 하루 앞두고 조합을 탈퇴하겠다는 '언니들'의 얘기에 진씨는 힘이 빠진다.

통상 조합원 20명당, 대의원 1명에 위원장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진씨는 현재 조합원 67명인 홈에버 방학점의 유일한 대의원이다. '젊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에 등 떠밀려 시작한 조합활동이었다.

지난 22일 홈에버 방학동점에서 진씨를 만났다. 낮 12시부터 근무라는 진씨와 함께 지하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근무하는 계산대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피곤하지 않냐"는 인사에 "솔직히 힘들다"며 말문을 연다. 아무래도 아침에 받았다는 조합원들의 메시지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파업에 들어가는데 5명이나 조합을 탈퇴하려 한다고.

"어제까지 열심이던 언니가 나가겠다 그러네…. 그래도 아무 말 못해요. 그 심정을 잘 아니까. '얘기 좀 하자'고 문자오면 가슴이 철렁해요. 나한테 할말이 뭐 있겠어(웃음). 조합 관둔다는 얘긴데. 힘 빠지는 거지. 끝까지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우리 잘 되자고 하는 건데, 우리 안에서 분열 나면 안 되잖아."

비정규직 현실에 눈뜨게 해 준 '비정규보호법'

2004년 5월 8일 홈에버에 입사하기 전까지 진씨는 초등학생 남매를 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그가 일자리를 찾기 시작한 것은 '내 집 마련'에 쓴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다. 작은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남편의 수입만으론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근무 중에 피켓 들고 시위하는 조합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단다. 진씨가 정작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된 직후였다.

"'비정규직보호법' 덕분에 비정규직이 차별당하고 있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법 만드는 사람들이 진짜 비정규직들 이야기를 들어나 봤는지 모르겠어요. 탁상공론으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좋다고 박수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비정규직의 삶은 쉽지 않아요. 힘이 없으니까 뭉치는 수밖에. 우리끼리 그래, 어쨌든 끈질긴 놈이 이긴다고."

▲ 이랜드 일반노조 집회 모습
ⓒ 이랜드 일반노조
현재 홈에버 방학점의 전체 조합원 수는 67명으로 30~5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3교대 8시간 근무에 식사시간 1시간, 30분의 휴식시간이 있지만 그나마 순번을 놓치면 쉬지도 못한다. 화장실을 갈 때도 팀장이나 관리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진씨처럼 계산대 수납 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7시간 30분을 서 있는 상태로, 쉴 새 없이 팔을 움직여야 한다. 통증 때문에 어깨나 팔목에 파스를 붙인 채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다. 3년 차인 자신도 다리의 실핏줄이 다 터졌다며 바지를 살짝 걷어 보인다. 허벅지까지 울긋불긋하게 멍이 들어있단다.

한 달을 꼬박 일하면 세금 떼고 80만원 남짓한 돈이 수중에 들어온다. 그나마 아이들 학원비와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의 삶. 현재 홈에버 정규직들에게는 100만원이 넘는 기본급에 시간외 수당, 거기에 상여금까지 지급되고 있다. 그러나 진씨는 적은 임금보다도 더 참기 힘든 것이 '모니터링'이라고 토로했다.

"자주 이용하는 고객 중에서 모니터링 요원을 선발했어요. 손님처럼 와서 직원들 근무하는 걸 감시하고 적어내요. '인사를 친절하게 안 했다, 웃지 않았다, 직원들끼리 잡담했다' 등등. 어떨 땐 '빨간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어요. 회사측에서 발랄해 보인다고 바르라 그러거든. 그렇게 한 번 지적당하면 4시간 가까이 '점프교육'이라는 걸 받아요. '웃으면서 인사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는 거지.

신입 사원 중에 연달아 5번 지적당한 사람이 있었어요. 처음이라 서툴렀을 뿐인데…. 결국 스트레스를 못 견뎌 그만두더라고. CCTV로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회사가 돈 주고 '자기 사람' 감시하는 게 말이 돼? 회사에서 하나 잘해주면 열 개로 갚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인데…. 누가 모니터링 요원인지 모르니 일할 때마다 긴장해요. 감시당하는 기분. 그게 가장 힘들어요."


모니터링 제도는 '까르푸'를 이랜드 그룹이 인수, '홈에버'로 바뀌는 과정에서 새로 도입된 제도다. '홈에버로 바뀐 뒤 나아진 건 없냐'는 물음에 진씨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오히려 자신들이 체감하는 차별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고. 일례로 얼마 전 시행된 '직무급제' 얘기를 꺼낸다.

얼핏 보면 정규직 같기도 한 직무급제

▲ 직무급제 모집 포스터의 일부분. 임금테이블에 대한 내용이 다르다.
ⓒ 이랜드일반노조 블로그
오는 7월 '비정규직보호법'의 시행을 앞두고 홈에버는 '직무급제'라는 처방전을 들이밀었다. 1000명의 지원자를 받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도의 임금 테이블이 적용되는 또 다른 '기만'이었다고. 진씨는 다시 파업이 시작될 거라고 예고했다. 그러나 급료를 포기하며 파업을 강행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들에 대한 회사의 처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 날이 정확히 6월 10일이예요. 그 다음 날부터 파업 예정이었는데, 저녁 때쯤 사내 통로에 종이가 붙더라고. 그게 '직무급제 정규직 채용 공고'였어. 회사 관리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진짜 정규직이 되는 것처럼 얘기하면서, '입사지원서'랑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라고 하더라. 그럼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신규입사'인거잖아. 그 동안 일한 것 인정도 못 받고, 수습기간부터 다시 거치란 얘기였죠.

임금도 정규직하고 같은 것처럼 말했지만 아니었어. 포스터에 임금 얘기만 쏙 빼놨더라고. 대신 자기들끼리 보는 이메일에는, 임금 얘기가 들어있어요. 별도의 임금 테이블 적용하는 거라고. '직무급제'를 새로 만들었지만, 결국 정규직으로는 안 해주겠다는 얘기잖아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다들 넘어갔죠. 근데 우린 더 화가 났어요. 우릴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았어요."

진씨의 말처럼 간부들에게 전달된 이메일에는 포스터에 없던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

'직무급제는 '직무에 따른 급여제도'이며 별도의 급여 테이블이 적용됨.'

임금에 대한 상세한 사전 정보 없이 직무급제를 신청했던 사람들은 뒤늦게 임금 이야기를 알고 "속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규직과 같은 월급이 적용되는 줄 알았던 까닭이다.

급조된 제도 말고 포스터 자체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문제의 발단은 "홈에버의 가족을 모집합니다"라는 글귀였다. 신규 직원을 채용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비정규직인 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고. 자신들은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작은 단어 하나에도 민감해질 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약자 보호석과 비슷한 비정규직 보호법

▲ 홈에버 방학점
ⓒ 함박은영
조합의 요구는 '명확한' 정규직, 확실한 '홈에버 가족'이 되는 것이다. 한꺼번에 정규직화 하는 게 회사측에 부담이 되면,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부터 정규직화해 달라. 대신 3개월 이상 비정규직들에게는 고용보장을 확실히 해 달라. 이것이 조합측의 주장이다.

진씨는 파업 투쟁 때마다 맨 앞줄에 선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대의원은 '잘해도 못해도 욕먹는 자리'다. 솔직히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은 없을까. 그는 자녀들을 보면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한 달에 8번 있는 휴가 중 절반을 조합 일에 쓴다는 그는 "내가 조금 손해 본다 생각하면 못할 거 없다"며, 많은 분들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난다고 말한다.

"남편도 비정규직인데 '이왕 한 거 열심히 해서, 위원장도 하고 노동조합사무실에 들어가라'고 응원한다.(웃음) 갈등이 왜 없겠나. 그래도 조합 활동하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 그전엔 회사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빨간 립스틱 바르라면 바르고 튀니까 눈 화장 하지 말라 그러면 안 하고. 우리가 조합 활동하니 회사측에서도 당황하는 거지. '어, 얘네가 말도 할 줄 아네.'(웃음)"

진씨가 소속된 이랜드일반노조(위원장 김경욱)는 '가짜 정규직'인 '직무급제 정규직 채용'에 반대하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홈에버 방학점 조합원들도 23일부터 이틀간 파업에 들어갔다.

"누가 그러더라. 보호법은 '노약자 보호석'이랑 똑같다고. 따로 두 칸만 만들어놓고 알아서 해결하라 그러냐. 전 좌석에서 노약자를 보호해야 되는 건데, 오히려 '보호석' 때문에 역으로 소외당하는 느낌이라고.(웃음) 비정규보호법 때문에 '우리가 차별당하고 있구나' 확실히 안거죠. 보호법은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보호법 시행되면 한번 봐요. 어떻게 되나…. 어쨌든 빨리 해결 되면 좋겠어. 오래가면 회사도 우리도 지치는 싸움이니까요."

어느새 근무 시간인 낮 12시다. 파란 티셔츠를 입고 나온 진씨를 입구에서 불러 세웠다. 사진 한 장 찍고 싶다는 부탁에 곱게 웃으며 양손을 뒤로 모아 보인다. '비정규직 차별과 해고를 중단하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반가웠다고 인사하며 종종걸음으로 계산대로 뛰어들어가는 진씨. 지금부터 7시간 30분 동안 서서 '웃으며 인사'하고 '친절히 계산'해야 한다.

뒤돌아서는 길에 게시판에 붙은 '직무급제 모집' 포스터가 눈에 띈다. 비정규보호법이 시행되면 진씨도 '홈에버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태그:#비정규직, #이랜드일반노조, #홈에버, #진현미, #직무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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